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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인으로 살며 한국과 사할린을 잇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 이희팔 ‘화태귀환 재일한국인회장’ 인터뷰 
 

75년전, 일제에 의해 강제이주 당하고 사할린에 억류된 한인의 역사와 삶,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를 짚어보는 기사. 필자 최상구님은 지구촌동포연대(KIN) 회원으로 사할린 한인 묘지조사 후속작업, 영주귀국자 인터뷰 등 ‘사할린 희망캠페인단’ 활동을 펴오고 있습니다. www.ildaro.com

 

91세의 사할린 강제동원 한인 1세, 이희팔

 

벌써 1년이 되어간다. 일본 국회 앞과 외무성 앞에서 만개한 벚꽃을 보았던 것이. 당시 사할린주 한인회, 이산가족협회, 노인회, 이중징용 유가족회 등 ‘한인 2세’들로 구성된 회장단이 처음으로 일본을 공식 방문하였다. 일본 외무성과 적십자에 찾아가고, 중의원 면담을 통해 사할린 한인들의 요구 사항을 전달하는 한편, 증언집회를 열어 사할린 한인의 현 실태를 알리고자 하였다.  

 

▲ 사할린 한인들을 위해 평생을 바친, 이희팔 화태귀환재일한국인회 회장 (91).   © 최상구 
 

우리의 방문 일정에 함께한 사할린 강제동원 한인 1세가 있었다. 바로 91세의 이희팔 ‘화태(사할린)귀환 재일한국인’ 회장이다.

 

2013년 3월 28일. 일본에서의 모든 일정이 끝나고 YMCA 숙소에서 공항으로 갈 짐을 들고 나와 향한 곳은, 서울에서 인천 정도 거리를 이동해 찾아간 이희팔 회장의 자택이었다. 신주쿠 코리아타운에 있는 마트에서 산 한국산 잣과 김을 선물로 가져갔다. 그리고 KIN(킨, 지구촌동포연대)에서 제작한 남사할린 지도를 드렸다.

 

지도를 보시더니, 에스토루(우글레고르스크) 지역에 갔었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1990년 경 이희팔 회장이 사할린에 방문했을 때, 옛 친구인 이문택씨가 멀리 우글레고르스크에서부터 자신을 만나러 왔고 그분의 집까지 갔었다는 거다.

 

우리가 작년에 사할린에 방문했을 때 저녁을 얻어먹고, 올 1월 달력을 들고 갔을 때도 다시 만났던 김인순 어르신의 남편이 바로 이문택씨다.(2005년 사망.) 올 1월 우글레고르스크에서 어르신들과 저녁에 담소를 나누다가, 이문택씨가 결혼 전 코르사코프에서 세 명이 같이 살았다는 얘길 듣게 되었는데 그분들이 바로 박노학, 이희팔 두분이었다. 참, 인연이란….

 

스무살 경상도 청년의 인생을 바꿔놓은 선택

 

이희팔. 1923년 4월 7일생. 경상북도 영양이 고향이다. 변변한 신발도 없어 맨발로 걸어다니던 어린 시절, 아버지와 고모의 노력으로 6학년까지 소학교를 마쳤지만 시골에서 벌이가 좋은 직업을 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1943년, 스무살 나이에 사할린의 돌린스크에 있는 인조석유 주식회사의 갱외부 모집 광고를 보고 신청했다. 시골에서는 하루종일 일해도 기껏해야 50전 벌기 바쁜데 하루 일당이 4, 5엔이었으니 2년 동안 가서 돈을 벌면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우연히 보게 된 한 모집 광고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영양군청에 집합해 트럭을 나눠 타고 안동역으로 갔다. 어머니가 이십리나 걸어 나오셔서 마중했다. 2년 지나면 돌아오니 걱정 말라고 말씀드린 것이 어머니와의 마지막이었다.

 

부산에서 시모노세키로 향했다. 기차를 타고 교토, 우에노를 거쳐 아오모리까지 가서야 하룻밤을 지냈다. 다시 홋카이도의 하코다테, 와카나이를 지나서 사할린으로 건너갔다. 코르사코프(오도마리)에 도착해서, 그곳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돌린스크의 나이부치(브이코프)에 도착했다. 가는 데만 꼬박 1주일이 걸렸다.

 

탄광에서 현지 징용되어 사할린에 남겨지다

 

“굴에 들어가기 전에 안전등 타고 작업에 쓰이는 기구나 기계를 받는데, 그 기계를 나눠주고 수리하는 일을 했어. 안전등 주고 충전하는 일은 전부 일본 처녀들. 그때 유행가 배운 건 전부 그 처녀들한테 배웠지.”

 

생활이 고달프기는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많이 잡히는 청어도, 조선인에게는 주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인이 먹다 남긴 청어 머리를 주워 먹기도 했는데 배탈이 나서 앓아누운 적도 있었다.

 

열심히 일했지만 월급은 전시보국 우편저금으로 ‘강제’ 저금되었다. 여러 번 고향에 송금했지만 나중에 확인해보니, 그 돈은 집에 전달되지도 않았다. 후일에서야 일본으로 간 뒤 십수년간 분의 이자를 보태 4천엔 정도 돌려받았다. 저금했을 당시는 쌀 1킬로그램에 16전, 물가는 수백 배 상승했을 터인데! (우편저금에 대해서는 2007년 소송을 했으나, 불리한 판결이 날 것을 우려하여 취하했다.)

 

2년간의 계약이 끝났지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전쟁 막바지에 헌병들이 전원을 광장에 집합시켜 놓고 “이런 비상 시기에 어디에 간단 말이냐, 오늘부터 너희들은 현지 재징용이다”라고 했다. 이 한 마디에 현지 징용되어 결국 사할린에 남게 되었다.

 

일본에서 사할린 한인 귀환운동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박노학(1988년 사망)이다. 그와의 인연도 여기서부터다. 아직 산골짜기에는 눈이 남아있었던 브이코프에 이희팔 회장이 도착한 것이 6월 초순. 일주일 후에 박노학씨가 들어왔고, 같은 숙소, 같은 부서에서 일하면서 친하게 되었다.

 

일본인 부인과 함께 일본으로 

 

▲ 이희팔과 박노학 : 넥타이 메신 분이 박노학
 

1946년 박노학씨가 먼저 코르사코프로 갔다. ‘밀항’이라도 해서 홋카이도로 가자고 하여 이희팔 회장도 코르사코프로 가게 되었다. 박노학, 이희팔, 이문택 세 사람이 결혼 전까지 함께 지냈다. 코르사코프에서는 면허증을 취득하여 운전수로 취직도 했다. 시간 나면 NHK방송을 챙겨 들었다고 한다. 그저 좋은 소식 있을까 하면서.

 

1950년, 일본인과 결혼을 하였다. 2남 1녀를 두고 있을 즈음인 1956년 <일소 공동선언>으로 소련과 일본의 국교가 회복되어, 1957년 8월부터 1959년 9월까지 7회에 걸쳐 포로로 억류되었던 일본인들이 귀환한다. 이때에는 일본인과 혼인한 조선인들도 일본으로 갔다.(1천541명 일본으로 입국.)

 

이희팔 회장은 1957년 12월에 홈스크 항구를 출발하여 1958년 1월이 되어서야 일본 마이즈루 항구에 도착했다.(박노학씨도 같은 배로 입국.) 배 안에 환자가 있어 검역과 입국 절차가 늦어졌다고 한다.

 

처음 정착한 곳은 도쿄의 아다치구 오야다촌이다. 박노학 씨와 이희팔 회장은 각자 일본인 부인의 고향으로 가려 했다. 그러나 먼저 도착하여 마중나온 심계섭(사할린 코르사코프에서 알고 지낸 사이)씨가 ‘동경에서 함께 있는 것이 귀환운동에 유리하다’고 하여 아다치구에 정착하게 되었다.

 

“마이즈루에 도착하니 히노마루(일장기)가 나부끼고 학생이나 부인들이 환영하러 나왔지만 태극기는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정말 씁쓸했습니다.”(현무암 인터뷰 원고에서.)

 

50여명의 한인, 역사적인 귀환운동의 시작

 

“사할린에서 떠날 때, 역까지 배웅 나와서 울고 소리치던 모습이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일본에만 갈 수 있다면 한국은 가까우니 돌아가자 하면 바로 돌아갈 수 있고, 여러 소식도 들을 수 있을 테니까 ‘당신들이 부럽다’고 하는 그들(사할린에 남겨진 조선인들)을 위해 무엇이든 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현무암 인터뷰 원고에서)

 

박노학 씨는 이미 귀환선 안에서 이승만대통령 앞으로 탄원서를 작성하였다. 그리고 귀환자 기숙사에 도착한지 일주일만인 1월 20일에, 한국 대표부의 최규하 참사관을 만나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2월 6일 박노학, 이희팔, 심계섭을 비롯한 50여명의 한인들이 모여 ‘화태억류 귀환자 동맹본부’를 결성했다. (이후 ‘억류’라는 부정적인 어감의 용어를 빼고 ‘화태귀환 재일한국인회’로 명칭을 변경한다.)

 

당시 귀환자 기숙사에서 아리가와 요시오라는 사람이 이 모임 결성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만주에서 들어온 아리가와 요시오는 운동을 하는 방법이나 청원서 쓰는 법 등을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또한 귀환자 기숙사가 있는 아다치구의 국회의원 시마가미 젠고로 사회당 의원을 소개하여, 그가 2월에 국회에서 사할린 한인 문제를 최초로 질의하기도 하였다.

 

‘주변인’으로 일본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

 

일본의 국적은 부계혈통주의이다. 그리고 호적은 일본 본토 내의 내지호적과 외지호적으로 구분되었다. 1946년 사할린에서 일본인만 귀국시키는 근거가 바로 ‘내지호적’이다. 즉 조선인들은 외지호적에 있는 자들로, 일본인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들의 구분에 따르면 혈통상 일본인 여성이더라도, 결혼하면 남편의 호적에 올라 일본인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1957년의 귀환에는 일본인 부인과 자녀에게만 일본 국적을 인정했다.

 

한인 남편들은 그저 할 수 없이 데리고 들어온 사람들에 불과했다. 심지어 일본으로 들어올 때의 비용도 자기가 부담해야 했다. 패전 후 일본은 본토로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에 대해 가급적 빨리 귀환시키려 했다. 사회 불안 요소를 줄이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도는 조선인들을 북으로 보낸 이른바 ‘북송사업’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이런 일본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건, 게다가 귀환운동까지 한다는 것은 상상 이상의 험난한 삶이었을 것이다.

 

“여기 와서 얼마 안 되어 탁시 운전이나 할까 싶어 이력서를 내. 문 앞에 광고도 운전수 모집이라고 써놨는데도 불구하고 이력서보니 한국인이라고 안된다는 거야. 그렇게 왜놈들이 우리를 악질을 하고…”

 

같은 동포끼리는 어땠을까? 일본의 법률도, 생활 습관도 전혀 모르기 때문에 ‘민단’(재일본 대한민국 민단)이나 한국 대표부에 가서 어떻게든 도와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여기저기 부탁을 했지만 적극적으로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오히려 상처투성이가 될 뿐이었다.

 

“내 이상하단 말야. 민단 사람들이 앞장서서 (귀환운동)해주면 고마운데, 반대로 훼방을 놨단 말야. 왜 그런지 내용을 몰라. (그래도) 신세는 민단한테 졌지... ‘총련’(재일본 조선인 총연합회)에서도 사람이 왔어. 그런데 그 사람이 왜 사회주의 국가를 놔두고 여기로 왔는가라고 물어. 그래서 소문과 실상은 틀리다, 내가 거기서 경험을 하고 온 사람이다, 그런 말 하려면 오지 말라고 했지.”

 

한국에 방문했을 때는 중앙정보부에 끌려가기도 했다.

 

“동아일보 신문사 라디오 방송국을 통해 말했지. 이승만, 윤보선, 현 박대통령, 해외에 있는 동포를 위해 해준 것이 무엇이냐? 라고 했더니 끌려갔지.”

 

다행히 별다른 고초없이 풀려나셨다고 한다. ‘반공’이 제1의 국시였던 박정희 정권 하에서, 공산주의 국가에서 온 사람은 결국 남한에서도 일본에서도 늘 주변인이자 경계인이었다.


한국과 사할린을 잇는 희망, ‘편지’를 전하다

 

그래도 이들을 의지하고 믿는 사할린에 남은 동포들을 생각하며 한국, 일본, 적십자에 탄원서를 보내고, 사할린에도 소식을 전했다. 그러자 한국 주소와 부모 형제 이름을 써서, 사할린에 살아 있다고 한국에 있는 가족에게 보내달라는 편지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그걸 정리해 한국으로 보내니, 한국에서도 이산가족들이 소문을 듣고 편지를 보내오기 시작했다.

 

사할린에서 보내면 일본에서 다시 한국으로 보내주고, 한국에서 답장을 보내오면 일본에서 다시 사할린으로 보냈다. 편지 한통의 사연이 네 번을 왔다 갔다 해야 하고, 빨리 도착해야 두 달이 걸렸다고 한다.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당시 하루 일당이 250엔, 300엔이었는데 편지 한통 보내려면 한국으로는 50엔, 사할린으로는 120엔 정도가 들었다.

 

“편지를 이래 보면은 눈물없이는 못 봐요. 왜 그러냐 하면 내가 거기 있었잖아. 체험한 내가 사정을 알 수 있단 말이야. 편지도 쓸 줄 모르는 사람이 어디가 차필했는가 모르겠지만, 눈물나도록 편지를 써 보내왔어요.”

 

하루에 30, 40통이 올 때도 있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박노학씨의 아들 박창규씨가 이 일을 도왔고, 이후 1970년 ‘가라후토 억류교포 귀환촉진회’(후에 중소이산가족회로 변경)가 만들어지면서 대구에서도 편지 왕래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 편지들을 정리하여 사할린에서 귀환을 희망하는 사람들의 명단을 만들기 시작한다. 전부 1천744세대, 6천924명의 명부가 만들어졌다. 이 편지들의 일부는 박노학씨에 의해 KBS에 전달되었고, 이희팔 회장이 가지고 있던 편지들은 다른 문서들과 함께 기증하여 현재 국가기록원이 보관중이다. 

 

▲ 이희팔 회장의 귀환운동 활동일지.   2012년 8월 국가기록원 전시회    © 최상구 

 

한편, 1972년 KBS 사회교육방송(현재는 한민족방송)이 처음으로 내보낸 “사할린 동포에게”라는 프로그램은 사할린 한인과 고국의 가족 찾기를 주선하였다. 또 일본 도쿄에 사서함을 설치하는 등 사할린 한인과 국내 이산가족 및 유족과의 가교 역할을 하였다. 1972년 4월 3일부터 시작된 이 방송은 밤 9시와 아침 5시 두 차례 1시간 반 동안 진행되었다.

 

“그것도 우리들이 끈질기게 요청해 실현된 것입니다. 한국의 방송국에 가서 국장과 애기해서 사할린에 있는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방송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부탁했었습니다. 사할린 사람들이 한국 노래를 듣고 싶어 하니 음악을 내보내줬으면 좋겠다고 몇 번이나 요청했습니다.” (현무암 인터뷰 원고에서)

 

일본에서 재회한 이산 가족들

 

1970년대 사할린 한인 귀환운동은 몇가지 변곡점을 지나게 된다.(‘날개라도 있었으면… 사할린에서 온 편지’ 기사 참조) 일본에서 귀환운동의 영향으로 사할린 내에서도 귀환 요구가 거세졌다. 일본에서의 귀환운동을 반소-반공 운동으로 인식한 소련은(북한과의 관계도 고려하여) 1976년 시위를 벌인 도만상씨 가족 일가를 비롯 한국행을 요구한 40여명을 북한으로 추방한다.

 

그후 고르바쵸프의 등장으로 소련 내부의 변화와, 일본 내에서 사할린 한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의원들의 모임이 결성되는 등 귀환운동의 우호적인 조건이 형성되면서, 이산가족 만남을 위한 사업이 추진된다. (당시 한국에서는 한국전쟁으로 인한 이산가족 찾기가 KBS를 통해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다.)

 

“1987년경 우리들이 운동해서 일본에서 가족들의 재회가 성사되었는데 사할린에서 일시방문하는 사람들이 왔습니다. 그 때에도 한국대사관에서 매월 6만 엔을 지원받았고 ‘민단’에 대해서도 지원을 요청했지만 부족하기만 했습니다. 사할린이나 한국에서 온 사람들의 숙박비나 식사비도 많이 들었고, 또 관광도 할 수 있게 해줘야 했기 때문에 이래저래 수백만 엔이 되는 것입니다.” 

 

▲   화태귀환 재일한국인회의  이산가족 초청자 명단    © 최상구  

 

비용도 비용이지만, 사할린 한인들이 일본으로 오려면 일본인 보증인을 세워야 하고 초청장 공증, 소련과 일본에서의 비자 발급 등 절차도 매우 복잡하였다. 1987년 일본 국회에서 “사할린 잔류 한국ㆍ조선인 문제 의원간담회”가 발족되면서 이 절차들이 간소화되었다고 한다.

 

마침내 1989년 7월, 한일 양국 적십자사로 구성된 <사할린 거주 한국인 지원 공동사업체>가 만들졌다. 사할린 현지에는 1989년 사할린주 이산가족회와 1990년 사할린주 한인 노인회가 결성되어, 한인들의 모국 방문과 영주 귀국 업무를 담당하게 되는 등 사할린 한인의 귀환운동은 부족하나 결실을 맺게 된다.

 

‘일본도, 미국도 아닌 우리 스스로 해야만 하는 일’

 

“우리 민족을 돕는 것은 일본이 해줄 리도 없고 미국이 해줄 리도 없습니다. 결국 우리 스스로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그런 생각으로 해왔습니다. 나는 고향에서 소학교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일본에 인양된 사람 중에 그 이상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운동한 사람들은 우리들뿐이었습니다. 나는 누가 뭐라고 말하더라도 민족의 일원으로 최선을 다해온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누가 칭찬하던 하지 않던 상관없이, 한민족의 한 사람으로 해야만 하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 (현무암 인터뷰 원고에서)

 

그간의 공로를 인정 받아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평생을 일본에서 주변인으로, 경계인으로 살아와서일까? 우리가 자택을 방문했을때, 이희팔 회장이 처음 하신 말씀은 ‘고독하다’는 거였다.

 

“하여튼 여러분이 와주시니 반갑기가 그지 없어요. 내가 40몇년을 50년이 넘도록 이렇게 일하고 있지만, 사할린 동포들을 구한다고 내 딴에는 힘있는 데로 했어요. 그랬지만 이렇게 찾아오는 분은 오늘 처음이지 싶어 (…) 지금 내가 살더라도 이 세상에 있더라도 얼매나 있을까 (…) 고독하기가 짝이 없습니다.”

 

당신 스스로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올해 4월, 한국에 오신다. 4월 17일에 열리는 KIN 네트워크 포럼 “해방되지 못한 사할린 한인”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기회가 되면 잣죽을 직접 끓여 대접해야겠다. 내가 해드릴 수 있는 게 그런 것밖에 없어 답답한 마음이다. ▣ 최상구

 

[참고 자료]

박승의, “박노학과 이희팔” 미발표 원고.

현무암, 사할린에 남겨진 4만3천명의 동포, “재일 1세의 기억”(오구마 에이지, 강상중 편집, 2008년, 슈에이샤신쇼) 일어 발췌 번역: 배지원 (KIN 운영위원)

 

4월 17일 목요일 저녁 7시, KIN(지구촌동포연대)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회’ 과거청산위원회, 전해철(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공동 주최하는 KIN 네트워크 포럼- “해방되지 못한 사할린 한인”이 재한조선족연합회 문화활동중심(3호선 무악재역)에서 개최됩니다. 참가 문의  02-706-5880  (KIN). 포럼 안내 상세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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