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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당한 몸”을 가지고 살아가다
몸을 통제하며 살아간다는 ‘환상’에서 깨어나 
 

 

 

텔레비전의 채널이 많아지면서 어머니는 더 많아진 건강 관련 프로그램을 정말 꼼꼼히 챙겨 보며, 그 속에 나온 온갖 건강식품과 기구들에 막대한 관심을 보이신다. 유산균, 버섯, 블루베리 등이 줄지어 우리 집 식탁에 올라온다. 또 각종 치료기 광고에 눈을 반짝이며 딸의 지갑이 열리기를 바라시기도 한다.

 

어머니는 뭐니 뭐니 해도 몸이 튼튼한 게 제일이라며 ‘몸이 튼튼해야 마음이 튼튼하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되뇌신다. 아마 우리 부모님 연배의 어른이 계신 집안이라면 비슷한 풍경이 보일 것 같다.

 

그런데 만고의 진리처럼 여겨지는 이 말, ‘몸이 튼튼해야 마음이 튼튼하다’는 말은 정말 모든 사람들이 따를 만한 진실일까? 무심코 넘긴 이 말을 다시 보니, 나같이 아프고 힘든 몸을 가진 사람에게 참 가혹한 말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 깊은 속뜻은 내가 느끼는 것과는 다른 의미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젊고 균형잡히고 건강한 몸을 가진 사람은 ‘몇’?

 

나는 40대에 막 접어든 장애여성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장애를 갖고 있었기에 사회에서 말하는 ‘정상적인 몸’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다. 그래도 지금보다 어릴 땐 남들이 보기엔 불편해 보일지 몰라도, 몸의 통증을 모르고 내 생활을 꾸릴 수 있었다. 그런데 남들처럼 학교에 다니고 생계를 꾸리기 위한 여러 일을 경험하면서, 나이가 들고 무거운 몸이 되었다.

 

아무리 장애가 심해지는 위험이 있다고 해도, 돈 없는 내가 쉴 수는 없는 일.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지금은 모 출판사에서 재택으로 원고 교정 일을 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재택근무를 부러워하지만, 내 몸엔 오히려 독이 된다. 온종일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다리 근육은 약해지고 허리는 통증을 호소하며 비명을 지른다. 몇 년 전 수술한 목 디스크는 언제 재발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내 정신 혹은 마음상태는 어떨까? 몸이 안 좋아졌으니 내면적으로도 좋지 못한 변화가 있을까? 

 

▲  수전 웬델 <거부당한 몸: 장애와 질병에 대한 여성주의 철학>(그린비, 2013) 
 

<거부당한 몸: 장애와 질병에 대한 여성주의 철학>(그린비, 2013)의 저자 수전 웬델에 따르면, 우리는 ‘몸을 통제하며 살아간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기에 몸이 건강해야 마음도 건강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몸의 통제란 과연 가능할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인간에 의해 통제가 되지 못하는 몸은 ‘거부되어야 할 몸’일까? 우리는 당연하게 몸에 대한 통제의 환상을 받아들이고 사는 건 아닌지 한 번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신체 조건을 뛰어넘어” 또는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등의 얘기를 종종 듣기도 하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말을 사용하기 전에 잠시 눈을 돌려보자. 의학이 발전한 미래 사회가 어떻게 될지는 몰라도, 사람의 몸이 가진 보편적인 능력은 한계가 있다. 사람들은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근력이 약해지는 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또 한 살이 채 지나지 않은 아이가 걷지 못한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물론 개인 차이가 있고, 사회적 환경과(물리적 환경, 정신적 환경을 포함하여) 문화, 개인의 노력에 의해 만들어진 몸의 능력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 모두는 영원히 젊고, 아프지 않고, 활기찬 몸을 가지고 살아갈 수는 없다.

 

그런데도 왜 ‘장애가 없고 건강하고 젊고 예쁜 몸’을 기준으로 삼는 것일까? 왜 이 기준에 맞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의 몸은 ‘뛰어넘어야 할 것’이나 ‘극복해야 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일까? 왜 사회구성원의 자격을 받으려면, 몸도 그 사회가 기준으로 삼은 것에 맞춰야 하는 것처럼 여겨지게 된 것일까? 그리고 ‘몸’에 따라 내면의 능력이나 상태도 다르다고 보게 된 것일까?

 

몸의 ‘능력’도 사회에 따라 다르게 이해된다

 

사실 사회적 환경은 몸의 능력을 만들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이 어떤 환경에 있느냐는 그가 몸을 어떻게 쓸 수 있느냐는 말과도 통한다. 산 속에 사는 사람과 도시에 사는 사람의 신체 조건은 점점 차이가 나게 되며, 각각 원하는 능력도 달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수전 웬델이 말하듯, 생활을 위해 매일 물을 길어 날라야만 하는 여인과 도시에 사는 교수인 저자가 같은 몸의 능력을 지닐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맞추거나 뛰어넘어야 한다고 여기는 신체 조건이란 실은 그리 보편적인 의미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한 사회가 ‘장애’를 보는 시각에도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볼 수 있다.

 

장애를 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은, 한 장애여성인 나 개인의 경험만으로도 충분히 가늠해볼 수 있다. 나는 어릴 때 장애가 심하지 않은 편이었음에도 혼자 밖에 나가지 못했다. 서울의 변두리 동네에 사는, 걸음도 잘 못 걷고 말도 잘 못하는 여자아이는 동네 꼬마들에게 놀림거리였고 어른들에게 경계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내 모습을 신기함과 동정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나는 스스로 세상에서 가장 아픈 아이며, 아무것도 못하는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어느 특수학교 초등 과정에 입학하면서 조금씩 달라졌다. 나보다 장애가 심한 아이들이 훨씬 많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은 없다’는 사실을 점차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렇게 초등학교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지만, 이후 맞닥뜨린 사회는 자칫하면 내게 ‘넌 장애인이니까’라는 낙인을 찍어 격리하는 짓을 서슴지 않았다.

 

낙인이란 무엇인가. 장애를 보는 시각은 사회마다 다르고, 그에 따라 당연히 장애인을 대하는 태도 또한 다르다. 장애인을 그저 질병을 앓는 사람으로 보는 시각도 있고, 사회적응 부적격자로 보는 시각도 있다. 또 무조건적 돌봄이 필요한 사람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아마 복지국가에서 장애인의 능력에 대해 바라보는 견해와, 우리 사회에서 생각하는 장애인의 능력은 엄청난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본다. 같은 장애를 가진 사람에 대해서조차 말이다.

 

예를 들어, 시각장애를 가진 사람이 한국의 상황에서는 학교를 다니는 데도 제약이 있고, 일자리를 구하는 데도 큰 어려움을 겪는다. 집 밖으로 나가면 도로의 턱과 계단에 걸리고, 점자 안내는 부재하며, 사람들의 차별적인 시선을 한 가득 받는 데다가, 기나긴 자신과의 싸움도 거쳐야 한다. 소위 ‘평범한 삶’을 살기에는 비장애인들보다 몇 배의 힘이 필요하다.

 

그러나 장애인 인권이 우리보다 보장된 사회에서 산다면, 훨씬 수월하게 자신의 능력을 발견하고 또 발전시켜갈 수 있다고 한다. (TV에서 보는 미국 드라마엔 장애인이 전문직을 가진 인물로 자주 등장한다. 드라마니까 현실을 그대로 반영했다고 보긴 어렵겠지만, 미디어를 통해 장애인이 그다지 특이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우리 상황과 비교될 수밖에 없다.)

 

<거부당한 몸>을 쓴 수전 웬델과 같은 장애여성이 우리 사회에서 교수직을 유지하기란, 어지간한 배경이나 특출한 능력 없이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피로를 쉽게 느끼고 고통을 상시 동반하는 ‘장애를 가진 몸’으로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워낙 낯설게 보이는 우리 사회다. 나이가 조금만 들어도, 요즘같이 시간의 흐름이 빠른 사회에서 일자리를 유지하는 게 어렵다고들 하는데 말이다.

 

그러고 보니 수전 웬델이 ‘나이가 드는 것은 곧 장애를 갖게 되는 것과 동일하다’고 보는 것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는 더 이상 젊지도, 가볍지도 않은 몸을 가지게 되면서 사람들은 장애를 인식한다고 이야기한다. 나이와 장애를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많은 비장애인들이 아무 사고 없이 살아갈 경우, ‘몸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는 보통 나이 듦이지 않을까?

 

‘돌봄의 통제’에 대한 고민

 

사회에서 환영 받는 몸이 아니라는 걸 느끼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나이 듦이 원인이든, 선천적이거나 후천적인 장애가 원인이든, 내 몸이 거부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은 충격적일 수 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그로 인한 ‘통제’를 받게 되는 것도 무척 힘든 일이다. 수전 웬델은 이 ‘돌봄의 통제’ 역시 고민해봐야 한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에게 내 몸을 맡겨야 한다는 것은 어떤 일인가? 아무리 가까운 가족이라도 내 일상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에는 익숙해지기 어렵다. 하물며 낯선 활동보조인에게 내 모든 것을 드러내고 돌봄을 받아야 한다는 상황이라면? 그리고 그 서비스를 받기 위해 내 생활의 일부를 포기해야 한다면? 어떤 방식이 가장 좋은 것인지, 답을 찾는 일은 지금 상황에서는 참 어렵기만 하다.

 

실제로 나는 ‘돌봄의 통제’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고민하는 장애여성들이 무척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 역시 그중 하나다. 지금은 혼자 일상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하여, 소소한 활동보조의 역할을 어머니에게만 부탁하는데, 어쩌면 내 어머니이기 때문에 더 불편한 점도 있다. 과년하다 못해 중년의 길목으로 접어드는 딸의 몸을 돌봐야 하는 노년의 어머니이기에, 일상적인 부탁을 하나 할 때에도 위축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활동보조인을 두자면(지금의 장애 급수로 활동보조서비스를 받는다는 건 꿈속에도 어림없지만) 과연 내 생활을 드러내고 의지해야 하는 데서 오는 ‘돌봄의 통제’ 문제를 어찌 풀어가야 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생긴다. 주변에서 활동보조서비스를 받아야 하는 장애여성들이 ‘활보에 맞춰 사는 삶’에 대해 자조하는 이야기를 꽤 많이 들었다. 활보에 맞춰 옷을 입고, 활보를 받기 쉽게 하기 위해 낮은 신발만 신고, 활보에게 부담주기 싫어 찌지도 않은 살을 빼야 하는 생활에 대해 웃으며 이야기하지만, 분명 큰 고민이 깔려 있는 문제일 것이다.

 

많은 장애단체에서 이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 서비스를 받는 유형도, 목적도, 생활도 모두 다른 현실이기에 고민거리도 그만큼 많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갈등에 대한 이상적인 방법을 찾아나가야 하는 것도, 장애계뿐 아니라 우리 사회가 당면한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통증과의 공존 속에서 즐거움을 찾아가기

 

건강하고 고통 없는 몸으로 일생을 보낼 수 있다면 그만큼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마는, 우리의 몸은 분명히 한계가 있다. 젊고 건강할 때는 많이 먹어도 날씬함을 유지하는 일이 가능했지만, 기초대사량이 줄어든 지금 달달한 초콜릿 한 상자에 늘어나는 내 뱃살만 봐도 알 수 있다. 예전엔 몇 시간을 걸어도 다리에 힘이 풀리지 않았는데, 이제 단 30분을 걸어도 엄청난 고통을 느끼는 허리와 다리를 보면서, ‘통증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 더욱 분명해진다.

 

수전 웬델은 고통 받는 몸에 대해, 고통이 없이는 인식되지 않는 몸에 대해, 그리고 힘든 몸을 가지고 사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마 스스로 통증을 갖고 살아온 장애여성이기에 ‘통증의 극복’이 아닌 ‘통증과의 공존’을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일상적으로 통증을 느끼는 몸을 갖게 되면서부터 나 역시 통증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의료적인 각종 시술, 약물치료)을 최소화하기로 마음먹었다. 통증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차라리 통증이 나를 잡아먹지 않을 정도로 내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 믿고 있다. 주의하면서 일하고, 신선한 공기와 햇살을 느끼기 위해 산책을 하고, 좋은 사람들과 만나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등 즐거움을 더하면서 생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통증에 홀라당 나를 바친 적도 많지만 말이다.

 

통증을 없애야만 하는(없앨 수 있는 상태면 없애는 것이 좋겠지만 만성통증을 완전히 없앤다는 것은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대상으로 보고 이를 위해 내 전부를 바치는 것보다는, 차라리 통증과의 공존 속에서 즐거움을 찾아가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즐거움과 고통은 늘 공존하는 것이라고 하는 수전 웬델의 말처럼 말이다.

 

사회는 끊임없이 젊고 아름답고 건강한 몸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 부모님처럼 조금이라도 더 건강한 몸, 정상적인 몸을 유지하도록 노력하라고 강조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몸에 대한 규제는 상업성을 띠게 되면서 그 전파력이 더 심해진 것 같다. 젊고 마르고 건강한 몸에 대해 거의 집착 수준의 광고와 메시지들로 가득하다.

 

나는 건강의 중요함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자신의 몸의 요구를 정확히 인식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회로부터 거부당하는 몸이지만, 나 자신은 그 몸을 인정하고 그대로의 삶 또한 인정하는 것이 내 삶을 좀더 행복하고 풍요롭게 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 이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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