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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에 집중하는 노년의 행복 
[죽음연습] 70대가 들려주는, 노년 잘 사는 법② 
 

 

 

<철학하는 일상>의 저자 이경신님은 의료화된 사회에서 '좋은 죽음'이 가능한지 탐색 중이며, 잘 늙고 잘 죽는 것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 일다 www.ildaro.com 

  

앞서 70대 노년의 지혜를 20세기 초반의 독일작가 헤르만 헤세와 최근 활동하는 미국작가 다니엘 클라인에게서 빌렸었다. (“70대가 들려주는, 노년 잘 사는 법” 기사 참조) 이들이 공통적으로 나줘 준 노년 잘 사는 법의 핵심은 ‘노년을 노년답게 보내라’는 것이었다. 죽음과 인생을 돌아봐야 할 시기인 노년은 나름의 가치, 의미, 과제가 있다는 헤르만 헤세의 이야기, 자신의 늙음을 직시하고 단순하고 소박한 즐거움을 추구해야 한다는 다니엘 클라인의 이야기를 통해서 노년을 살아감에 있어 놓쳐서는 안 되는 중요한 지혜를 얻었다.

 

이번에는 전직 교수인 70대 중반의 두 아시아 노인들로부터 노년 잘 사는 지혜를 좀 더 구해보기로 했다. 이근후의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갤리온, 2013)와 나카노 고지의 <행복한 노년의 삶>(문예출판사, 2003) 두 권의 책을 펼쳐 들었다.

 

육체적으로 쇠약해도 재미있게 살 수 있다
 

▲  이근후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 
 

이근후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들 가운데 인상적인 것은 육체적 쇠약을 인생의 추락이라며 부정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나이가 들면 몸이 불편하고 질병 몇 개쯤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나이 듦의 상징으로 담담히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육체적인 노쇠가 인생을 재미있게 사는 데 방해물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한다. 젊었을 때 재미있게 사는 법과 늙었을 때 재미있게 사는 법이 다를 뿐이라면서.

 

“지금 나는 건강 때문에 산 높은 곳까지 오르지 못한다. 네팔에 가도 가벼운 트래킹 정도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손에 잡힐 듯 코앞에 다가서 있는 봉우리들, 그 봉우리에 올랐던 때의 이야기들을 떠올린다. 그것만으로 즐겁다. 삼청동 연구실에서 멀리 북한산 인수봉을 바라만 봐도 좋다. 산을 다리가 아니라 눈으로 즐긴다. 산에 오르지는 못하지만 산을 바라볼 수 있는 차선의 기쁨을 즐긴다고 할까. 그것은 나에게 또 다른 차원의 즐거움이자 아직 나에게 허락된 즐거움이다. 세월이 흘러 자리에 눕는 날이 오게 되더라도 나는 침대 위에서 히말라야 동영상을 보며 머릿속으로 신나게 등반할 것이다.” (이근후,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

 

나이가 들어 주름살이 늘고 근육과 뼈가 약해지고 병들어 여기저기 아픈 것이 노인답다고 그는 생각한다. 젊어 보이지 않는다고 건강을 과시하지 못해 주눅 들거나 한탄할 필요는 없다고 당당히 얘기한다. 한 눈을 실명하고 인슐린 펌프에 의지한 채 살아가야 하는 당뇨병 환자지만 충분히 재미있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이근후 할아버지는 몸소 보여준다.

 

불현듯 80대 중반인 한 할머니가 떠올랐다. “건강해 보이세요.”라고 인사를 건넬 때마다 할머니의 대답은 매번 똑같다. “여기저기 다 아파. 주름살이 쭈글쭈글한데…”이다. 이런 할머니의 반응이 당혹스럽다. 80대 중반에 아픈 데가 없고 주름살이 없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을까? 그 연세에 남의 도움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해 혼자 다닐 수 있는 정도라면 건강하다고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요즘 대다수 노인들은 내내 젊어 보이고 아픈 데 없이 건강하길 바란다. 몸이 하루하루 늙고 쇠약해지는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이 안타깝기만 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근후 할아버지의 ‘육체적 노쇠가 나이 듦의 상징’이라는 이야기도 다니엘 클라인이 ‘늙음을 직시하라’고 했던 메시지와 다르지 않다. 자신이 처한 노년이라는 현실을 냉정히 바라보고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노년의 즐거움, 재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에 노년의 직시야말로 행복한 노년의 출발점이 된다.

 

각자 자기 색깔대로 꾸리는 노년

 

두 할아버지가 만들어가는 노년은 언뜻 보기에 무척 달라 보인다.

 

이근후 할아버지는 컴퓨터를 배우고 젊은이들과 이메일로 소통하는 것에서 큰 보람과 즐거움을 찾는다. 젊은 세대와 소통하는 법으로 이메일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나카노 고지 할아버지는 나이 들어 컴퓨터를 배우고 이메일을 주고받는 것이 세상의 유행을 좇는 일이라며 탐탁지 않게 여긴다. 쉴 수 있는 노년의 삶을 복잡하게 만들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글을 쓸 때도 원고지와 만년필을 고집한다.

 

또 바깥활동에 적극적인 이근후 할아버지와 달리 나카노 고지 할아버지는 외출을 삼가고 은둔하는 쪽을 택한다. 이근후는 젊은 시절의 경험과 지식을 통합해서 정년퇴임 후에는 타인들과 나누는 활동에 집중한다. 그래서 티벳에서 의료봉사도 계속하고 보육원 봉사도 다니고 영화연구 동아리 활동도 한다. 아내와 ‘가족 아카데미아’를 만들어 가족에 대한 연구 모임도 꾸리고 청소년 상담도 한다.

 

나이가 들수록 다른 사람에게 먼저 관심을 가지고 연락하라고 충고하는 사람이니, 제자들의 화갑잔치까지 챙기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도 않다. 왕성한 사회활동 때문에 남들이 보기에는 놀라운 에너지를 가진 노인처럼 보이지만, 이근후 할아버지는 다만 “야금야금 조금씩” 해나갈 따름이란다.

 

어차피 각자 자기 색깔로 노년을 꾸리겠지만, 나카노 고지는 세상 인연을 버리고 은둔자처럼 지내는 노년을 적극적으로 선택한다. 대개는 노년의 고립, 고독을 부정적인 것으로 바라본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의 노년은 이근후와 또 다른 점에서 내 시선을 사로잡는, 그 나름의 독특하고 흥미로운 점이 있다.

 

이 일본 할아버지는 세상의 의무를 다한 노년에는 자연을 벗하고 정신세계에서 살면서 은거하는 것이 좋다고 주장한다. 세상 돌아가는 일은 젊은이에게 맡겨두고 신경 쓰지 않는다. 외출을 삼가는 쪽이니, 관혼상제와 같은 외부 행사는 당연히 무시한다.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고 자기만족에 충실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외부의 인간교류에 끌려 다니는 것은 자기를 잃고 살아가는 삶이라고 본다. 나카노 고지에 의하면, 노년은 내면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자기 자신이 되는 시간이고 참된 자아를 만나는 시간이다.

 

멍하니 뜰을 바라봐도 행복하다

 

▲  나카노 고지 <행복한 노년의 삶> 
 

‘밖을 향하는 노년’과 ‘안으로 침잠하는 노년’으로 서로 확연히 달라 보이는 두 할아버지의 노년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닮은 점이 없지 않다. 휴대전화,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는 나카노 고지 할아버지만큼이나 이근후 할아버지도 자동차, 손목시계, 휴대전화 없이 지낸다. 게다가 “인생은 ‘여기’와 ‘지금’이다”라고 말하는 이근후 할아버지도,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지금, 이곳’에서 살아갈 뿐이라는 나카노 고지 할아버지도, 현재에 집중하려고 애쓴다는 점에서 한마음이다.

 

무엇보다 내 마음에 와 닿은 것이 ‘지금, 이곳’ 즉 ‘현재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삶에 충실하고자 하는 자세는 비단 노년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젊은이들에게도 지금 이 자리에서 잘 살아내야 한다는 메시지는 여전히 의미 있고 유효하다. 다만, 나카노 고지가 제대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젊을 때는 쫓기듯 무언가 도모하려 하는 데 반해, 나이가 들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뜰을 바라보면서도 지금 여기 살아 있는 행복’을 발견할 여유가 생긴다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일흔 여섯 살이 된 나와 2년 10개월 연하인 아내에게도 특별하게 재미있는 일이 일어나지 않고 하루하루 서로 병 없이 무사하게 맞이할 수 있는 것을 가장 큰 행복으로 느낀다. 꽃이 피면 올해도 꽃을 볼 수 있게 된 것은 하늘의 은혜라고 감사한다. 노년의 심경이란 그런 것이다.” (나카노 고지, <행복한 노년의 삶>)

 

나이가 들면서 신체적 에너지도 줄어들고, 따라서 삶을 살아내는 속도도 점차적으로 떨어질 때, 따분할 정도로 반복적인 일상 속에서 미세한 것,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을 놓치지 않고 온 마음으로 받아들여 감동할 수 있다는 것은 기적처럼 보인다.

 

이근후 할아버지가 강조하듯이, 이런 기적은 돈이 그득한 곳간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지금 이곳’에 충실하고자 애쓰는 마음, 현재 주어진 삶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우리를 정말로 기적으로 이끌고 가는 것이다. 노년이 한 인간의 인생에 주어지는 마지막 선물이 될 수 있다면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나는 ‘지금 여기’를 만트라(Mantra, 명상을 하면서 외는 짧은 음절의 주문)인 양 마음속으로 되뇌어본다.  ▣ 이경신
 

             <여성주의 저널 일다> http://www.ildaro.com        <영문 사이트> http://ildaro.blogspo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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