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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인이 여자라고 말할 수 없어 답답하지만…
<20대 여성 ‘일’을 논하다> 영업 사원으로 버티기
※ 2014년 <일다>는 20대 여성들이 직접 쓰는 노동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의 지원을 받습니다. [편집자 주]
나는 스물여섯 살 평범하다고 자부하는 2년차 사회 초년생이다. 그리고 소수의 친한 친구들에게만 정체성을 오픈한 반(半) ‘벽장’(커밍아웃하지 않고 성 정체성을 숨기고 살아가는 것을 뜻함. 커밍아웃-Coming out 하는 것을 벽장 밖으로 나오는 것에 비유한 데서 유래함) 레즈비언이기도 하다. 수다쟁이라, 아직 서른 살도 채우지 못한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 누군가에게 이야기해보고 싶다.
레즈비언이란 이유로 왕따를 당했던 학창 시절
중학생 때 첫사랑이 생겼다. 선생님에게 혼나러 교무실을 들락거리는 아이였는데, 평범한 나와는 천지 차이였다. 그게 그녀만의 매력이었던 것 같다. 그땐 여자를 좋아하는 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남자랑 여자랑만 결혼해야 한다고도, 이성간에만 연애해야 한다고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짝사랑하는 여자에게 제대로 고백 한 번 못하는 소심한 여자였을 뿐이지, 내가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차일 거라고는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어설프게 고백을 했다. 그녀는 곧 나와 멀어져 버렸다. 돌아보면 내가 멍청했던 것인지, 사회적인 관습에 무심했던 것인지 잘 모르겠다.
운이 좋게 고등학생 때 첫 애인이 생겼다. 그러나 나는 ‘아웃팅’(Outing. 커밍아웃과 반대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성 정체성이 폭로되는 것을 뜻함)을 당했다. 바로 그 애인한테서 뒤통수를 맞았다. 남자와 사귀고 있으니 헤어져달라는 통보를 받은 직후였다.
학교에 내가 레즈비언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대놓고 나를 무시하거나 기피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친구들이 없어졌다. 수업 시간에 옥상으로 도망가 구석에 숨어있기도 했다. 그러다가 울적할 때면 뛰어내리고 싶었다. 자퇴를 시켜달라고 부모님께 울면서 애원했다. 거식증에 걸려 3주만에 8kg이 빠졌다. 배신감과 자괴감, 외로움으로 세상에서 버림받은 느낌이었다.
그러다 우연찮게 학교 선생님의 도움을 받으면서 안정을 찾았다. 자퇴는 부모님이 결사 반대하셔서 할 수 없었고, 혼자 놀러 다닐 수도 없는 상황에서 할 게 없으니 공부를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엄청 웃긴 해결책이었는데 잘 먹혔던 것 같다. 공부를 해서 이 지역을 벗어나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교실에서 누구랑 수다 떨 일이 없으니 문제를 풀었다. 문제를 풀다 보니 성적이 올랐다. 그리고 진짜 그 지역을 벗어나 서울로, 대학교에 갔다. 나는 내가 목표한 걸 이룬 사람이 되었다. 교내에서 부러움을 받으며 서울로 진학했다. 나를 아웃팅시켰던 전 여친의 ‘미안하다’는 쪽지는 부가적인 수익이었다.
고학력 인턴들이 일하는 업계에 무수한 이력서를 넣고
스무 살이 되고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가지면서, 내가 레즈비언이라는 사실과 일반적인 결혼에는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하지만 인생이 막막했다. 혼자 평생을 살아야 할까 봐 두려웠다. 반려자는커녕 애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막막했다. 머리 위에 레즈비언이라고 써놓은 것도 아닌데, 애인을 어떻게 찾을까! 여자는 취직을 해도 직장에서 오래 버티기 힘들다던데, 어떻게 먹고 살 지도 고민스러웠다.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다. 결혼은 (남자와) 안 한다. 스스로 자립하자. 살다가 좋은 여자를 만나게 되면 최소한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여행도 다녀오고, 하우스 메이트라는 이름으로라도 같이 살자.
제일 먼저 필요한 건,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빠른 결정을 내리는 일이었다. 자립하고 혹시 결혼식이라도 하려면(?) 돈을 쓰는 것 이상으로 벌어야 할 테니까. 학과와 관련된 자격증 공부를 하면 전문직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공부를 시작했다. 이 자격증만 따면 모든 게 해결되리라고 믿고 매달렸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공부는 어려웠다. 나보다 대단한 사람들이 셀 수도 없이 그 공부에 뛰어들어 있었다. 2년만에 자신감도, 학원비도 잃고 학교로 돌아왔다. 시험에 합격한다는 목표가 꿈이라고 생각했고, 붙기만 하면 다 끝날 줄 알았는데, 목표를 잃고 나니 앞이 깜깜해졌다.
아버지는 회사를 그만두실 연세가 되셨고, 동생은 이제 갓 대학을 들어갔고…. 집안의 버팀목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나는 성적도, 자격증도 변변찮은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꿈을 찾는 건 나중에 하자고 생각했다.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것에서 할 수 있는 일 중에 그나마 나은 대안을 찾는 것으로 목표가 바뀌었다. 어영부영 학점을 채우기 위해 공부했다.
대학원 진학은 돈이 드니 무리인 것 같고, 가진 지식은 학교에서 배운 게 전부였다. 인턴도, 알바도 해본 적이 없어서 거미줄처럼 전공 관련 업종을 찾다가 발견한 게 리서치 회사였다. 관련 자격증을 따고, 단기 알바를 찾아 다녔다.
알바로 들어가보니 월급은 1백만원 대 초반, 내일모레 서른 살이 되는 석박사가 인턴직을 수행하며, 야근과 주말 업무가 난무하는 곳이었다. 얼핏 보니 페이는 적고 몸이 혹사당하는 일이다. 고학력은 기본이었다. 그런데도 일이 재미있어 보이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꽤 매력적이고 재밌는 일들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였다.
스펙이 안되지만 막연히 누군가 내 간절한 마음을 알아주겠지 생각하고, 관련업계에 이력서를 열심히 넣었다. 답장 한 번 받아본 적이 없다. 아마 소위 광탈(광속탈락의 준말)을 당했겠지. 잘 할 자신이 있는 일이었는데, 패기만 넘치는 자소서(자기소개서)로는 부족했던 것 같다.
지방 영업소의 영업 사원으로 발령이 나다
통장에 돈이 다 떨어졌다. 이제 될 대로 되라 싶어서 아무 데나 지원하자고 다짐했다. 이름 들어본 회사면 다 지원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러다 아버지가 총각 시절 몇 년 근무했던 건축자재 제조업 회사에서 인턴을 뽑길래 지원했는데, 덜컥 붙어버렸다.
고민과 불안감이 가득했던 시간에 비해 서류 통과 후엔 일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서류 전형에 통과하고 첫 면접을 본 것인데 합격이 되었다. 이름 들으면 알만한 기업에 붙었다며, 친구와 선후배들의 축하를 받았다.
인사 발표가 나는 순간, 아차 싶었다. 서울에서 폼 나게 사원증 메고 커피 한잔 손에 들고 다니는 커리어 우먼이 되지 않을까 했는데, 지방 영업소에서 거래처 상대로 자재를 파는 영업 사원으로 발령이 난 것이다. 심지어 내가 고생해서 서울로 올라오기 전 그곳으로.
애인에게 지방 영업소로 발령 났다고 말하는 순간, 헤어지자는 통보를 받았다. 갑자기 모든 안 좋은 일들이 한꺼번에 밀려오니 미칠 지경이었다. 외로워졌다.
첫 출근 날 면접 복장으로 사무실에 도착한 순간, 삭막한 분위기에 겁먹었다. TV에서 본 대기업의 사무실들은 온데간데 없었다. 열 명 남짓한 아저씨(?)들이 인상을 팍팍 쓰며 컴퓨터 앞에 매달려있는데, 군대 같다고 해야 하나….
▲ 영업담당자로 판촉하러 가는 현장. © JEONG Alex
자재를 직접 현장과 대리점에 판매하는 업무를 맡게 되었다. 매출을 달성하기 위해 이런저런 사람을 만나고, 자재를 팔고, 창고에서 출고시켜 고객한테 도달하기까지 신경을 쓰고, 팔고 난 후 자재 사용에 대한 돈을 받아내는 ‘영업’ 사원이 되었다.
처음 선배를 따라 대리점에 나갔는데 돌아오는 첫 마디는 이랬다.
“관리직 아가씬 것 같은데 왜 따라왔어요?”
영업 담당자라고 소개하자 신기해하는 건 덤이고, 사장들의 한숨이 이어졌다. 업무 지식이 부족하니 거래선이 어린 여자애를 데려왔다며 담당 과장님께 항의 전화가 들어갔다. 내가 거래선을 떠난 뒤 과장님한테 전화해서 고작 하는 말이 ‘어린 여자애라서 영업 사원답지 않다’고 불평하다니!
역설적이게도 과장님에게 전화한 그 사장은, 요즘은 가끔 잘 지내냐며 연락이 온다. 나만큼 잘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나.
“남자친구는 있니?”
거래처 사장님들, 현장 노가다 아저씨들에게 물어 물어 일을 배웠다. 현장에 가면 몇 시간씩 앉아서 이것저것 시공자들을 귀찮게 했다. 캔 커피 몇 개 사서 드리고, 박스 깔고 구경하기를 얼마나 했는지 모르겠다. 여자애가 와서 앉아 있다고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커피 한 잔에 다정한 말 몇 마디면 이야기꾼들이 따로 없었다.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해라, 팔 때 이렇게 해줘야 된다는 잔소리 들어가며 일을 배웠다.
현장은 편안해져 가는데, 회사가 여전히 어려웠다. 차가운 공기가 맴도는 사무실에는 살면서 만날 일이 없는 30,40대 아저씨들뿐이라, 혼자 외톨이처럼 지냈다. 내부 보고서 작성 방법을 알아내려고, 선배들이 예전에 만든 보고서를 읽는 게 하루 일과 중 중요한 일이었다.
내 목표는 인턴십을 무사히 끝내고 정직원이 되는 것이었다. 연봉이 적지 않아, 버틸만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독하게 버티자고 마음먹었다. 사고 치고, 문제를 일으키고, 혼이 나가며 일을 배웠다. 치마랑 하이힐은 집어 던지고, 셔츠에 바지와 단화로 스타일을 바꿨다. 겨울엔 워커를 신고 현장에 나갔다.
관둘 것 같아 보이던 애가 사직서를 안내고 버티니, 조금씩 나를 쳐다봐주는 선배들이 생겼다. 어색한 선배들의 첫 마디는 “남자친구는 있니?” 였다. 남자친구가 없다고 하면 자연스레 부서 내 총각인 선배들과 연결시켜주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불편한 마음에 ‘애인 있다’고 대답한 게 거짓말의 시작이 되었다. 하루의 대부분을 회사 직원들과 함께 보내니, 없는 남친에 대한 말을 지어내야 했다.
기왕 할 거짓말이면 완벽하게 만들어보려고 준비했다. 사진을 보여달라고 할까 봐 게이친구에게 부탁해 남자 사진을 미리 받아놓았다. 회사 행사할 때 남자친구를 데려오라는 부장님 말씀에 남친이 일이 있다고 둘러대기도 했다. 마음 불편한 거짓말이 지금도 진행형이다. 술 먹고 헛소리해서 들킬까 봐 걱정되지만, 어쩔 수가 없는 것 같다. 이미 시작했으니까.
과장님도, 부장님도 잘 봐주신 덕에 나는 정규직이 되었다. 회사라는 곳에 점점 익숙해지는 중이다. 평범한 4년제 대학교 졸업자인데, 4천에 가까운 연봉을 받고, 또 열심히 한다는 말도 듣고 있으니, 이만하면 나쁘지 않은 것 같다.
거래처에서 성희롱을 당하다
대략 회사 일이 익숙해지니 요즘은 거래선이 말썽이다. 거래처 사장 대부분이 30,40대 소규모 사업자인데, 물건 팔아달라고 매장에 방문하면 ‘손을 잡고 싶다’며 추근대거나, 전화해서 ‘보고 싶다’는 둥 ‘갑자기 네가 생각났다’는 둥 진짜 각양각색이다.
처음에는 내가 난리를 치면 물건을 안 사줄까 봐 회피하기만 했는데, 여러 번 겪다 보니 멘붕이 왔다. 나는 누가 날 감히 성희롱하면 바로 로우킥을 날려주리라 생각했는데, 실제로 당해보니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도저히 안 되겠길래, 거래처 회식 자리에 가서 블루스를 추고 온 다음날 과장님과 면담했다. 전날 밤 사실 경과를 읊어드리자, 안 그래도 여직원 혼자 거래처에 보내고 걱정하던 과장님은 거래선 접근 금지령(?)을 내렸다. 거래선 담당자도 같은 과 대리로 교체하고, 거래처 회식이 생기면 다른 일 제치고 대신 참석해주기도 하셨다. 요즘은 사내 직원들도 조심하라고 챙겨주시고 있어서, 그나마 마음 편하게 거래선에 다니고 있다.
지금은 괜찮아졌지만, 도저히 그 상황에 닥치면 해결할 대책이 없다. 그저 나를 막 대하지 못할 만큼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되면 되겠지, 아님 내 인생에서 그 사람을 치워버리면 되겠지, 하고 생각하는 것밖에는 떠오르는 게 없다. 그 인간들은 또 나 아닌 누군가에게 함부로 대하고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어찌나 남한테 쉽게 대하는지 모른다. 남에게 어떤 상처를 안겨주고 살지 상상도 못할 거다. 당한 것의 배로 갚아주고 싶은데, 방법이 없어 안타까울 따름이다.
‘여자’라는 이름으로 버티기도 버거운데…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 오래 일하고자, 업무에서 전문적인 경험을 쌓으려고 노력 중이다. 여자가 버티기 힘들다는 업무를 맡았지만, 좋은 상사를 만나 잘 버티고 있으니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 기분이다. 꼭 전문직이 아니더라도, 내가 잘 하는 일이 생기면 인정 받고 오래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돈을 조금이라도 더 벌어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맛있는 거 하나라도 더 사줄 수 있겠지.
▲ 애인과 함께 간 유등축제. <둘이 결혼하게 해주세요>라고 적고 띄워보냈다. © JEONG Alex
사내에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할 때는 간혹 조금 답답할 때가 있긴 하다. 묵직한 비밀 하나 가슴에 묻어두고 있는 것만큼 사람을 우울하게 만드는 게 없는 것 같다. 애인이 여자친구라고 어디 가서 편안하게 말할 수가 없어서 가끔 짜증이 난다. 그저 가슴 한 켠에 묻어두고 나만 알콩달콩 행복하면 되지, 하고 생각하려고 노력 중이다.
간혹 게이 친구들 중에 ‘오픈리 게이’(커밍아웃한 동성애자)로 살거나 외국으로 건너가 자유롭게 사는 걸 보면 부럽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그럴 용기가 아직 없다. 용기 내어 오픈 한다 하더라도 내 가족이나 애인이 사람들의 가십거리가 되는 건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다. 회사에서는 노처녀나 독신주의로 보이겠지만, 그런 정도는 괴로운 축에도 속하지 못한다.
나는 한국 사회의 제도와는 별개로, 나름대로 가정을 꾸릴 것이다. 그러려면 경제적인 수입은 필수라, 어떤 식으로든 회사에 다녀야 한다. 회사 내에서 ‘여자’라는 이름으로 소수자 취급 받는 것도 버거운데, 성적 정체성까지 문제가 된다면 내 커리어는 가시밭길이 될 것 같다. 목소리를 낼 용기가 없어 지금은 조용히 사는 데에 만족하려고 한다. ▣ JEONG Al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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