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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과 남을 가로지르다>① 북한의 술 문화 
 

※ 10년 전, 한국으로 와서 살고 있는 북한이주여성 효주 씨가 북한의 서민문화와 남한에서 겪은 경험을 전하는 <북과 남을 가로지르다> 칼럼이 연재됩니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되었습니다.

 

국경을 넘어, 가깝고도 먼 땅에 와 10여년

 

한국에 온 지도 벌써 10여년이 흘렀다. 세월이 유수 같다는 말이 있지만, 세월만큼 빠르게 흘러가는 것은 없는 것 같다. 가끔 운동을 하러 개울가 하천 길을 걸을 때가 종종 있다. 흐르는 개울물을 내려다보면서 물의 흐름도 세월의 흐름만큼 빠르지는 않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언제 벌써 10여년이 흘렀는가! 북한 국경을 넘어 3국을 거쳐 한국으로 오기까지는 매순간 목숨이 위협받는 과정을 거쳤다면, 한국에 와서 지금까지는 두고 온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과 죄스러움, 그리고 언젠가는 그들을 만날 날이 오기만을 꿈꾸며 그 날을 준비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오늘날까지 열심히 버텨온 것 같다.

 

한국에 정착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친구들도 사귀면서, 나름대로 좋은 사람들을 만난 덕분에 지금은 때로 내가 한국사람이라고 착각할 만큼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북에서나 한국에 와서나 글을 써본 경험이 한 번도 없다.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해서 많은 책을 읽긴 했지만 나도 이젠 나이를 먹는지라 노안으로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 책을 들여다보려 하면 눈앞이 아물거려 이젠 책조차 볼 생각을 안 하고 살고 있는데, 어느 날 지인이 북한과 남한 문화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써보라고 한다. 글 솜씨도 없고 써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쓰라는 건지. 그런데 자꾸 용기를 내보란다. 그들 말대로 용기를 내서 한번 써보려고 한다.

 

술꾼들 버릇은 북이나 남이나 마찬가지

 

첫 번째 글은 술 문화에 대한 것이다. 북한의 술 문화. 전 세계적으로 큰 공통점이 있다면 술일 것 같다. 세계 그 어느 나라를 따져보아도 술이 없는 나라는 없을 것 같다. 나라마다 술의 종류도 다양하다. 그리고 나라마다 술의 쓸모도 비슷한 것 같다. 술은 취하기 위해 마시기도 하지만, 약으로도 쓰이고, 음식에도 쓰인다. 그리고 축복받는 결혼식에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술이요, 또 가장 슬퍼해야 하는 장례식장에서도 꼭 필요한 것이 술이다.

 

술은 북한사람들보다 한국사람들이 더 많이 마시는 것 같다. 환경 때문에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술은 식량을 재료로 만들어야 한다는 단점 때문에 북한에서는 그 좋아하는 술마저도 마음대로 사먹거나 만들어 먹을 수 없지만, 한국에서는 어느 마트를 가나 술을 안파는 곳이 없다.

 

손쉽게 술을 구입할 수 있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술 문화는 남한과 북한이 참 많이 닮았다. 흔히 사람들이 술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먹고, 술이 술을 먹고, 술이 사람을 먹는다고들 한다. 기분 좋게 한 잔씩 하다가 조금 취기가 오르면 딱 한 잔씩만 더 하자고 하고, 취기가 완전히 오르면 술인지 물인지 분간을 못하고 먹는 게 술꾼들의 술버릇이다.

 

어렸을 때 우리 아버지는 소문난 술꾼이었다. 아니 술꾼이라기보다는 술주정뱅이라고 하면 맞을 것이다. OOO이라고 이름만 대면 “아, 그 술주정뱅이!” 라고 할 정도로 군,리,동 통틀어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술을 좋아하는 분이었다.

 

아버지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술이 취해 온전한 정신으로 집에 들어온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아무리 술이 취했어도 집을 곧잘 찾아오시곤 했다. 하지만 내가 중학교에 올라가서부터 아버지는 술이 취하면 몸도 못 가누고 동료들에게 업혀오거나 집을 찾아오다가 길가에 쓰러져있는 것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알려주면 오빠와 내가 모셔오곤 하였다.

 

아버지는 항상 자전거를 타고 다니셨다. 자전거 마니아이기도 했다. 자전거 공장에서 기사장으로 일하고 있는 아버지 친구에게서 부속품들을 하나하나 얻어서 직접 자전거를 조립하여 타고 다녔을 정도이다. 한국에서처럼 비싸고 멋있는 자전거는 아니었지만 그런 재주를 가진 아버지를 친구 분들은 몹시 부러워했다.

 

아버지가 술에 취하면 친구 분들이 제일 먼저 챙기는 것이 자전거였고, 그 자전거를 자기 집에서 새로 도색을 해서 자기 것이라고 우기곤 했는데, 그러면 아버지는 알면서도 늘 속아주곤 했다.

 

아버지는 늘 술이 웬수라고, 다시는 술을 안 먹는다고, 술을 다시 먹으면 벽에 머리를 박고 죽겠다고 하시고는 다음날 또 술독에 빠져 돌아오셨다. 어머니는 늘 아버지 때문에 걱정이셨고 하루도 마음 놓고 편하게 지내신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지금도 생각하면 참 신기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다. 그렇게 매일 술독에 빠져 사시는 아버지는 단 하루도 출근 시간에 지각해본 적이 없었고 직장 일에 소홀한 적이 없었던 것 같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대장장이 일을 하셨는데, 직장에서나 마을에서나 친구 분들에게도 참 인기가 많았다.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는 것만큼 자신의 일과 가장으로서도 소홀함 없이 살려고 노력하는 책임감 강한 분이었다.

 

상점에서 살 수 있는 술은 관혼상제용 뿐

 

북한에서는 한국에서처럼 성인이 되면 마트나 슈퍼에서 술을 마음대로 살 수 없다. 북한에서 유일하게 상점에서 살 수 있는 술은 관혼상제용으로 나오는 것 몇 병에 불과하다. 관혼상제용이란 사람이 죽거나 결혼을 하거나 할 때 그 세대에 국가에서 지정한 양만큼의 술을 배정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도 세대당 500g짜리 5병-10병. 하지만 간부들이나 상점판매원이나, 점장, 이런 사람들은 예외다.

 

어디가나 ‘빽’(뒷줄 인맥)은 무시를 못하는 것 같다. 상점에서 술 같은 것을 더 사려고 하면 빽만 있으면 살 수 있다. 그렇게도 살 수 없는 사람들은 결국에는 불법으로 하는 밀주(개인이 집에서 몰래 뽑는 술)를 사서 관혼상제용으로 쓰기도 한다. 또 직장회식에서 남자들이 술을 먹고 싶을 때, 재료를 가져다주고 부탁하거나 아니면 뽑은 술을 사서 먹기도 한다.

 

한국에는 곳곳에 마트가 있고 또 식당이 있어서 가고 싶은 곳 먹고 싶은 곳에 가서 골라가면서 먹을 수 있지만, 북한은 개인집에 가서 술안주를 직접 만들어서 먹는 것이 고작이다. 술안주라야 감자채볶음, 김치이다. 그리고 고기라고 하면 집토끼를 잡아서 안주로 먹으면 진수성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마저도 없으면 소금 한 가지로도 술을 먹기도 한다. 북한의 남자들은 한국의 남자들처럼 술을 참 좋아한다. 술꾼들은 가정이야 어떻게 되든 빚을 내서라도 술을 외상으로 마시기도 한다. 그 빚은 고스란히 아내들이 갚아야 할 몫이다. 아마도 한국의 서민들의 생활 속에서도 똑같은 현실이 아닐까 싶다.

 

불시 검사를 피해 ‘몰래’ 술을 빚는 집들

 

몰래 밀주하는 것에 대해 좀 더 설명해보겠다. 환갑이나 회갑 결혼식이 다가오면 술 담그는 집에 미리 주문한다. 재료에 따라 술도 나오는 양이 다르다. 술의 도수는 25도 이상 불을 붙여봐서 파란불이 빨리 꺼지지 않을 정도여야 25도-28도 이상의 술이 된다.

 

북한 정부에서는 가정에서 밀주를 하는 것에 대해 불법으로 정하고 불시에 검사를 하기도 한다. 한낮에 굴뚝에 연기가 나면 술을 뽑는다고 생각하고 급습하기도 해서 술항아리나 술 뽑는 기계 등을 회수해가거나 벌금을 물리기도 한다.

 

그래서 머리를 쓴 것이, 밖에는 문에 자물쇠를 잠그고 집안에서 소리 없이 술을 뽑거나 특히 겨울에는 집이 따뜻하라고 가루로 된 갈탄을 물에 이겨 아궁이에 가득 덮어놓으면 하루 종일 굴뚝에 연기가 나는 것을 이용해서 과감하게 대낮에 술을 뽑기도 한다. 술의 양은 어떤 재료냐에 따라 적게 나오고 많이 나오고의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만약 옥수수 1kg이면 술이 500g짜리 소주병으로 잘 나오면 3-4병 정도 나온다. 그러면 부탁한 사람한테 두 병을 주고 나머지는 팔아서 식량을 사거나 다시 술 재료를 사서 술을 뽑아서 팔면 밑천이 조금씩 생기고 또 가족이 살아가는데 큰 보탬이 된다.

 

맛있기로 소문이 났던 나의 밀주, 그 비결은  

 

▲  술 기계에도 술맛의 비밀이 숨어있다.   © 손그림 - 효주 
 

나도 한때 술을 만들어 팔았던 적이 있다. 북한은 배급체제 사회인데, 경제난으로 배급이 제대로 안 나오니 사람들은 굶주림으로 허덕였다. 나 또한 먹을 것이 거덜 날 처지여서 일단 옥수수 10kg을 사서 술 담그는 법을 배워서 술을 담갔다.

 

항아리에서 술이 뽀글뽀글 끓는 소리가 경쾌하게 나면 술이 잘됐다는 증거다. 술을 사갈 때도 술꾼들이 맛을 보고 사기 때문에 술맛이 좋을수록 조금 더 비싸게 팔 수 있어서 나름대로 여러 가지 수법을 쓰는 집들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술누룩을 띄울 때 항생제를 섞는다고 한다. 그러나 항생제를 섞은 술은 먹으면 머리가 깨질 것 같이 아프고 숙취도 오래 간다고 한다.

 

나는 술맛을 좋게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방법을 썼다. 산에 나무하러 다니면서 걷어온 오미자 넝쿨을 돌돌 말아 말렸다가 술을 뽑을 때 술죽에 섞어 뽑으면 오미자의 상큼한 향기가 어우러져서 술이 참 맛있었다. 술을 사러온 사람들의 입소문으로 단골들이 생겼고 그 밑천으로 여러 번 같은 방법으로 술을 뽑아 팔았던 때가 있었다.

 

술을 맛있게 뽑는데도 노하우가 있다. 우선 누룩을 잘 띄워야 하고, 항아리에서 술죽을 잘 끓어야 하며, 마지막으로 술 기계에도 비밀이 숨어있다. 술 기계는 통 안에 냉각관을 연결하는데 그 관이 합금이 아닌 순 동관이여야하며, 술 도수를 맞출 때도 얼마만큼 알맞게 맞추는가가 관건이다.

 

이런 비법 때문에 동네에서도 술이 잘 팔리면 서로 시샘을 하고는 한다. 인간은 원래 질투와 시기의 동물이니,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떼어낼 수 없는 일들이기도 하다.

 

영양가 없는 술찌끼로 끼니를 때우던 사람들

 

술을 뽑아 파는 집들에는 술찌끼(술을 거르고 남은 찌끼)를 달라고 오는 사람들이 많다. 술찌끼를 우려서 사카린을 섞어 밥 대신 끼니를 때우거나, 두부를 뽑은 콩찌끼를 얻어다가 나물과 약간의 가루를 섞어서 빵을 만들어 끼니로 때우기도 한다.

 

결국 나중에는 술과 두부를 하는 집들은 그 찌끼까지도 팔아 돈을 번다. 한마디로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고 보면 된다. 술찌끼는 바로 먹으면 술에 취한 것처럼 온몸이 나른해진다. 그리고 엄청 독해서, 처음에는 모르고 거름을 한다고 텃밭에 뿌려놨는데 그 해 모든 채소들이 하나도 안 나올 정도였다. 그런 것을 북한사람들은 없어서 못 먹을 정도다.

 

영양가 하나 없는 술찌끼에 사카린을 섞어서 단맛에 끼니를 때우던 사람들이 생각난다. 그래서 북한에서 밀주를 하는 것은 생계를 꾸려 가는데 절실한 생명줄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에서 밀주를 해서 팔아 생계를 유지해 나갈 수 있는 집은 그나마 밑천이 조금 남아있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당시 중산층의 사람들도 나라에서 주던 배급이 끊기면서 거의 거덜이 나기 시작해 나중에는 거지 신세 또는 집까지 팔고 거리에 나앉은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렇게 많은 인민들이 먹지 못해 영양실조, 전염병에 시달리고, 말도 제대로 못하는 어린아이들이 추운 겨울에 옷도 제대로 못 입고 고사리 같은 손을 내밀며 기차역에 나와 손님들에게 먹을 것 좀 달라고 애타게 구걸하는 모습을 여기 한국사람들은 아마도 상상도 못할 것이다.

 

현재 북한사람들은 1990년대부터 시작된 혹독한 고난의 행군 시기를 견뎌냈고, 그 시련을 밑거름삼아 지금은 그 어려운 생활고를 이겨내는 방식을 스스로가 터득했을 정도로 힘들지만 묵묵히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한다.

 

배급이 끊긴 후, 아프고 슬픈 기억

 

내가 한국에 왔을 당시 처음엔 화폐 가치에 놀라고, 상점(마트 또는 슈퍼)에 가서 놀랐다. 슈퍼에 가면 돈만 있으면 내가 사고 싶은 것. 특히 슈퍼에 쌀까지 있어서 사고 싶은 양만큼 아무 때나 사다 먹을 수 있다는 것이 더욱 놀라웠다.

 

배급 제도가 유지되는 동안, 그 어느 곳에 가서든 절대로 그냥 먹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설사 출장을 간다고 해도, 한 달에 두 번씩 나오는 식량배급표에서 출장을 가는 날 만큼의 출장용 양표를 떼서 목적지에 가서 쓰고 온다. 한마디로 북한의 전국 어디에 가도, 돈이 있어도 먹을 것을 사먹을 수가 없다는 얘기다.

 

식량난 이후에 생겨난 장마당(한국의 재래시장)은 돈을 가지고 유일하게 먹을 것을 사먹을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워낙 찐빵 한 개도 화폐 교환하기 전에 북한 돈으로 5원, 보통 직장로동자의 한 달 월급이 50-70원 정도라고 한다면 고작해야 빵이 10개-14개 정도밖에 안 된다. 빵 이야기를 하니, 내가 아는 어떤 남자아이가 배가 고파 빵 한 개와 집을 바꿨던 가슴 아프고 슬픈 기억이 떠오른다. 오죽 배가 고팠으면 그랬을까!

 

그렇다고 북한에서 집을 개인이 마음대로 팔고 살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내가 북한을 떠날 때는 경제난으로 식량 사정이 어려워지고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판국에, 결국은 국가에서 주는 집이지만 개개인이 밀거래로 서로 팔고 사는 정도까지 이르렀다. 힘 있는 사람은 힘으로, 없는 사람의 집을 빼앗았다. 돈 있는 사람은 암거래로 싼 값에 집을 샀다.

 

그런데도 텔레비전에서는 해마다 대풍작을 거뒀다고 선전을 하였다. 인민들은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속아준다. 정부에서도 인민들의 사정을 모를 리 없지만, 믿었던 사회주의 국가들이 다 무너지고 달러가 부족하여 수입쌀을 사들이는 것도 한정되어 있으니, 나라를 지키려니 군대는 먹여야 하고 치안은 유지해야 하니 보위부 안전부(경찰)는 쌀을 줘야 하고, 그렇게 울며 겨자 먹기 식이었던 것이다.

 

경제난 속, 협동조합이 운영한 선술집이 ‘인기’

 

어려운 경제난 속에서도, 부녀회에서는 음식을 만들어 파는 협동조합이 생겨나기도 했다. 길거리에 얼음과자와 사카린을 물에 타서 청량음료로 만들어 파는 매대들도 생기고 국수를 만들어 파는 협동조합식당도 생겼다. 조합에서 운영하는 품목은 종류가 여러 가지다. 청량음료, 생필품을 직접 모여 만들어 파는 곳, 한일합작 수출뜨개방, 선술집, 떡집, 두부집, 부침개집, 반찬집 등등.

 

또, 조합에서 선술집도 운영하면서 술을 만들어 300g짜리 한 컵에 3원씩, 안주는 따로 돈을 받고 파는 곳도 생겼다.

 

선술집은 남자들에게 참으로 인기가 많았다. 개인집에서 병으로 사먹으려면 한 병에 15원~16원이지만(식량 값이 올라가면서 술 한 병에 35원씩 할 때도 있었다.) 선술집에서는 만족스럽게 먹지는 못하지만 싼값에 컵으로 사먹을 수 있었다. 싸게 술을 먹되 외상으로는 먹을 수 없으니, 협동조합의 전략이 잘 먹혔던 것 같다.

 

아무리 먹을 것이 없고 굶어죽는다고 아우성치는 상황에서도, 술은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품인 것 같다. 어찌됐던 경제난 속에서도 술이라는 존재는 잘 팔렸으니, 참으로 놀랍다.

 

참! 북한에서는 술을 먹을 때 자기가 먹던 잔을 돌려가며 타인에게 술을 따라주지 않는다. 그리고 술을 그만 먹고 싶을 경우에는, 내 술잔을 상위에 엎어놓거나 상 아래에 내려놓고 그만 먹는다고 하면 몇 번 권하다 그만 둔다. 술을 따를 때는 왼손으로 술병을 받치고 오른손으로 술병의 밑을 받치면서 술잔에 술을 찰랑찰랑 붓는 것이 예의다. 효주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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