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신사임당 동상 앞에서
<모퉁이에서 책읽기> 이이효재 “조선조 사회와 가족” 

 

※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읽고 쓰는 사람, <여성, 목소리들>의 저자 안미선의 연재 칼럼입니다. –편집자 주

 

 

오랜만에 고등학교에 찾아가 할 말을 잃었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이십 년이 지난 세월이 무색하게 더욱 싱싱하고 원기 왕성했다. 건물에도 ‘싱싱하다’는 표현을 쓸 수 있다면, 하늘 아래 우뚝 선 그 위용은 기억보다 더 거칠 것 없었다. 이건 되레 당황스러울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쇠락하는 몸처럼 건물도 그렇다고 여겨 적당히 빛바랜 호젓함을 상상했는지 몰랐다. 그러나 학교는 수많은 졸업생을 배출하고도 붉은 벽돌에 이끼 하나 끼지 않았으며 양 옆에 신축 건물까지 거느리고 있었다. 그 아래에 서 있는 나는 작게 느껴졌다. 검은 재킷에 회색치마를 입은 여학생이 지나간다. 교복도 그대로다. 시간이 멈춘 것 같다.

 

신사임당 동상이 학교 앞 계단참에 버티고 있다. 치마폭을 펼치고 앉아서 두루마리 책을 펴 들고 있는 모양새다. 전부터 있었는데 깜박 잊고 있었다. 설마 아직도 그게 있을라구, 하는 허튼 짐작 탓이었을 게다.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들을 보니 오싹하기조차 하다. 동상 또한 생각보다 거대하게 보인다.

 

그러고 보니 한술 더 떠, 새로 생긴 건물의 이름도 ‘충효관’이니 하는 것들이다. 이 지역은 ‘선비의 고장’으로 홍보를 하는 곳이니 이상할 것도 없다. 학교 옆에는 전통 향교가 남아 있다. 우리가 수업을 받을 때, 옆에서 유생들이 제례를 올릴 때도 있었다. 지역 경제가 어려워진 건, ‘향교 자리에 여학교가 들어섰기 때문’이라는 험담을 주민에게서 들은 적도 있었다.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취업했다는 기사가 미담으로 신문에 실렸다.

 

‘Just a girl, 너희는 여자일 뿐이야’

 

“여자는 결혼해서 애 낳으면 똑같아.” 선생님이 한 소리였다. 뭐 더 지독한 소리도 들었지만. 교실 창밖으로는 언제나 신사임당의 뒤태가 보였다. 우리가 갈 길은 신사임당? (이를테면 현모양처로, 배워도 배운 티 안 내고 애 잘 키우고 남편 잘 섬기는.)

 

‘여자애들 배워봤자’와 ‘배워야 산다’가 함께 여학교 안에 뒤죽박죽되어 있었다. ‘경쟁에서 이긴 한두 놈은 서울에 가서 출세하겠지’(어떤 출세인지 딱히 모르지만), ‘나머지는 여자 팔자 거기서 거기까지니 집에서 애나 키우겠지’, 이런 냉소가 스며있었다. 그땐 억울해도 뭐라고 할지 몰랐지만 지금은 모두 우둔한 소리라는 걸 안다.

 

지금 신사임당 동상도 역시 우둔해 보인다. 뚫어지게 쳐다보고 입을 헤 벌리고 있지만 어딘가 자신감을 잃고 맹해 보인다. 동상이 말하는 바는 그녀의 실제 삶과 무관하다. 1960년대 박정희 정부가 산업화를 추진하면서 정책적으로 우리나라 여성을 ‘전업주부’로 자리매김했고, 그 이상형으로 ‘신사임당’을 내세웠다. 군사주의 문화 속에서 바람직한 현모양처로 추켜세워진 신사임당. 살뜰하게 이용당하고도 아직 떨떠름한 웃음을 짓고 있다.

 

그에 비하면, 남자와의 잠자리에서 신사임당 꿈을 꾸었다는 친구의 말은 더 솔직한 것이었다. 신사임당이 입에 칼을 물고 피를 흘리고 나왔다고. 유관순도 피를 흘리며 거울에 나타난다 했으니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하필 왜 신사임당이냐? 신사임당이라면 혼전 섹스는 안 했을 거고, 아버지가 싫어할 짓은 안 했을 거고, ‘처녀’로 고이고이 현모양처가 되었을 거라는 신화가 그런 꿈을 만들어낸 게 아닐까? 의식은 앞서도 뒤처지는 무의식이 애를 써 농간을 부려본다고 한 것이 그런 꿈인 게다. 하지만 그 꿈을 꾼 당사자는 상당히 무섭고 두려웠을 것이다.

 

가부장제의 신화는 우리 마음에 오래 남아 있다. 외양이 전부가 아니어서, 우리는 태연히 살아도 속으로는 태연히 살지 못했고, 과거가 지나가도 과거에 붙들려 있을 때가 많았다. 잘못된 교육의 해악은 오래오래 무의식에 남았다. 자책감은 또 스스로 더 아프게 했다. 그 통에 왜곡되어 나온 또 다른 욕망들.

 

고등학생 때 어떤 친구는 “아이에게 젖을 빨리면 어떤 기분일까?” 하고 내게 물었는데, 도전하는 듯한 그 질문 속에서 난 그 애가 ‘남자와 자면 어떤 기분일까’를 바꿔 말한 거라고 점쳤다. 억압이 강하니 욕망은 용인되는 말로만 표현되었다. 한편으론 로맨스 소설을 읽고, 신사임당처럼 현모양처가 되는 게 꿈이라 했다가, 교복 속에 꼭꼭 감춘 젖을 쪽쪽 빠는 아기 얘기를 하기도 하고, 남녀의 성기가 결합되는 모양만 과장한 음담패설을 키득대며 우리는 학교 안에 있었다.

 

뒷산에 바바리맨이 종종 나타나 성기를 꺼내 흔들어댔고, 강가에서 여자 시체가 발견됐는데 사체가 훼손되었다는 소문도 흉흉했다. 옆집 여자가 강간당했는데 그 이웃집 남자가 그랬다더라, 그래서 여자가 복수로 그 남자 아들을 납치했단다, 봉고차에 잡혀 인신매매단에게 팔려가면 영영 못 돌아온다, 진위를 가릴 수 없었던 그 무성한 소문들. 어쩌면 한 가지였던 소문들. ‘Just a girl’, 너희는 여자일 뿐이야, 영화에도 종종 나오는 문구.

 

가부장제의 신화, 근대화의 우상, 거.짓.말.

 

동상 앞에서 우리는 신발을 벗고 슬리퍼로 갈아 신고 학교로 들어갔다. 한밤중에 동상 앞에서 신발을 갈아 신고 집까지 타박대며 걸어갔다. 아침 일곱 시에 집을 나서서 밤 열한시에 집에 돌아왔다. 왜 공부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이곳에 왜 갇혀 있는지 모르겠지만, 무성한 소문과 농담으로 겨우 키득거리며, 앞날이 좀 더 좋아지겠지 꿈을 꾸면서. 한 가지 꿈은 한 가지 길을 내준다는 교과서의 가르침을 생각하며.

 

학교와 운동장이 전부여도 산 너머 세상을 동경할 줄 알았다. 저녁노을이 아름답다고 창가에 다닥다닥 붙어 있을 줄 알았다. 동성의 친구에게 가슴 두근거릴 줄 알았다. 교문 앞 나무가 베어진다고 끌어안고 울 줄 알았다. 자판기 커피 한 잔 들고 어설프게 읽은 시를 이야기할 줄 알았다. 떨어진 꽃을 주워 목걸이를 만들어 친구 목에 걸어주고 좋아할 줄 알았다.

 

결혼을 하고 매를 맞고 가정폭력으로 남편을 신고하고 겨우 이혼한 친구가 그런다. “학교 선생님이 되는 게 꿈이었는데, 거의 다 된 것 같았는데 왜 이렇게 되었지?”

 

유복한 결혼 생활을 한다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친구는 일상의 모멸감을 참지 못해 이렇게 말한다. “난 내가 정말 바보 같아서 이렇게 사는지, 능력이 있는데 그걸 몰라서 뛰쳐나가지 못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

 

한 친구는 혼자 아이를 데리고 외국으로 훌쩍 떠날 때, 지친 눈동자를 하고 말했다. “열심히 산다고 했는데, 세상에 정답은 없나봐.”

 

세상에는 정답이 없는데, 이 오래된 고등학교는 아직 정답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군다. 여전히 자리 잡고 있는 동상과 구호들, ‘하면 된다’는 다그침들. 생생한 우상 앞에, 상처받고 살아 있는 우리가 되레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삶이 없기에 유지될 수 있는 무책임한 것들, 삶을 외면하고 무지하기에 유지되는 체제들. 세뇌 당할수록 더 어둔 곳으로 숨을 사람들의 악몽들.

 

신사임당은 세월을 타지 않아 우리보다 젊다. ‘살아보니 그렇지 않던데요, 거짓말쟁이.’ 대꾸해도 웃고 있고, ‘믿은 만큼 골병들더군요. 왜 아직도 거기 있어요?’ 항의해도 웃고 있는, 박제화된 우리 근대화의 우상. 믿는 이 없어도 여태 당당한 거짓말.

 

가족 문화를 개혁해야만 사회를 바꿀 수 있다

 

▲ 이이효재 <조선조 사회와 가족>(한울아카데미, 2004) 
 

우리의 삶과 가족을 직조하고 세상을 움직이는 동력은 조선 후기의 양상과 겹치는 것이 많다. 한국의 근대화는 전통적인 가부장제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왔다. 그래서 조선의 가부장제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유지된 것인지 제대로 아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 주요한 지식이 된다.

 

종족 중심의 성(性)불변의 법은 조선조 가부장제에 기인한 것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신분 차별의 사회경제적 기반이었다. 조선조 가부장제는 인간을 서열화하고 학벌을 신분 상승의 수단으로 삼았다.

 

조선 전기에 시행되어 중기에 확립된 신분제와 여성 차별의 질서는 조선 후기에 국가 혼란과 서민층의 경제생활 성장에도 불구하고 변화되지 않았다. 서민층은 성차별과 신분 차별의 질서를 바꾸기보다는 호적을 위조하거나 금력 등 여러 방법을 통해 신분 상승을 도모했다. 그래서 지배층만 누렸던 가부장제 문화가 전 계층으로 퍼져갔다.

 

조선 이전 시대에는 조상 제사에 모족, 처족이 참여했고 재산 균등 분할과 처가살이 등의 풍습이 일반적이었지만, 조선 시대는 부계 시조와 혈통을 숭상하는 조상 숭배 사상을 강하게 확립했다.

 

가족 문화와 제도가 계층과 성을 차별하고 있으므로, 이를 개혁해야만 사회를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조선조 사회와 가족>(한울아카데미, 2004)의 저자 이이효재는 그러한 바람을 품고, 조선 시대의 사회와 가족을 분석했다. 계층과 지역과 성에 따른 가부장제의 양상과 그 차이를 면밀히 구분해, 전통 사회로 일컬어지는 것의 실상을 드러냈으며, 그 긴장과 역동성을 분석했다.

 

또한 이러한 체제를 뒷받침한 사회경제적 기반을 파헤치고, 문화사적인 이해를 통해 가부장제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지고 균열되며 유지된 체제임을 밝혔다. 남한 사회는 전근대적인 부계 친족 제도를 개혁하지 않고 분단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가부장제 가족을 ‘전통적 미풍양속’이라는 명분으로 삼아 정책적으로 유지해왔다.

 

부족한 사료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심혈을 기울여 이 책을 쓴 이유는, 가부장제에 대한 신화와 통념에서 벗어나 민주적이고 열려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간절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전통의 이름으로 남아 있는 우리 곁의 우상이 그처럼 기세등등하기 때문일 것이다.  안미선

 

여성주의 저널 일다      |     영문 사이트        |           일다 트위터     |           일다 페이스북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   2024/03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