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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의 마지막 독백
<모퉁이에서 책읽기> 이상경 “인간으로 살고 싶다”  

 

※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읽고 쓰는 사람, <여성, 목소리들>의 저자 안미선의 연재. –편지자 주

 

 

아이야, 너는 나보고 가지 말라고 하는구나. 그 말에 나는 무춤하게 서서, 그렇게 또랑또랑 큰소리로 말하는 너의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게 된다. 밖에는 눈이 내리고 그 요철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세상이 완연히 굴곡질 터인데, 내 귓가에는 너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들리는구나. 나보고 ‘바보, 등신 아줌마’라 하였느냐. 네 말이 옳다. 나는 바보요, 등신이다. 이렇게 침을 흘리고 팔다리를 비틀거리며 기우뚱거리며 일어나 움직이는 모습이 네 눈에는 필시 천치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네가 내 몸 껍데기만 주시하여 볼 뿐, 그 아래에서 생동하여 움직이는 영의 기운을 느끼지 못하는 탓이렷다. 내 눈동자가 아주 탁해지고 흐려져 너는 이 외피 속에 구슬처럼 빛나고 영롱한 어떤 것이 여전히 남아, 숨을 씨근덕거리고  있음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그런 것이 있냐고 네가 되묻는다면, 나는 단연코 있다고 답할 것이다. 이 세계를 육의 눈으로만 보는 것은 반쪽이요, 영의 눈으로 함께 볼작시면 그 온전한 모습이 너의 눈에도 완연히 드러나게 될 것이니, 몸이 사위어가도 생명의 불꽃은 여전히 불타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니 아이야, 나는 가야 한다.

 

▲ <인간으로 살고 싶다>(이상경 지음. 한길사. 2000)

 

가면 이제 죽는다고 울고불고 하는 것은 네가 아직 인생이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천지 고아나 다름없는 네가 이 떠돌이 늙은이를 얼마나 살뜰히 걱정하고 챙겨주었는지 기억하고 있으니. 가진 것 없는 나도 메마른 가슴에서 나는 진물 같은 정이나마 네게 주려고 애썼던 것을.

 

여관, 양로원, 보육원을 전전하며 퍽도 많은 사람들과 부대꼈는데, 그중 헤어질 때 내 손을 잡고 울고불고한 사람들도 곧잘 있었더랬다. 내가, 풀 데 없는 정을 그들에게 친절한 말로, 떡 해먹는 것으로, 일을 돕는 것으로 쏟으면 그들도 세상에 둘 데 없는 정을 오롯이 나에게 주기도 하였다. 그것은 일순이었으나 졸지에 아이들과 집을 잃고 주린 마음에 객지에서 서성이던 나에게 그 한가지로 마음이 족하다 하였다.

 

그러므로 나와 마찬가지로 땟국물 흐르고 사람이 그리워 품에 안겨드는 여남은 살 너에게도, 부모 없는 자리에 우리가 나눈 웃음이 그다지도 절절했겠구나 미루어 짐작이 간다. 그 어느 것도 나와 상관없는 일이니 사건이 되어가는 형편이나 구경할까 하는 생각으로 버티었지만, 울컥한 마음이 채 사라지지 않는 것을 보면 너와의 짧은 일별도 생채기에 앉아 있던 뜨뜻한 딱지처럼 어지간히 내 속을 위무해주었던 듯하다.

 

아이야, 나는 죽으러 가는 것이 아니다. 살려고 간다. 언제나 사는 길을 택해왔다. 길이 있어 정한 것이 아니라 살려고 하면 그 길밖에 없었다. 청춘일 때도,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것이 없다고 이를 물고 살았다. 사람이 짐승처럼 주는 밥만 먹고 비단옷을 입고 똥만 잘 누면 그게 사람인 것이 아니라, 사람은 자신의 사람다움을 어디까지나 증명하여야 하고, 머무르지 말아야 하고, 자신의 길을 끝까지 만들어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딴에는 그리 살아왔다.

 

그래서 이 세상의 온갖 화려한 찬사와 안존할 집이 사라졌어도 나는 절망하지 아니하였다. 붓을 팽개치지도, 머리를 깎고 중이 되지도 아니하였다. 수덕사의 일엽이 그렇게 권하여도 나는 되레 그의 진지한 제안을 비웃었다. 나는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이 하나의 오솔길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적막하고 쓸쓸할지언정 세상과 싸우고 나와 싸우는 것을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금강산에서 애간장을 끓이며 피로 그린 그림이 불에 허망하게 타버리고, 수족이 떨려 운신이 자유롭지 못할 때도, 내 자식이 너만 할 때 저 혼자 죽어버리고, 세상 사람들이 나를 타매하고 부정한 여편네라고 한 칸 방조차 허락하지 않을 때도, 나는 한 번도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나는 나이고, 한 사람으로서 개성을 가진 이였다. 그 개성을 지킨다는 것이 조선 여자에게 허락되지 않은 일이고 보면, 이 땅 무수한 사람들의 고혈과 힘으로 덕분에 내가 얻게 된 지식과 작은 재능을 어떻게 하면 잃어버리지 않고 이곳에 되돌릴 수 있을까 몸부림쳐왔다. 그것이 나의 개성이었다. 나였다.

 

나는 지금까지도 나의 이야기를 담은 글을 쓰고 있단다. 하소연을 할 생각이었다면 단 한 줄의 글을 쓰지도, 한 점의 그림도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떨리어 알아볼 수 없는 글씨에, 쓸 데 없는 얘기로 누구를 괴롭히려고 하냐는 질책의 소리가 쟁쟁하지만 나는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아이야, 내가 지금 나서는 길은, 죽으러 가는 길이 아니라 살러 가는 길이다. 아무도 모르게 내가 빈 방에서 지켜온 것이 무엇인지 네가 안다면, 이 세상에 이웃 하나 없어도 내가 세상 모두를 이웃 삼아 건네온 말이 무엇인지 안다면, 너는 그렇게 눈물을 담은 눈으로 애처롭게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박수를 치고 웃음을 지으며 ‘장하오, 아주머니. 평생 배신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으니, 어찌 떳떳하다 하지 않겠소!’ 하고 내게 넉넉히 칭찬을 할 수도 있겠다.

 

애석한 것이 있다면, 사람으로 태어나 여자로 태어나, 그래도 조선 여자로 세상 사람으로 뭔가 더 굳건히 해놓기를 꿈꾸었는데 딱히 세상에 돌려준 것이 없다는 자괴감이다. 표변하는 사람들을 보고, 등 돌리는 벗들을 보고, 궁핍한 생활 속에서 나도 모르게 조금씩 겁먹었다. 숨이 막히었다. 그 시간 속에서 좀 더 활발하지 못하고 마음껏 생산해내지 못했으나, 그 또한 욕심이겠지.

 

가슴은 죽은 자식과 산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타들어가고, 육신은 병으로 곯아갔으며, 아무도 모르게 밤새 울고 한탄한 시간이 없지 않았으니, 묵묵히 붓을 들고 숨을 쉬어 정신을 차려 길을 놓지 않는 것만 해도 나에게는 발버둥이 필요한 것이었다.  아무도 나를 모른다 해도, 내가 일개 존재로 나의 개성을 끝끝내 잃지 않고 이 자리에 있음으로, 내 오솔길을 혼자 여전히 걸어가고 있음으로 나는 이 세상에 의미가 있다고 믿었다. 믿고 싶었다.

 

그러니 알겠느냐, 아이야. 저 문 밖의 외길은 이때까지 걸어온 길들과 다른 길이 아니다. 저 눈보라는 내가 겪은 바람들과 다른 것이 아니다. 내가 만약 네 애틋한 만류에 철퍼덕 주저앉아 버리고 함께 눈물 지어 운다면, 그것만큼 우스꽝스러운 것이 없고, 스스로 부끄러운 것이 없을 터이다. 네가 하는 행태를 낮추어보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나에게는 일신의 안위보다 더 시급한 진실이 있다는 것이요, 그 진실 없이는 이때까지 나는 한 걸음도 떼어오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끝내 나를 잃지 않은 내가 자랑스럽다. 마지막까지 흥분을 느끼고 보따리를 싸고 길을 떠나며 길의 풍광을 샅샅이 눈과 귀와 코와, 마른 입과 비틀거리는 팔다리로 끌어안으려 하는 것이다. 이런 나의 작태를 자랑스러워하는 것이다.

 

이제 나를 놓는구나, 아이야, 너는 참말로 영리한 아이다. 한 개인이다. 한 세상이다. 너는  이 작은 집에 갇혀 있는 무력한 아이가 아니라 이 세상이 너를 품고 네가 이 세상을 품은 찬란한 생명이다. 너를 만난 것을 나는 기뻐한다. 저 백설의 분분한 유영 속에서, 세상의 희디흰 요철 속에서 진실의 그림자를 느끼듯, 너의 영롱하고 또렷한 음색과 따뜻한 눈물 속에서 다시 다가올 봄을, 언제까지나 되돌아올 봄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니 아이야, 이제 너에게 인사를 할 때로구나. 내가 이제 떠난다면 시간은 가고 자취는 사라져 너를 다시 만날 일 없겠지만 너는 기억할 것이다.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길 가는 걸 끝내 마다하지 않은 한 사람이 있어, 눈으로 뒤덮인 혼돈 속에서도 풍경이 살아 움직이고, 멀고 가까운 것을, 이곳과 저곳을 분간할 수 있게 됨을. 지금은 이곳에 너와 내가 있지만 이제 곧 나는 저곳에 있을 것이다. 그럴 수 있다는 것이, 내가 너의 소실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이 아니 기쁜 일이냐.

 

부디 눈보라 속에 쓰러질까 저어되는 환영의 껍질에 굴하지 말고, 하늘에서 땅으로 흘러내리고 넘치는 그 모든 틈바구니에서, 용감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발자국을 기억해다오. 발자국을 내리누르는 휘어진 사람의 몸뚱이를 기억해다오. 보이지 않는다 해서, 세상에 사라지는 발자국이 어디 있겠느냐. 그것이 어찌 나의 길이라고만 하겠느냐. 그것을 어찌 하나의 풍경으로 고정할 것이냐. 그리고 그것을 어찌 너의 길이라고 하겠느냐.

 

아아 사랑하는 소녀들아

나를 보아

정성으로 몸을 바쳐다오

맑은 암흑 횡행할지나

다른 날, 폭풍우 뒤에

사람은 너와 나* (나혜석의 시 <인형의 가(家)> 마지막 부분 인용*) ▣ 안미선

 

※ 함께 읽는 책: <인간으로 살고 싶다>(이상경 지음. 한길사. 2000), <경희(외)>(나혜석 편. 범우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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