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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에서 월세 하나가 사라졌을 뿐인데…
<20대 여성 ‘일’을 논하다> 협동조합 모델의 잡지 편집자 
 

※ 2014년 <일다>는 20대 여성들이 직접 쓰는 노동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의 지원을 받습니다. [편집자 주]

 

 

고맙고 한편으로 안쓰러운, 3년 9개월 전 ‘나’

 

“야, 좋아하는 일 하면서 월급도 받고 진짜 잘됐다.”
  

취업했다는 나의 말에 친구가 이렇게 축하를 해준 지 어느새 3년 9개월이 지났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은 교육 잡지 편집자. 내가 다니는 직장은 협동조합을 모델로 운영되는 출판사이면서 교육운동단체의 성격도 지닌 곳이다. 

 

▲  격월간 잡지라 두 달에 한 번 꼴로 마감 기간이 있다.  교정지만 보면 잠이 솔솔 온다.  © 은정 

대학에 다니는 내내 마음 맞는 친구들과 교육 잡지를 만들면서 이 일이라면 내가 즐겁게, 오래오래 할 수 있겠다 싶었던 터라 ‘이곳에서 같이 일해 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들었을 때 큰 망설임 없이 하겠다고 답했다.

 

월급이 내가 당시 하고 있던 사무 보조 알바와 얼마 차이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잠시 내 발목을 잡았지만, 고향에 있는 지지리 가난한 우리 엄마 얼굴도 잠깐 떠올랐지만, 지금껏 가난하게 살았는데 앞으로도 가난하게 못 살겠냐는 이상한 용기가 솟구쳤다. ‘아무렴, 돈보단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겠어?’ 하고 스스로를 설득하기도 하면서. 이랬던 게 2011년 3월이다.

 

그리고 2014년 12월,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그때의 내가 한편으론 고맙고 한편으론 안쓰럽다.

 

고마운 건, 너무 많은 일을 겪어 버린 지금의 나는 그때와 같은 결정을 쉽게 못 내릴 것 같아서다. 그랬다면 이곳에서 지금까지 내가 보낸 4년여의 시간이, 이곳에서 만나게 된 사람들이 내 삶에 없었을 테다. 그런 점에서 무식하게 용기만 넘쳤던 그때의 나에게 경의와 감사를 표한다.

 

안쓰러운 건, 그때의 내가 앞으로 이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 현실의 어떤 구질구질함과 지리멸렬함을 견뎌내야 하는지, 무엇과 싸워야 하는지 전혀 예상하고 있지 못해서다. 그때의 나는 그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면 다 잘될 거라고 순진하게 안심했다.

 

생활의 비루함 앞에 자주 미끄러지며

 

협동조합은 기본적으로 경제 조직이지만, 일반적인 회사와는 달랐다. (참고로 나의 직장은 협동조합을 모델로 하지만 협동조합으로 등록하진 않았다.) 우선 ‘사장’을 비롯해 위계적인 직급이 없었다. 사무국장이 있긴 하지만, 누군가 한 사람을 조직의 대표로 놓고 그에게 권한과 책임을 몰아주는 구조를 경계하는 곳이라, 사무국장이 크게 권력을 쥐고 있지도 않았다.

 

무언가를 할 때 누군가의 ‘허락’을 구하는 게 아니라 동료들의 ‘동의’를 구하는 분위기였고, 사장이 없기에 우리가 일할 환경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 갈 가능성이 열려 있었다.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독립해 우리 교육 현실에 필요한 것들을 우리 힘으로 만들고 함께 나누겠다는 목적을 갖고 여러 사람의 십시일반으로 만들어진 공간인 만큼, 이곳은 주인이 없는 곳이자 모두가 주인인 곳이었다.

 

그러나 사장이 없다는 건, 우리가 일할 환경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 갈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건, 역으로 말해 내 삶에 필요한 현실적 조건들을 모두 내가/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임을 나는 뒤늦게 알았다.

 

아직 자리를 잡아 가는 중인 조직에서 줄 수 있는 임금에는 한계가 있었다. 임금을 올리려면 조합원을 늘리든, 책을 더 많이 만들어서 팔든 나와 동료들이 더 부지런히 일해야 했다. 그런 딜레마 속에서 임금이 느릿느릿 올라가는 동안, 없이 사는 건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도 나는 자주 쉽게 휘청거렸다.

 

기숙사라는 싸고 안전한 보금자리에서 나오고 나니 내가 가진 돈과 월급으로 살 만한 곳은 반지하였고, 월세와 각종 세금과 기본적인 생활비를 빼고 나면 통장 잔고가 바닥을 보였다. 같이 일하는 동료와는 매달 “이번 달도 월급이 통장을 스쳐 지나갔어. 사이버 머니야” 같은 농담을 주고받곤 했다. 밥은 굶지 않는 시대라 배는 항상 부른데 왠지 마음이 고팠다.

 

가끔 고향에 내려가 엄마가 혼자 월세로 지내고 있는 낡은 집을 볼 때면, 나의 선택이 옳았던 걸까 계속해서 의심이 일었다. 기초생활수급자인 엄마는 내심 딸이 돈을 왕창 벌어 오진 않아도 취업을 하면 어느 정도 생활에 도움을 주리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생활비 한 푼 못 보태 주는 딸이 취직을 했단 까닭으로 수급자 지원금만 더 깎여 버렸다. 장녀를 향한 가족의 기대를 대부분 가볍게 배신하며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번만큼은 엄마에게 정말로 미안했다.

 

누나가 취직하면 우리 집이 좀 나아질 줄 알았다고 말하는 동생의 말에 내가 ATM기냐고 버럭 했지만, 가족의 필요를 외면할수록 마음에 부채감이 쌓여 갔다. 호기롭게 시작한 나의 첫 직장 생활은 생활의 비루함 앞에 자주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나는 괜찮지가 않다 

 

▲  ‘괜찮지 않다’고 인정하게 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린 것 같다. ©은정 
 

그러면서도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니까’란 말로 자신을 계속 달랬다. 이 말은 참 마법과도 같아서 눈앞에 닥친 고난과 어려움을 나의 인내와 성숙과 일을 향한 사랑으로 견뎌낼 수 있을 만한 문제로 모두 탈바꿈해 준다. 생활의 불안과 수시로 하게 되는 주말 근무나 야근, 소수의 인원이 많은 종류의 일을 처리해야 하면서 생기는 피로도 같은 것들을 말이다.

 

이걸 견디기 힘들다면, 그건 내가 일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해서인 것이다. 내게 열정이 모자라서인 것이다. 월급이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그건 내 욕망의 크기가, 씀씀이가 큰 것이다. 직장의 모든 조건은 변할 수 없는 상수로 두고 ‘나’에게서 계속 문제를 찾았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곳에서 지금도 일하고 있는 건 당연히 나를 버틸 만하게 해주는 것들이 있어서였다. 교육 잡지 만드는 일을 좋아해서 시작한 거였는데 점점 잡지 만드는 일보단 직장의 다른 부분들이 더 좋아졌다는 건 반전이었지만, 아무튼 그랬다. 개인의 부족함을 평가하고 질책하기보다 무엇을 도와줄지 묻는 분위기가 좋았다. 이곳은 거창한 대의로 개인의 헌신을 당연한 듯 요구하지 않고 일하는 사람들의 안녕을 계속해서 점검하고 살피고자 애썼다.

 

직장에서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라는 류의 이야기들을 종종 듣는데, 나는 한 사람의 대체 불가능함이란 그 사람의 능력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직장이 일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런 점에서 이곳은 나를 적어도 ‘너 아니어도 일할 사람 많다’는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내가 일하면서 겪는 어려움을 내가 퇴사해야 할 이유로 다루지 않고 함께 풀어갈 문제로 다루었다.

 

말하자면 나는 이곳에서 나를 ‘세일즈’하지 않고 살 수 있어서 좋았다. 내가 여기에 필요한 존재임을 끊임없이 증명하지 않아도, 내가 얼마나 능력 있는 사람인지 어필하려 애쓰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나는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실은 괜찮지 않았다. 항상 불안했고, 항상 쪼들렸고, 많이 피곤했다. 이렇게 ‘괜찮지 않다’고 인정하게 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린 것 같다. 괜찮지 않다고 말하면 나는 내가 이곳에 맞지 않는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 같았다. 김중배의 다이아몬드에 마음이 혹한 심순애가 된 것 같달까.

 

그렇게 괜찮지 않을수록 나는 일과 삶의 구분 없이 이곳을 온 에너지를 쏟아 가꾸는 선배들이나, 나보다 훨씬 적은 임금을 받지만 계속 건강한 태도로 일하는 활동가들의 모습을 보면서, 넌 왜 못 저러냐고 자신을 몰아붙이곤 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라?

 

많은 부분에서 나의 가치관과 충돌하지 않았던 직장도, 청년들의 생계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의 결들이 조금씩 달랐다. 기본적으로 먹고 사는 문제를 가벼이 다루지 않는다는 점은 공통됐지만, ‘적정한 임금이 얼마인가’ 하는 부분에서 저마다 기준이 달랐다. 서울에서 살아가는 데 얼마나 비용이 드는지도, 저마다 살아온 환경과 처한 조건이 다르다 보니 현실에 대한 인식에서 차이를 보였다.

 

임금 체계를 만드는 과정에서 최저임금 정도의 임금을 초임으로 잡자는 의견이 나와 잠시 논쟁이 오가기도 했다. 결국 그 안은 통과되지 못하였는데, 그때 흥분하면 곧잘 말문이 막히는 내가 버벅거리다 끝내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던 말은 이렇다. 사람이 살아갈 최소한의 기준을 우리는 좀 높게 잡았으면 좋겠다고, 그저 이번 달 먹고 살고 잘 곳만 해결되는 게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적인’ 삶이 아니라면 말이다.  

 

▲  올해 2월 조합원 총회 때 <2013년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주제로 그림 전시회를 했다.  나는 곰팡이와 습기를 견디지 못해 반지하를 떠난 일을 그렸다.   © 은정 

 

‘좋아하는 일’을 하면 만사 괜찮을 것처럼 이 사회는 떠들어 댔다. 그런데 나는 현실에서 끙끙대며 그 말이 참 게으르고 안일하다고 생각했다. 나름 진보적이라는 매체에 어떤 ‘어르신’이 외국에 나가니 청년들이 잘나가는 직장도 그만두고 자기 마음의 소리를 따라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던데, 한국 청년들은 왜 이렇게 다들 공무원을 하려고 드냐고 글을 써둔 걸 보면서 숨이 턱 막혀 왔다. 모두가 그렇게 좋아하는 일을 발견하는 것도 아닐뿐더러, 생계를 포기하는 것을 그렇게 쉽게 말하는 태도가 영 못마땅했다.

 

모두가 획일화된 진로를 강요 받는 시대에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진로관은 분명 유효한 점이 있다. 그러나 청년들이 먹고 살 수 있는 물질적 기반을 제공하는 일에 대한 치열한 고민 없이, 그것을 개인이 감내할 문제로만 오롯이 남겨 두고 공동의 해결책을 모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문제이다. 그런 말은 ‘열정노동’의 문제들에서 드러났듯, 좋아서 하는 일이니 이 모든 걸 감수하라며 오히려 청년들이 자신도, 남도 착취하는 논리가 되어 버릴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예전에 한 칼럼니스트가 청년들을 향해 ‘반지하에 살아도, 옥탑방에 살아도 죽지 않는다’며 너무 쫄지 말라고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청년들에게 그런 깡다구를 가져야 한다고 말할 게 아니라 모두가 더 안전하고 쾌적한 주거 공간에서 살 수 있는 방안을 함께 만들어 가야 하지 않을까? 왜 다들 공무원을 하려 드냐고 혀를 찰 게 아니라, 공무원을 꿈꾸는 그 마음의 기저에 있는 삶의 안정에 대한 욕구, 미래를 향한 불안을 읽고 그것을 해소할 수 있는 다양한 길들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좋아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

 

일을 시작한 지 4년이 거의 다 되어 가는 지금, 사실 나의 형편은 아주 많이 좋아졌다. ‘재정 상황이 열악하니 임금을 그대로 두자’가 아니라, 임금을 올리고 그걸 감당할 수 있는 재정 구조를 적극적으로 만들어 가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올해 초 임금 체계도 만들어졌고 그에 따라 월급도 올라갔다. 그래도 출판이라는 수익 구조가 존재하는 조직이기에 가능했던 부분이었을 테다.

 

임대 아파트에 당첨되어서 지난 9월부터 임금의 상당량을 차지하던 월세 부담도 사라졌다. 먼저 임대 아파트에 당첨된 동료가 새로 공고가 뜬 걸 보고 신청할 것을 적극적으로 권한 덕분이었다. 둘이서 공고문을 붙잡고 앉아 내가 보유한 가산점과 지난해 경쟁률, 모집 인원, 평수, 위치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어느 지역 임대 아파트를 신청할지 작전을 짰고, 운 좋게 붙었다.

 

동료가 나의 주거 문제 해결을 위해 그렇게 애써 준 건 그녀 역시 잘 알고 있어서였다. 주거비로 매달 40만 원이 나간다는 게 어떤 불안과 고달픔을 동반하는지.

 

나의 삶에서 월세 하나가 사라졌을 뿐인데 생각보다 많은 것이 변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 것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나는 직장을 그만둬도, 취업에 실패해도 집과 밥이 보장된다는 이유로 서울에서 부모님과 함께 사는 친구들을 부러워하곤 했다. 그런데 이제 나도 어쩌면 (지금은 생각이 없지만) 자발적 백수를 해볼 수도 있겠단 아기 주먹(!)만 한 자신감이 생겼다. 현재의 삶을 지속하기 위해 필요한 비용이 줄어드니, 줄어든 자리만큼 주체성과 자율성이 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가진 게 없어서 더 자유로울 수 있다는 말도 맞지만, 어떤 건 가지고 있어야 자유로울 수 있다는 말도 맞다는 것을. 언제든 엉덩이 붙이고 쉬어 갈 수 있는 곳이 있어야 여기저기 씩씩하게 싸돌아 다니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을. 그런데 지금 세상은 그런 부빌 언덕도 없는 사람들더러 자꾸 도전하라고, 한 곳에 머물지 말라고 부추긴다.

 

그리고 깨달은 것 또 하나. 내가 원한 건 단순히 월급이 오르는 게 아니었던 것 같다. 단지 더 많은 월급이 내가 바란 것이라면 그건 으레 그렇듯 개인이 더 많은 보험에 가입하고, 저축 양을 늘리며 돈을 통해 삶의 안전망을 스스로 만드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 돈을 번다는 건 대개 그만큼 늘어난 노동 시간과 실적의 압박을 수반한다.

 

게다가 시민단체 같은 경우 재정 자체가 한계가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꼭 월급을 인상하는 형태가 아니더라도, 각자의 생활이 좀더 덜 허덕이고 덜 불안할 수 있게끔 함께 적극적으로 안전망을 만들어 가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이곳에서 일하는 것을 더 ‘좋아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가면 어떨까? 돌이켜 보면 우리는 좋아하는 일을 하라고는 목소리 높여 왔지만 좋아할 수 있는 일터를 만드는 일에 대해선 소홀하게 다뤄 온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여전히 흔들리는 생활인

 

앞으로 내 삶이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 이래 놓고 대뜸 공무원 시험을 보겠다며 노량진으로 향할 수도 있다. 글에선 잠시 짐짓 씩씩한 척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현실의 나는 엄마 틀니 값을 걱정하다 통장 잔고를 걱정하다 ‘이 순간에 통장 잔고를 걱정하다니 나는 불효녀야!’ 하며 분열하는 넉넉지 않은 생활인이다.

 

‘내 월급이 300이라면?’, ‘로또 1등에 당첨된다면?’ 같은 허망한 시뮬레이션도 자주 한다. 미약하게나마 생겨난 아기 주먹만 한 용기도 실은 수시로 사라진다. 이번에 우리가 낸 책의 한 챕터 제목이 “횡설수설한 나날들”인데, 내가 딱 그렇다. 불안과 걱정을 어떻게 끌어안고 살아가야 할지 몰라 계속해서 허둥지둥이다.

 

여하튼 잘 모르겠는 것 투성이인 지금이지만 한 가지는 알겠다. 지금은 그냥 다만, 이런 ‘평범한’ 불안과 고민, 바람들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그렇게 나의 불안과 누군가의 불안이, 나의 고민과 누군가의 고민이, 나의 바람과 누군가의 바람이 만나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좀 덜 횡설수설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 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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