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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확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나의 ‘일’
<20대 여성 ‘일’을 논하다> 구립 청소년센터에서 일하며 

 

※ 2014년 <일다>는 20대 여성들이 직접 쓰는 노동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의 지원을 받습니다. [편집자 주]

 

 

우다다다다-

우렁찬 발소리가 귓가에 점점 가까워진다. 예상대로 곧 사무실 문이 열리고 여덟 살 아가씨들이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사무실 문 앞에서 소리친다.

“단단! 우리 놀아요!”

문서 작업에 한창 몰두하고 있던 오후, 초등 친구들의 등장으로 본격적인 나의 일이 시작된다.

“뭐 하고 놀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친구들에게로 간다.
 

         ▲  개관한 지 2년차인 나의 일터는 하루 130명의 청소년이 들락날락하는 구립 청소년센터다.   © 단단 

 

초등 친구들은 당장 시작할 수 있는 놀 거리 다섯 가지 정도를 10초안에 생각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 뭐하고 놀아야 재미있는지 궁리하는 것이 이 나이대의 친구들의 주된 고민이지만, 놀이 내용은 단순하다. 노래대회, 댄스대회, 공포연기대회, 그림 그리기, 선생님 놀이, 태권도장에서 배운 발차기 높게 차기 시합, 바닥에 뒹굴면서 몸으로 놀기. 이 중 단연 인기가 좋은 놀이는 넓은 강당에서 밑도 끝도 없이 뛰어다니며 몸으로 치고 받고 놀기이다.

 

쌍둥이 자매 나은과 나혜가 중심이 되어 친구들의 일정에 따라 함께 ‘놀러 오는’ 친구가 바뀐다. 신이에서 봄이로, 봄이에서 신이로, 신이에서 엘리로. 올 여름에는 이랑이와 사랑이 남매와도 제법 어울려 놀았다. 언젠가부터 나은, 나혜가 보습 학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발걸음이 뜸해졌지만, 센터를 찾는 어린이와 청소년의 방문에 언제든지 몸과 마음을 다해 ‘일’할 준비는 되어있는 나는 청소년활동가이다.

 

늦은 오후가 되면 수업을 마친 지역의 중고등 청소년들이 센터를 찾는다. 개관한 지 햇수로 2년차인 나의 일터는 하루 평균 130명의 청소년이 들락날락하는 구립 청소년센터다. 지역에서 15년간 마을공동체 활동을 해온 풀뿌리 비영리단체가 운영하고 있다. 센터에는 밴드나 댄스 연습을 하기 위해 오는 청소년도 적지 않지만, 대부분이 그냥 온다. 심심하고, 갈 곳이 마땅치 않고, 배고프고, 용돈도 넉넉하지 않은 친구들이 대부분이다.

 

내가 일하는 청소년센터에는 나를 포함한 여섯 명의 센터지기가 상주하며 청소년을 만나고, 고민을 나누고, 새로운 것들을 함께 궁리하고, 논다. 센터에는 청소년이 자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마을인문학도서관, 노래방부스, 보드게임, 만화책, 여행 자료 같은 놀 거리와 쉴 거리가 있다. 그 외에도 방을 빌려 회의, 공부, 연극 연습, 생일파티 등 자치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업무는 사업 계획에 따라 1년 단위로 진행하고 있다. 청소년 스스로 기획하고 진행하는 참여 활동, 청소년의 놀이와 문화를 함께 고민하고 지원하는 활동, 청소년이 마을 안에서 행복한 지역 사회를 만들기 위한 지역 네트워크 활동이 센터지기들의 주 업무이다.

 

나는 청소년 동아리를 지원하고 공간을 대관하는 업무, 그리고 센터 내 홍보 업무를 하고 있다. 지역의 열 개의 청소년동아리를 인터뷰를 통해 선발하고 1년간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지원한다. 작은 활동부터 지역 축제와 행사에 연계하여, 입시에서 벗어나 정말 하고 싶은 일에 대해 고민하고 폭넓은 경험을 함께 해나갈 수 있도록 돕고 있다.

 

학교 행정조교로 첫 사회 생활을 시작하다
 

▲  2년 전에는 이런 삶이 나에게 펼쳐질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 단단 
 

불과 2년 전에는 이런 삶이 나에게 펼쳐질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살아가는 곳에 대해 고민하게 되고, 등교를 잘 하지 않는 청소년과 친구가 될 줄은, 청소년 보컬 동아리와 함께 단독 공연을 준비하며 매일 가슴 설레는 아침을 맞이할 줄은 나도, 나의 가족도, 나의 친구 중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2년 전 나는 하루하루를 쳇바퀴 돌듯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는 20대 직장인이었기 때문이다. ‘일과 성취감은 양립할 수 있지만 일과 즐거움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뼈아프게 알아가던 시기에 청소년 활동가가 된 것은 인생의 새로운 변화였다.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했지만, 스튜디오나 잡지사 같은 곳은 학교에 다닐 때부터 흥미가 없었다. 정말 하고 싶던 사진 작업만 하며 살기에도 먹고 살 길이 막막하였기에, 전공 분야로 직장을 구하는 것은 보류했다. 졸업을 앞두고 모교 홍보팀 행정조교로 첫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조교는 모두가 생각하듯 책임자의 역할이 아닌 보조자의 위치이다. 단순 행정 업무와 홍보대사 관리, 행사 지원이 주 업무였다. 내 생각과 판단이 필요한 일이 아닌 만큼, 내게 주어진 일을 무난히 소화해내면 될 일들이었다. 기억나는 것은 큰 조직의 사람들은 어떻게 조직 내에서 움직이고 일하고 살아가는지 조직 문화에 대해 조금은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몸이 아파 권고 사직을 당한 비정규직 동료

 

현재 사회 생활 4년차인 지금, 가장 기억나는 일을 떠올려보면 사진교육원에서 일했던 뜨거웠던 여름날이 떠오른다. 차와 사람이 엉켜있는 어수선한 거리, 이글거리는 아스팔트 길 위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표정 없이 서있는 내 모습이 보인다. 가수 선우정아의 노래 “뱁새”가 그 당시 내 마음을 대변해준다.

 

새 옷을 차려 입고 거울 앞에 섰는데

어색하기가 짝이 없구나

그토록 탐을 냈던 값비싼 외투인데

이건 내게 어울리지 않아

-선우정아 <뱁새>

 

사진교육원은 정규직으로 입사한 첫 직장이자, 전공 분야와도 연결되어 있는 곳이라 기쁨이 더욱 컸다. 현대 사회에 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당당히 두 발로 섰다는 생각에 마음이 비장해졌다. 다수의 후보자 중 선발이 되어 확실한 역할을 부여 받고 조직 내 명확한 존재 이유를 갖게 된 것은, 취업을 목표 삼고 있던 나의 마음에 엄청난 힘이 되었다. 열정이 넘쳤고, 잘 해내고 싶은 욕구가 내 안에 가득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야근과 새벽 출근을 불사했다. 업무 내용과 방식이 나와 맞는지, 지금 하고 있는 업무의 방식이 가장 배움이 많이 남는 방식인지, 지금 하는 일이 내가 즐거워하는 일인지에 대해 고민 할 새도 없이, 시간은 잘도 흘러갔다. 그곳에서의 업무는 일주일 단위로 쉴 틈 없이 이어졌다. ‘프로는 변명과 실수를 하지 않는다’는 사장님의 이야기는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여서, 그에 부합하기 위해 나와 동료들은 부단히 애를 썼다. 조직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인정받기 위해, 언젠가부터 내 마음과는 다른 말과 행동을 하는 내가 되어갔다.

 

그러나 역시 마음을 돌보지 않으면 탈이 나기 마련. 선우정아의 노래 가사처럼 어쩐지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선택한 직장 생활이 되려 나의 자존감마저 잃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프로 정신을 가진 슈퍼우먼이 되려고 안간힘을 쓸수록,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듯 마음이 불편했다. 영혼이 빠져나가는 날이 늘어났고, 내가 없으면 누구도 내 업무를 대체하지 못하는 환경에 지쳐갔다.

 

그러던 어느 날, 각별했던 옆자리 동료가 앓던 병이 심해져 권고 사직으로 퇴사하게 되었다. 전문대 출신으로 비정규직이었던 동료는 가계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출퇴근 시간이 왕복 3시간이 되는 거리였지만 회사를 그만둘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내가 입사했을 당시에도 스트레스와 면역력 저하로 턱 부근이 부어있었는데, 갈수록 눈에 띄게 증상이 심해졌다. 비정규직이고 근무일수가 오래 되지 않았기에, 산재 적용도 되지 않았다. 시급으로 계산되던 월급은 병원비로 고스란히 지출되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나와 다른 동료들은 도울 방법을 몰라 안타까웠던 기억이 난다.

 

그가 권고 사직이 된 이유는 얼굴에 증상이 나타나서였는데, 얼굴이 부자연스러워 매주 이어지는 두세 번의 수업에서 만나는 고객들이 ‘보기에 불편하다’는 이유였다. 회사의 입장도 이해 가는 부분이 있었지만, 떠나던 날 괜찮다고 웃으며 오히려 다른 동료들을 위로하던 그를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 한구석이 무겁다.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삶이 조정되어 버리는 수많은 직장인에게, 준비 없이 이겨내야 할 힘겨운 상황들은 도처에 깔려있다. 하지만 그런 상황들에 대응하고 대처할 수 있는 힘은 미약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결과를 개인의 탓으로 돌리기에는, 우리 사회 또한 함께 이겨 낼 힘이 몹시 미약하다는 생각이 든다.

 

실패하더라도, 마음 가는 일을 해보자
 

▲  청소년 대상의 미술 전시회 도슨트와 체험 행사를 진행하는 일을 하게 되면서, 청소년들과 만나는 일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 단단 
 

한 달 뒤, 나 또한 이사 문제와 개인적인 일이 겹쳐 그곳에서 나오게 되었다. 그 뒤 나는 여유가 생기면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하나씩 시작했다. 그림도 그렸고, 언젠가 읽어야지 하며 쌓아두던 책도 읽었다. 고향에 내려가 한동안 잉여 생활을 하다가 여행도 가고 친구들도 만났다. 그렇게 몇 달의 시간이 지나 생활비가 소진되자, 나는 다시 구직자 모드로 자동 로그인 되었다.

 

생활은 점점 궁핍해졌지만, 고민은 계속되었다. 사회 생활이 원래 순탄치 않고 자비롭지 않다고 해도, 나에게 일을 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이 돈이 될 수는 없다는 생각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즐겁게 ‘일’을 하는 것이 가능할까? 내가 좋아하는 것은 뭐지? 좋아하는 것을 일로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까? 돈을 벌기 위한 일이 아닌, 나의 삶에도 의미 있는 일을 찾을 수 있을까?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릿속을 맴돌았다.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돌아오는 대답은 비슷했다. 결론은, 돈을 받고 하는 일에 즐거움이라는 공식은 성립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을수록 돈을 적게 벌더라도 목표 의식을 가지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꿈같은 생각만 더욱 커져만 갔다.

 

그 당시 나는 한창 취업이라는 옷을 입는 일에만 바빠 마음이 하는 소리에 귀를 막고 살았다. 그렇게 힘겨운 여름과 쓸쓸한 가을이 지나 겨울이 왔다. 나는 집안 한 구석에 앉아 이력서를 쓰고 또 썼다. 그러다 문득, 누굴 위해서 일을 하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넓은 지구상에서 고작 취업이라는 것이 내 인생의 가장 큰 고민이 되고, 내 존재가 나의 일로서 규정되는 세상에 산다는 것이 왠지 서글프게 느껴졌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마음이 가는 일이 생기면 그냥 해보기로, 실패하더라도 내 선택에 확신을 가져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나의 관심사를 떠올려보니 예술과 관련된 일들이 떠올랐다. 그 다음부터 용기 내어 예술 관련 일자리를 열심히 찾아보았다. 설치미술가를 도와 작품 제작을 돕는 일부터 연극 무대를 만드는 일까지, 내 마음을 자극하는 일들이 멀리 있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름 고심해서 이력서를 보내던 중, 청소년 대상의 미술 전시회 도슨트(docent: 안내인)와 체험 행사를 진행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우연히 시작한 아르바이트였는데, 놀랍게도 청소년과 함께 하는 일이 내 마음을 뛰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치 사랑에 빠진 것처럼, 나는 일하러 간다는 생각보다는 청소년을 만나러 간다는 생각에 한 겨울의 기나긴 출근길이 즐거웠다.

 

청소년이라는 대상에 매력을 느낀 이유는, 아마 그들이 가진 계산 없는 솔직함과 고착되지 않은 자유로운 생각과 감정이 나와 맞닿아 있어서였던 것 같다. 전시회장에 모인 청소년들에게 작품 설명을 하면서 청소년의 언어를 배웠다. 작품을 반복해서 보고 안내하면서 청소년의 마음도, 작가의 마음도 더욱 깊게 느낄 수 있었다.

 

체험장에서의 일도 흥미로움의 연속이었다. 다섯 살 된 아동부터 고3 청소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청소년과 소통하고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일에 푹 빠져, 보수가 있는 일은 즐거울 수 없다는 생각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것 같았다. 행사가 만료되면서 다시 백수가 되었지만, 나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다시 구직자 모드로 로그인 되었을 때, 청소년과 함께하는 일이라면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해볼 생각이었다.

 

청소년들과 만나며 ‘살아있음’을 느껴
 

▲  막내활동가로 1년 넘게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 단단 
 

그렇게 나에게 선물처럼 찾아온 기회가 바로 지금 일하고 있는 청소년센터다. 누군가가 나에게 일확천금과 청소년 활동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고민 없이 청소년 활동가를 선택할 것이다. 그 이유는, 내 삶의 가치는 내 마음이 행복한 일을 할 때 가장 살아있음을 느낀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라는 개인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비전공자가 청소년센터에서 일한다는 점에서, 전문성에 대한 의문을 가지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그런 이유로 나조차도 입사 후 1년 넘게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스스로 나의 자질을 끊임없이 의심하는 시간이었다. 마음만 가지고는 넘을 수 없는 높은 산들이 끝없이 펼쳐진 것 같았다. 내가 이곳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잘 적응하여 지낼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부터, 당장 내 앞에 놓인 업무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하기 전에도 고민하고 해놓고도 맞는지 고민하는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막내활동가로 일을 시작하면서 청소년에 대해서도 익숙하지 않았지만, 마을공동체와 지역 단체들과의 연계하는 일, 운영법인단체가 그 동안 해온 수많은 활동들도 정말 낯설었다. 하지만 내가 길을 잃은 것 같을 때 이야기를 들어주고, 길잡이가 되어주는 동료들 덕분에 나는 조금씩 그들과 함께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감사하게도 센터의 분위기는 굉장히 수평적이고 자유로운 편이어서 적응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별칭 문화가 있어서 센터장님, 부장님, 팀장님, 팀원 모두 서로 별칭을 부른다. 처음에는 적응이 안 되어서 별칭 뒤에 호칭을 부르곤 했는데, 조금씩 편해지면서 누구에게든 스스럼없이 별칭을 부르게 되었다.

 

센터에 오는 청소년들 중 누구도 센터지기의 이름을 부르는 친구는 없다. ‘단단’, ‘오매’, ‘애벌레’, ‘반디’, ‘굿데이’, ‘보거스’라는 재미있고 편한 별칭으로 서로를 부른다. 별칭 문화가 주는 장점은 어른의 얼굴을 하고 있는 센터지기를 청소년들이 좀더 편하게 생각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로 참 도움될 때가 많다.

 

일하다 보면 청소년에 대해 다양한 고민을 하게 된다. 청소년을 만나는 일부터, 어떤 어투를 사용 할지, 고민스러운 지점이 생기면 어떤 판단을 하고 대할지, 어떻게 그들의 힘든 일상을 토닥여 줄지…. 정말 많은 고민이 든다.

 

한 아이가 자라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한 아이는 이 사회에 소중한 존재이다. 이들이 자신의 건강한 주관을 가지고 행복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마을 사람들 모두가 힘을 모아 청소년의 성장을 고민하고 연대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한 역할을 하기 위해 센터의 불은 밤 늦도록 꺼질 줄 모른다.

 

                ▲  한 아이가 자라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   © 단단  

 

좋은 건 계속하면 된다

 

이곳에서 언제까지 일하게 될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사실 아직 미래의 일은 잘 모르겠다. 그냥 청소년이 좋고,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좋고, 내가 사는 이 마을이 좋다. 좋은 건 계속하면 된다. 엄마가 종종 하는 이야기 중 하나가, 나는 참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았다는 것이다. 정말 별 생각 없이 살았던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엄마 말이 맞는 것도 같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남들이 뭐라고 하든지 간에 해보는 것, 그리고 내가 무얼 좋아하는지 계속 떠올리고 그곳으로 향하는 것, 두려움을 버리고 경험해보는 것은, 20대 여성들이 살아가는데 많은 힘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아직 나도 미래가 보이지 않는 사회의 일꾼으로 하루하루 살고 있다. 그리고 지금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나와 내 친구를, 가족을, 어디선가 의미 있는 일을 위해 자신을 던지는 수많은 사람들을 기억한다면, 이 사회는 조금씩 온기를 찾지 않을까 생각한다. ▣ 단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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