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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임신중절 법 개정안, 그 배경과 여파 
 

※ 필자 서미원 님은 연구공동체 <건강과대안>의 ‘젠더와 건강팀’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프랑스 고등사회과학연구원 박사 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건강과대안> 홈페이지(www.chsc.or.kr)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 일다 www.ildaro.com

 

스페인에서 임신중절을 전면 금지? 

 

▲  스페인의 임신중절 법 개정안은 스페인 뿐아니라, 전세계적 저항을 일으키고 있다.  © 출처: Antonio Navia/ Demotix/ Corbis 
 

2013년 12월 20일, 스페인 국민당(Partido Popular)은 실질적으로 임신중절을 전면 금지하는 법 개정안을 상정하여 논란이 일고 있다.

 

불과 3년 전 2010년에 제정된 법에 따르면, 스페인 여성들은 임신 14주까지 임신중절에 관한 정보를 얻고 이를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었다. 또한 임신한 여성이나 태아의 건강에 위해가 될 경우 22주까지는 임신중절을 시행할 수 있었다.

 

16세, 17세의 청소년들도 부모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고, 또한 부모 동의 없이도 임신중절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물론 의사의 동의가 있어야 하지만, 사실상 스페인은 지금까지 유럽에서 가장 관대하게 임신중절 법을 적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번 국민당의 법 개정안으로, 스페인 여성의 임신중절에 대한 권리는 완전히 위기에 처했다. 개정 법안은 여성의 생명이나 신체적, 심리적 건강에 위험이 입증된 경우에만, 또는 성폭력으로 임신이 된 경우에만 임신중절을 허용하고 있다. 사실상 임신중절을 금지한 것이다. 스페인 국내는 물론이고 전 세계 언론사들도 촌각을 다투며 이 개정 법안의 소식을 전했다.

 

누가 임신중절을 금지하려 하는가

 

2011년 12월, 진보당인 스페인 사회노동당(Partido Socialista Obrero Español)의 루이스 로드리게즈 사파떼로(J.Luis Rodriguez Zapatero) 총리 내각이 퇴각했다. 경제 위기 타계책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후 집권한 우파 정당인 국민당의 마리아노 라호이(Mariano Rajoy, 국민당 초대 대표의 아들이기도 함) 총리 내각은 임신중절 접근권을 축소하는 법안을 마련했다. 2010년 임신중절을 관대하게 허용하는 법을 제정한 지 3년 만에 일어난 일이다.

 

그 배경에는 가톨릭계의 입김이 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국민당이 임신 중절권을 강력하게 제한하는 것은 로마 가톨릭교 주교 집단을 의식한 것이다. 가톨릭교 지도자들은 스페인 사회에서 무시할 수 없는 주요 권력 집단이며, 공개적으로 국민당에 대한 지지를 표명해 왔다.

 

사회노동당 전 총리 사파떼로가 두 번째로 총리에 당선되었던 2008년 연방 선거 당시를 봐도 그렇다. 이 때도 안토니오 마리아 루코 바레라(Antonio Maria Rouco Varela) 마드리드 주교는 국민당 라호이 후보 지지 선언을 했다. 그는 2010년에 제정된 임신중절 관련 법안을 비판하며 “어마어마한 임신중절 시술을 양산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스페인어 발행신문 중 최대 언론사인 <에페>(EFE)의 한 특파원은 “국민당은 임신중절이 끔찍한 것이라고 여기는 ‘프로라이프’ 조직에 가담해 있다. 그래서 국민당 내 인사들의 반대가 있더라도, 이 조직을 계속 지지해야 한다. 결국은 반대하는 당내 인사들도 당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고도 밝힌 바 있다.

 

‘어느 종교에도 속하지 않은 국가’ 원칙이 무색

 

정치와 가톨릭 두 집단이 결탁하는 것은 ‘프로라이프’를 내세운 정치 선전 때문만은 아니다. 스페인의 법률과 제도는 여전히 종교와 긴밀하며 교회에 경제적, 제도적으로 혜택을 주고 있다.

 

1978년 스페인은 ‘어느 종교에도 속하지 않은 국가’(어꼰페시오날, aconfesional)임을 헌법에 천명했고, 민주주의 국가 원칙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다수 스페인 국민들의 정치적 성향과 관계 없이, 스페인 정치 구조에 내재된 가톨릭교의 영향을 피할 수 없다. 그 이유를 살펴보자.

 

첫째, 정치인들이 종교 집단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파리의 스페인”(파리 지역에 거주하는 스페인 국민과 단체를 모아 친목과 문화 교류를 도모하는 연합회) 모임의 회원이자, 스페인 출신의 기자 에두아르도 쿠나 파즈(Eduardo Cuna Paz)에 따르면, 스페인 장관 대다수가 ‘오푸스 데이’와 같은 상류층 비밀 교회집단에 속해 활동한다.

 

에두아르도 쿠나 파즈 기자는 이렇게 덧붙였다. “현재 스페인 총리 내각과 가톨릭교 사이의 협력 관계는 지난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껏 영향력을 미치는 국민당과 교회, 국가의 담합은 가톨릭교의 원칙에 기반한 사상을 뿌리내리게 한 프랑코 체제(1939-1975)의 유산”이다.

 

둘째, 가톨릭은 스페인의 교육 제도 내에서 직접적으로 신도, 혹은 신도가 될 수 있는 개인과 접촉하고 관리하기 쉬운 위치에 있다. 성평등 교육가이자 알리깐떼 대학의 ‘성평등 연구자 모임’의 회원인 엘레나 시몬(Elena Simon)에 따르면, 스페인 학교 중 30~40%가 사립 가톨릭 학교이며 국가 지원을 받아 의무적으로 종교 수업을 하고 있다. 그 밖의 공립학교에서 일하는 종교 선생님도 교회가 지정한다.

 

셋째, 가톨릭은 국가를 통해 자금을 조달받는다. 납세자 중 희망자들에게 위탁 세금(impôt demandat)을 걷어 가톨릭 교회가 받는 액수는 매년 1억5천8백만 유로에 이른다. 이는 가톨릭 교회가 국가에 재정을 의존하고, 교회가 일정하게 교육 사업을 부담하여 국가의 부담을 줄여왔음을 시사한다.

 

사회당 사빠떼로 총리도 집권 직후 2004 년 정치 제도와 기관들을 종교로부터 분리하려 했지만, 이 세금 제도만큼은 반대하지 않았다. 보수당이든 진보당이든 사회, 문화, 경제적으로 교회의 영향력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구태여 건드리지 않으려 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 맥락에서 국민당의 라호이 정부가 자신을 지지해 준 종교인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정책을 만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스페인 국민 80% ‘임신중절 법 개정 불필요’ 

 

▲  유럽의회 내 좌파 그룹인 GUE/NGL도 스페인 임신중절 법안을 규탄하며 스페인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지지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출처:GNE/NGL 
 

정치인들이 보수성을 고집하는 것과 달리, 스페인 국민들이 종교에 대해 갖는 생각은 변하고 있다. 2013 년 2 월 스페인 사회학적 연구센터(Centro de Investigaciones Sociológicas, CIS)의 연구 결과를 보면, 스페인 인구의 70.5%가 스스로 가톨릭 신자라고 생각한다. (2001 년 조사에서는 82.1%.) 또, 2008 년에는 스페인 사람 중 15.3%만이 정기적으로 미사에 참여하며 종교 활동을 한다고 답했다.

 

통계 수치의 변화뿐만 아니다. 2008 년 마드리드 근처 리바(Riva)시는 공산주의파 정부가 들어서면서 변호사 두 명을 고용했다. 가톨릭교에서 탈퇴하고 싶어하는 교인들에게 “배교인”이 되는 절차를 밟아주는 행정 업무를 위해서였다. 2008 년 3 월 초 문을 연 이 사무소에는 약 3주 동안 1 천 건의 요청서가 도착했다. 그 중 다수는 주교가 가장 보수적인 발렌시아, 안달루시아, 까스티유-레온 지역에서 온 것이다.

 

3 월 중순, 프랑스 <르 피가로>(Le Figaro)지에는 “스페인의 가톨릭교회가 자신의 사회 관계와 삶에 너무 간섭하려 들고,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을 강요한다”고 밝힌 여성의 인터뷰가 실렸다. 종교가 개인의 삶에 지나친 간섭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며, 정치와 종교의 결탁이 사회 속에서 개인을 매도한다는 것을 깨닫는 이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스페인 국민들의 임신중절에 대한 인식 역시, 정계 다수의 목소리와는 전혀 다르다. 스페인 최대 일간지 <엘 빠이스>(El País)는 2014 년 1 월, 여당인 국민당 지지자의 68%가 “여성 스스로 임신중절 여부를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답한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영국 방송 <BBC>도 2 월 실시된 설문조사에서 스페인 국민 중 80%가 이번 법 개정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임신중절 금지 법안, 어떤 파장을 가져올까

 

위 여론조사 결과가 나오기 전, 스페인 사법부 장관 알베르토 루이즈 가야돈(Alberto Ruiz Gallardon)이 한 발언을 보자. 그는 “우리는 유럽인 다수의 의견을 반영한 법안을 제안한 것이며, 다른 나라 국회에서도 곧 임신중절 제한 법안에 대해 재차 논의하게 될 것을 확신한다”고 호도했다.

 

스페인 현 정부 지도자들이 임신중절에 대한 가치관과 여론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근거들이 나오면서, 국제 사회의 비난도 줄을 잇고 있다. 임신중절을 제한하는 법 개정안 뒤에 숨겨진 정치와 가톨릭교 사이의 모종의 관계, 이에 대해 침묵하는 여당 정치인들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스페인의 법 개정 움직임에 반대하는 초국가적 연대도 긴급히 만들어졌다. 영국 런던, 벨기에 브뤼셀, 프랑스 파리, 뚤루즈, 릴을 포함한 유럽 여러 도시와 아르헨티나, 에콰도르에서도 스페인의 법 개정에 반대하는 집회가 열렸다.

 

스페인 사회노동당의 엘레나 발렌시아노 의원과 프랑스의 여성주의자 모임 ‘대담하게 여성주의하라!’(Osez leféminisme!)는 스페인의 법 개정안이 오히려 스페인 여성들의 건강에 위협이 될 것이라며, 시대에 뒤떨어진 결정이라고 비판했다.

 

이로 인해 가난한 여성들은 위험을 무릅쓴 채 음성적 임신중절을 시도할 수밖에 없고, 부유한 여성들은 이웃국가의 여성 복지혜택을 받으러 원정을 떠날 가능성이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유럽 의회 또한 강압적인 임신중절을 제한하는 것이 스페인 여성만의 일이 아니라며, 임신중절을 제한하려는 스페인 법 개정을 중지하라고 거듭 촉구하고 있다.

 

현재 스페인의 상황은 여성들이 얻은 재생산권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개인들은 늘어났어도, 집권당의 수장과 보수적인 제도와 체제가 이를 수용할 의사가 없이 종교 문제에 천착하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스페인의 사례가 향후 유럽 내 여성 재생산권에 어떤 영향을 주게 될 것인지 주목해야 할 것이다.  ▣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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