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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이주민의 땅, 브르타뉴
<브르타뉴에서 보낸 편지> 칼럼을 마무리하며 

 

[‘교육일기’와 ‘하늘을 나는 교실’의 필자 정인진 님이 프랑스의 서북부 브르타뉴 지방에서 머물면서 보고 느낀 것들을 기록한 ‘브르타뉴에서 보낸 편지’ 연재를 마무리합니다. -편집자 주]

 

 

이주해온 브르통들과 흑인 노예의 역사

 

브르타뉴라는 지역이 오랜 세월을 거쳐 이주민들에 의해 형성된 곳이라는 사실은 처음 칼럼을 시작하면서 밝힌 바 있다. 초창기에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1~4세기 사이에는 로마에서, 이후에는 영국으로부터 이주한 사람들이 섞여서 만들어낸 문화가 현재 브르타뉴를 형성했다.

 

          ▲ 브르타뉴 지역은 이주민들에 의해 형성된 곳이다. 렌의 ‘여름 축제’ 주민들 모습.   © 정인진 

 

특히 6~7세기, 영국에서 앵글로 색슨족에 의해 쫓겨난 브르통(Breton)들이 대서양과 도버해협을 건너 현재 브르타뉴 지역으로 이주해왔는데, 그들에 의해 형성된 켈트문화는 현재 브르타뉴를 대표하는 문화가 되었다. 프랑스에서 영국을 “큰 브르타뉴”(Grande Bretagne)라고 부르고, 영국에서 이주해온 브르통들이 정착한 프랑스의 땅을 “브르타뉴”(Brentabne)라고 부르는 것은 브르통들의 이주에서 유래한 지역 명칭이다.

 

한편 17~18세기에는 브르타뉴 항구들이 흑인 노예 무역을 담당하게 되면서 흑인들이 브르타뉴에 유입되는 계기가 된다. 노예 무역은 17세기에 매우 번성하며 다음 세기까지 확장되었다가 1815년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몇몇 흑인들은 브르타뉴의 도시들로 이동되었다. 이들은 각 가정에서 하인으로 일했다. 그들의 주인만이 유언을 통해 노예 신분에서 해방시킬 수 있었다. 프랑스에서 노예 제도가 폐지된 것은 1848년의 일이다.

 

이런 식으로 브르타뉴는 다양한 상황과 목적에 따라 이주한 사람들에 의해 형성된 고장이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 브르타뉴의 이주는 다른 양상을 보이게 된다.

 

일자리를 찾아 외국으로, 파리로 떠난 사람들

 

19세기에 들어, 거대한 규모의 부르타뉴 사람들이 자기 고장을 떠날 수밖에 없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1831년에서 1968년 사이에 백만 명이 넘는 브르타뉴의 주민들이 사라졌다.

 

브르타뉴의 많은 도시들은 섬유 산업으로 번영을 이루었다. 섬유 산업은 수공업으로 진행되었는데, 영국의 산업혁명과 함께 모두 몰락하게 된 것이다. 섬유 수공업자들은 살아갈 길이 막막해졌다.

 

브르타뉴 사람들의 이주는 어떤 면에서는 강요된 것이었다. 농사를 지을 땅도, 일자리도 충분하지 않았다. 이들은 가난과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브르타뉴를 떠났다. 가장 먼저 이주가 시작된 곳은 브르타뉴 북부 해안 지역인 꼬트 다르모르(Cotes d’Armor) 주민들이었다.

 

▲  브레스트의 전차 안. 브르타뉴에서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을 만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 정인진 
 

섬유업에 종사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광부, 제련공, 채석공들이 외국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났다. 1870년~1880년 사이에는 수공업과 벌목을 위해 캐나다로 이주했다. 19세기에 미국으로 농업 분야에서 일을 찾아 이주해갔지만, 뒤이어 공장과 철길, 각종 건설 현장에서 일하기 위해 미국으로 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국보다는 프랑스의 다른 도시로 이주한 사람들이 더 많다. 브르타뉴 사람들은 프랑스 남부 ‘보스’(Beauce)에서 계절 노동자로, 노르망디 지방의 ‘르 아브르’(Le Havre)에서는 일용직 노동자로 일했다. 그들은 다른 도시에서 농부로, 노동자로, 혹은 부르주아 가정의 일꾼으로 일했다.

 

여기에는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브르타뉴의 많은 여성들이 일자리를 찾아 파리로 떠났다. 브르타뉴 여성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파리의 부르주아 가정에서 가정부나 유모로 일했다.

 

프랑스의 유명한 만화책 <베카씬>은 브르타뉴 출신 여성인 ‘베카씬’(Becassine)이 파리의 가정에서 아이들을 돌보면서 벌어지는 좌충우돌을 그린 이야기인데, 브르타뉴 여성들의 파리 생활을 보여주는 예다. 이들 중엔 성매매 산업으로 유입된 경우도 있다는 사실은 안타까운 일이다. 파리로 일자리를 찾아 떠난 브르타뉴 여성들은 수천 명에 이르며, 이들의 이주는 1,2차 세계대전 사이까지 이어졌다.

 

브르타뉴 사람들은 세계 각지로 널리 퍼졌다. 그들은 학위에 맞는 일자리를 찾아 떠난 것도 아니고, 직업적인 경험을 확장시키기 위해 떠난 것도 아니었다.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기 위해 떠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당시 이주의 근본적인 이유는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세계 각지에 브르타뉴인이 없는 곳은 없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향을 등지고 브르타뉴를 떠난 사람들의 자리를 다시 외국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채웠다. 포르투칼, 모로코, 알제리, 터키 등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전쟁이나 독재 정권, 천재지변 등을 피해 브르타뉴로 왔다.

 

프랑스에서 브르타뉴 지역은 이민자들에게 그다지 인기 있는 지역은 아니다. 한 예로 1926년에는 7천2백 명의 외국인이 브르타뉴에 살았다고 집계되었는데, 당시 브르타뉴 주민의 0.1%에 불과한 수다. 그러나 1975년부터 2009년 사이, 국가적인 이민자 증가 추세에 발맞춰 많은 수의 외국인들이 브르타뉴로 이주해왔다. 현재는 외국인이 주민의 약 10%를 차지한다.
 

▲  로리앙 켈트 문화축제. 어울려 춤추고 있는 브르타뉴 사람들. © 정인진 
 

한편 20-21세기에 브르타뉴를 떠난 사람들은 더 이상 가진 것 없는 노동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학업을 위해, 직업적인 성취를 위해 더 큰 도시나 외국으로 떠나고 있다. 또 2000년대 내내 다양한 국가에서 다양한 프로필을 가진 사람들이 이주해왔다. 몽고, 체첸, 터키, 영국, 모로코 등지에서 일자리를 찾아서 오기도 하지만, 전쟁을 피해서, 학업을 위해서 또는 노후를 보낼 목적으로 브르타뉴에 온다.

 

브르타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주해 온 외국인들과 친구로, 사랑하는 관계로, 또는 부모로 서로 만나고 결합되어 간다. 그리고 외국으로 떠난 사람들도 그곳의 문화와 결합해 새로운 브르타뉴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5월 중순에 4일간 열리는 ‘브르타뉴 축제’는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같은 날 도쿄, 뉴욕, 베이징, 부에노스아이레스 등 세계 각지에서 브르타뉴인들이 축제를 벌이는 것이 특징이다. 세계 각지에 브르타뉴인이 없는 곳은 없다고 할 정도다.

 

그러고 보면 ‘브르타뉴적’이라고 하는 것은 고정된 무엇이 결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주민들에 의해 그 문화가 형성되어 왔듯이, 앞으로도 브르타뉴 이민의 역사와 문화에 이주민들의 존재가 더해져 가면서, 브르타뉴는 더 다양한 문화를 끌어안은 지역으로 발전해 갈 것이다. 또 외국으로 떠나 새로운 문화에 뿌리를 내린 브르타뉴인들은 그곳에서 새로운 브르타뉴의 역사를 쓰리라.

 

이방인에게 관대한 브르타뉴 사람들

 

브르타뉴에 머물 당시, 알제리에서 이주해 브르타뉴 지역의 건설 현장 노동자로 오랫동안 일한 사람들의 생활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을 ‘브르타뉴인’으로 내면화하고 있었다. 처음엔 외국 국적의 그들이 스스로 브르타뉴 사람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신기하고 놀라웠다.

 

그러나 브르타뉴에 머물면서 나도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브르타뉴 사람들은 이방인에게 관대한 태도를 지니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물론 내가 관광객의 신분이었던 것도 이유일 수 있겠지만, 살아봤던 프랑스의 몇몇 다른 고장들에 비해 심리적으로 더 편안함을 주는 지역이었다. 그래서 금방 그들에게 친근감을 느끼게 되었고, 그들의 문화와 역사에 관심이 갔고, 급기야 그들의 이야기에 이렇게 긴 시간 매달려 있게 된 것이다.
 

▲ 현장학습 나온 렌의 초등학생들. 브르타뉴의 학급 학생들은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이 브르타뉴의 역사를 계속 써나갈 것이다.  © 정인진  

 

브르타뉴에서 보낸 얼마 안 되는 기간 동안 이방인으로서 엿본 그들의 역사와 삶은 내게 많은 교훈과 깨달음, 그리고 재미를 주었다. 익숙한 곳을 떠난 후에야 비로소 나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더 잘 보인다는 생각을, 그들 속에서 했다.

 

이제 긴 여행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1년 반이 넘는 시간 함께 여행에 동반해 준 <일다> 독자들에게 감사한다. 내가 경험하고 느낀 것들이 전달되고 조금이라도 공감하는 부분이 있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글을 연재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마감이 늦어져도 인내심 있게 기다려준 <일다> 측에도 감사한다. ▣ 정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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