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세상을 바라보는 노래
[두근두근 길 위의 노래] 가만히 #강정  

 

‘길 위의 음악가’가 되어 새로운 장소와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 싱어송라이터 이내의 기록, “두근두근 길 위의 노래” 연재를 시작합니다. www.ildaro.com       

 

 

모든 게 노래가 될 수 있었다

 

1. 길 위에서 사람을 만난다.

2. 궁금해 한다.

3. 찾아가서 만나본다.

4. 그리고 (언젠가) 공연을 한다.

 

이런 공식이 생겼다. 같은 순서로 최근 전주에서 공연을 했고, 변함없이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 반짝이는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몇 개월째 비슷한 순서로 지내서인지 마음 상태가 갓 구워낸 빵 같지만은 않다. 마음이란 언제나 그렇듯 종잡을 수가 없다. 이번 공연을 준비하면서는 뭔가 긴장이 더 되었고 마음이 울렁거렸다. 그래서 마음을 달랠 겸 부를 노래들을 찬찬히 적다 보니,

1. 일상에 대한 노래

2. 주위 사람에 대한 노래

3. 함께 부르는 노래

4. 세상을 바라보는 노래

– 이런 순서가 나왔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노래를 만들기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그때그때의 사소한 생각들에 선율을 붙여도 괜찮다는 걸 발견했기 때문이다. 거대한 이야기, 그럴듯한 문장들이 아니어도 모든 게 노래가 될 수 있었다.

 

사람들을 관찰하는 걸 즐기는 성격이라 재미있는 무언가를 포착하면 신이 나서 또 노래를 만들어본다. 그러다가 (어쩌다가) 사랑에 빠지는 경험을 하자 그 휘몰아치는 연애 감정이 노래가 되고, 이별을 하니 슬픔이 흥건한 (그래서 좀 회복되고 나니 다시 부르기 애매한) 노래가 되었다. 어렵게 만들 능력이 안 되어 단순하게 만들었더니 돌림노래도 되고 함께 부르는 노래도 된다.

 

뭐가 이렇게 쉬워, 시시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아마추어 정신으로 한 걸음씩을 내디뎠다. 

 

▲  그럴 듯한 문장들이 아니어도 삶의 소소한 모든 게 노래가 될 수 있었다.   © 노래 짓고 부르는 이내  

 

강정, 밀양, 세월호…사회 문제 앞에 무기력해지는 마음

 

내가 지금 여기 살고 있는 이야기를 노래로 만들다 보면 사회적인 문제 역시 담기게 될 테지만 ‘사회참여’적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것은 무언가 불편한 심정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세상을 바라보는 노래’라고 두루뭉실하게 말해왔다. 하지만 최근에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대해, 아니 어쩌면 두 가지를 애초부터 분리하고 싶지 않다는 꽤 오래된 열망을 다시 찬찬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메시지를 하나 받았다.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생들이 여러 예술가들의 신청을 받아 ‘세월호를 기억하는 예술제’를 열 계획인데, 마음이 있다면 신청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 이런 제안을 받을 때면 무언가가 쿵, 마음에 떨어지는 듯하다. 이전의 다른 공연들을 기획할 때처럼 마음이 가볍게 흐르지는 못한다.

 

일상의 문제들을 접하는 태도는, 그러니까 내가 어찌할 수 있는 문제라면 차근차근 하나씩 해 나가면 될 일이다. 슬퍼도 밥은 먹고, 울다가도 잠시 웃긴 생각에 웃을 수도 있는 게 사람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사회 시스템의 문제라든가, 건너건너에 일어난 일이라던가, 내가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어떤 사회 문제 앞에서는 벌써 무기력해지려는 마음과 싸워야 한다.

 

가까이서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강정의 해군기지 건설 문제를 다룬 다큐를 보고 강정으로 떠나서 아직까지 그곳에서 지내고 있다. 친구가 떠날 당시, 남겨진 우리들은 갈 수 없는 대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았다. 함께 현수막을 만들어 집 밖에 걸었고, 나는 “가만히 #강정”이라는 노래를 만들었다. ‘뭐라도’ 하고 싶은 마음에 만든 노래였지만, 적게 모인 사람들 앞에서 부르는 작은 노래 한 곡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냐는 소리는 마음 속에서 끊임없이 들려온다.

 

정작, 강정으로 떠난 친구도 날마다 그런 갈등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구럼비 바위는 사라졌고 공사는 여전히 진행 중이고, 밀양의 할머니들은 무자비하게 쫓겨났고 송전탑 싸움은 청도로 옮겨졌고, 세월호 참사를 통해 수많은 비리와 문제들이 드러나고도 개인들은 끊임없이 시스템에 짓밟히고 있으니까. 

 

▲  친구는 강정으로 떠나고, 나는 "가만히 #강정"이라는 노래를 만들었다.   © 노래 짓고 부르는 이내  

 

[가만히 #강정] 이내 작사 작곡  * 공연 영상- http://bit.ly/1tayGhl

 

가만히 가만히 들을 수 있다면

구럼비 바위의 이야기 들릴 거예요

내버려 두어요 항상 있던 그 곳에

우리보다 먼저 그 곳을 지키던 바위인걸요

 

가만히 가만히 바라볼 수 있다면

밀양의 할매들 마음이 보일 거예요

지켜주어요 내 어머니 살던 곳

그리고 내 아들 딸들이 살아갈 마을인걸요

 

가만히 가만히 내버려 두어요

가만히 가만히 그대로 두어요 

 

<서시>가 적힌 티셔츠 배송을 기다리며…

 

2014년 4월 16일, 그날 이후 이 (연약한) 노래를 부르기가 쉽지 않았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 수많은 생명을 잃었고, 같은 이름으로 시위가 시작되고 있었다. ‘가만히’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있다’와 ‘내버려두다’라는 동사에 ‘가만히’라는 부사는 분명 다른 뜻으로 다르게 작용한다. 나는 뜬금없게도 ‘부사적’ 삶의 태도를 이야기한 철학자 김영민의 글이 생각나 다시 찾아보았다.

 

“명사와 동사로 구성되는 정신문화적 ‘경부고속도로’의 바깥에서 이 어긋남을 어긋냄으로 되받아 치는 것을 일러 ‘부사적’이라고”(봄날은 간다) 했고, “그 스스로를 오히려 숨기는 편이면서도 기꺼이 이웃을 도와 그 전체의 행로를 바꾸는 변침의 노동을 하는 번득임”(비평의 숲과 동무공동체)이라고도 했다. 여전히 아리송한 말들이지만 새롭게 읽혔다.

 

책임을 묻고 물으며 사건에 대한 ‘대안’과 ‘결과’에 집중하게 되면 약한 한 사람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무력감이 찾아온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강해지고 싶긴 하지만 한 번도 강했던 적은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 결국 내 자리에서 내가 취할 태도를 돌아보라는, 그러면 충분히 움직일 수 있다는 토닥임 같았다. 내 자리에서, 진지하게, 할 수 있는 만큼, 기억하기 위해, 즐겁게, 아프게, 아름답게, 가끔이라도, 혹은 자주, 강렬하게, 조용하게, 잔잔하게, 꾸준하게, 함께… 

 

▲  후배가 세월호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 윤동주의 <서시>가 적힌 티셔츠 스무 장을 제작했다.   © 이내 

 

(그다지 사회참여적이지 않았던) 대학 후배가 세월호 사건을 기억하는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윤동주의 <서시>가 적힌 티셔츠 스무 장을 제작했다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원하는 사람들이 하루 동안 그 티셔츠를 입고 자신의 방식으로 세월호를 기억하고 애도하고 생각하는 하루를 보낸 후, 사진이나 글 등의 기록을 남기고 다음날 티셔츠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한다. 그 사람은 또 자신의 하루를 같은 방식으로 보내고 기록한 후 다른 이에게 전달하고 또 전달하고, 그렇게 일정 기간 티셔츠의 행방을 좇는 형식의 이벤트였다. 후배는 그 기록들을 한 곳에 모으는 일을 하겠다고 했다.

 

곧바로 나도 신청을 했다. 그리고 공연이 있는 어느 날 그 티셔츠를 입기 위해 배송을 기다리고 있다. 큰 변화를 가져 올 혁명적인 일은 아니겠지만, 말하자면 이런 게 ‘경부고속도로’의 바깥에 있는 부사적인 움직임 같은 것일까 생각해 보았다.

 

덧) 한참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던 전주에서 사온 중고책에 마침 이런 구절이 있었다. 나는 스스로 매우 나이브하다 느낄 때가 많고, 이런 글을 읽으면 ‘너무 나이브한 거 아니야?’라는 생각이 자동으로 따라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브할지라도 나는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으며,

1. 일상에 대한 노래

2. 주위 사람에 대한 노래

3. 함께 부르는 노래

4. 세상을 바라보는 노래를

‘계속해서’ ‘성실하고 정직하게’ 부르는 수밖에는 없을 것 같다.

 

“솔직히 나는 사회가 열악해지고 있다고 쉽게 단언하지 못하겠다. 사회는 딱히 좋아지지도, 그렇다고 나빠지지도 않고, 그저 나날이 다양한 형태의 혼란에 빠질 뿐이지 않을까, 라는 것이 나의 기본적인 관점이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사회란 애당초 열악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열악해도 우리는 –적어도 우리의 압도적 다수는- 그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나갈 수밖에 없다. 가능하면 성실하고 정직하게. 중요한 진실은 오히려 그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중.  ▣ 이내 bombbaram.blog.me
 

           <여성주의 저널 일다> http://www.ildaro.com        <영문 사이트> http://ildaro.blogspot.kr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   2024/1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