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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문제는 ‘네가 결혼 안 한 탓’?
황우여 장관, 교육부 직원 미혼자 현황표를 내려라 

 

※ 필자 김홍미리 님은 여성주의 연구활동가입니다. –편집자 주

  

 

우리는(혹은 그들은) 왜 이렇게 가족에 집착할까? 매우 개인적인 일인 것 같은 결혼은 왜 매우 개인적이지 않은 국가 경쟁력의 이름으로 미혼(未婚)/비혼(非婚)의 일상을 압박하는 중대한 메뉴가 될까.

 

얼마 전 교육부 직원들의 결혼 여부를 항시 점검하는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에 대한 기사가 올라왔다. 매월 직원들 미혼자 현황을 보고받더니, 이제는 아예 집무실 벽에 미혼자 현황판을 걸었다고 한다. ‘가족과 결혼의 가치에 더 무게를 두기’ 바라는 황 장관의 의지는 이렇게 결혼 점검표의 등장으로 가시화됐다.

 

‘미혼자 많은 과장은 국장 못되게 한다’는 황 장관의 농담 반 진담 반이 사석에서 얹어지면서, 이 현황판은 보험회사에나 걸려있을 법한 결혼 “실적” 현황판이 됐다. (그러면 결혼 두 번 한 사람은 승진 가산점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님?)

 

누가 들어도 반박하기 어려울 ‘가족과 결혼의 가치’라는 단어의 조합은 대놓고 황 장관의 처사를 비판하기 어렵게 만든다. 평소 여타 사회 문제에 비판적인 입장으로 기사를 써온 한 일간지는 현황판이 걸렸다는 것과, 교육부의 미혼 직원이 직급별, 성별 몇 명이라는 사실(만)을 꼼꼼히 보고했다.

 

[교육부직원 미혼자 현황판]은 이렇게, 불편하지만 딱히 뭐라고 꼬집어 비판하기 어려운 ‘사소한’ 정치의 좋은 예다.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고, 사적이지만 전혀 사적이지 않다.

 

“회사에서도 결혼 압박을 받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다”는 한 직원이 “그래도 변화가 있을 것 같아 기대된다”는 애매한 결어를 남기는 건, 한국 사회에서 결혼 여부는 이미 윤리적인 문제로 진단받기 때문이다.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출산 통제의 시절에는 아이를 낳는 일이 애국에 저해되는 일로 여겨졌듯이, 초저출산율을 자랑하는 지금은 결혼, 출산의 거부나 지연은 (국가의 앞날 따위는 상관없는) 이기적인 개인에 대한 비난으로 쉽게 연결된다. 황 장관의 이야기가 ‘출산과 보육, 아이들을 위한 미래 투자가 국가 경쟁력에 도움이 된다’에까지 다다른 건, 결혼 안 한 개인이 국가 경쟁력을 말아먹는다는 궤변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구미를 당긴다.

 

출산이 애국? 국가의 위기는 가족 탓?

 

▲ 2006년 서울시 행사로 홍보된 미팅 페스티벌 열차. ©강선미 
 

새삼스럽게 결혼과 출산이 늘 국가의 통제 아래 있어왔음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겠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련의 과정들은 사실상 한 번도 온전히 개인의 선택으로 남겨진 적이 없었다.

 

‘결혼적령기’라는 용어는 일상 생활에서 여전히 통용되고 있고, 1960-1970년대 산아 제한 정책부터 2000년대 이후 출산 장려 정책에 이르기까지 출산율은 국가 경쟁력과 직결된 문제로서 주요한 정책 대상이 되어왔다.

 

이들이 모델로 삼는 근대 이성애 중심의 핵가족 이데올로기는 ‘모두가 다 그런 가족일 수는 없는’ 상황에서도 ‘가족은 그래야 한다’는 이야기를 반복해왔다. 더욱이 일제 식민기와 전쟁, 분단과 전후 복구 시대 등 가족을 ‘균질적으로 정돈할 수 없는’ 시기를 지나온 한국 사회에서 가족은 단일한 형태를 요구 받으며 지속적으로 ‘기획’된 바 크다.

 

가족이 꾸준히 기획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 방식은 언제나 가족 ‘위기’ 담론과 관련되어 있다. 국가가 선호하는 가족 형태를 이룰 수 없거나, 가족 관행을 벗어나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다른 삶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변화일 때조차도 그것은 ‘위기’라는 이름으로 표시됐다. 이런 가족 위기 담론은 곧 국가의 위기를 불러오는 원인으로 지목되면서, 국가 위기의 책임은 고스란히 ‘그런 가족’을 만들지 못한 개인에게 간편하게 돌아갔다. 그 오래된 유물이 황우여 장관 집무실 벽에 붙은 [교육부 직원 미혼자 현황판]임을 말해 무엇하랴.

 

생각보다 가족을 구조와 기능 중심으로 사유하게 된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하지만 지난 수십 년간 국가로부터 ‘단일한’ 구조와 ‘무리한’ 기능을 추궁 당하는 사이, 우리는 시나브로 ‘국가의 위기는 가족 탓’이라는 이념을 내면화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결에 ‘출산이 애국’이라는 말을 수용하고 있지는 않은가 말이다.

 

서로 보살피는 마음을 배우기보다 우선 밟고 올라가는 일을 독려 받아온 사람들은 채워질 시간을 잃어간다. 불안한 시장은 텅 빈 사람들을 착취하는 방법을 고약하게 업그레이드 해간다. 채울 수 없고 예측할 수 없으며 미래를 기획할 수 없는 시대에, 아이를 생산하지 않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 거다.

 

아이를 낳는다고 해서 이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불안의 시대에 출산은 애국이 아니라 파산이다. 오히려 문제 해결 가능성은 다양한 가족 구성권을 옹호하면서 열릴 수 있다. 정해진 삶의 방식 말고 다른 삶을 상상하는 능력이 완전히 상실될 때 이 세계는 숨쉬기를 멈출 지도 모른다.

 

성급한 결혼 계약을 넘어

 

사실 결혼과 출산이 아닌 다양한 가족 구성의 방식들이 존재한다. 누구나에게 의지하고/의지 받는, 보살피고/보살핌 받는 공간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가족’을 구성한다. 결혼에 적합한 성적 지향과 경제력, 출산 능력과 양육 능력 있는 신체 등 결혼과 출산이 ‘허락된’ 소수를 제외한 다수는 그 배제의 경험 덕분에 다른 삶의 방식들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영국의 시민동반자법(civil partnerships), 미국의 시민결합제도(civil unions), 호주의 사실혼(de facto mateship), 프랑스의 시민연대협약(PACS) 등은 결혼이라는 배타적인 계약을 넘어서려는 시도들이다. 성급한 결혼을 넘고, 결혼하지 않은 자에 대한 편견을 넘고, 다른 파트너십을 만들어가는 시도인 거다.

 

황 장관은 또한 ‘일-가족 양립’하는 문화가 자리잡아야 한다며 일갈했다. 얼핏 페미니즘이 오랫동안 말해온 일-가족 ‘조화’를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미혼자를 단속해가며 기혼자를 만들고 말겠다는 기막힌 기획에 끼워 맞추려는 ‘일-가족 양립’은 페미니즘 흉내내기이자 사기다. (심지어 페미니스트인 나는, 현행법상 결혼이 허락되지 않은 사람들이나 결혼으로 가족을 구성할 생각이 없는 이들에게 매우 구체적인 불편함과 차별, 배제를 낳는 황우여식 가족관을 보태는 말로 ‘일-가족 양립’이 등장하는 것이 매우 치욕스럽다. 이런 오용을 피하기 위해 “다양한 가족 구성권을 보장하는 조건에서의” 일-가족 조화라고 써야 할 판이다.)

 

연애와 결혼, 출산은 누구나 거쳐 가는 삶의 경로일 수 없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삼포세대)는 말도, 이 세 가지를 과거의 방식 그대로 욕망해온 사람들에게만 ‘포기’라는 의미를 가진다. 출산을 원치 않거나 결혼 제도에 편입할 의사가(혹은 자격이) 없거나, 소모적이고 소비 지향의 연애에 관심이 없다면 지금의 시대는 다른 파트너십, 다른 삶의 태도, 다른 연애 방식을 감행해보는 가능성의 시간일 수 있다.

 

당연한 의무로 ‘성급한’ 결혼이 판치던 때보다는 삶의 방식 중의 하나로서 신중한 결혼이 고려되는 지금이 더 정의롭다. 문제는 이런 가능성의 타임을 발견하지 못하는 황우여 장관 같은 사람들이다. 앞도 뒤도 없이 ‘일-가족 양립’이라는 말을 오용하고, 가족 구성의 권리를 제한하며,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인 정시 퇴근을 (가족의 이름으로) 선심 쓰듯 내어놓는 일만큼 무지해 보이는 일은 없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교육부직원 미혼자 현황판을 그 방에서 내려라. 그 빈 벽을 보며 집무실에 걸려야 할 것은 무엇인지 사유의 시간을 가져보길 권한다.   김홍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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