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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르타뉴에서 보낸 편지> 나무 생활용품부터 조각품까지 

 

 

 

‘하늘을 나는 교실’의 필자 정인진 님이 프랑스의 서북부 브르타뉴 지방에서 머물면서 보고 느낀 것들을 기록한 ‘브르타뉴에서 보낸 편지’가 연재됩니다. www.ildaro.com  

 

▲   나막신이 완성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자료.  (퐁-크르와 민속박물관)  © 정인진   

 

과거 브르타뉴 사람들은 나무로 만든 생활용품을 많이 썼다. 금속이 흔하지 않던 옛날, 나무는 중요하게 쓰였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에는 나무뿐만 아니라 짚을 이용해 지붕도 엮고 신발도 만들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브르타뉴 사람들이 나무를 특별히 많이 이용했던 것 같다. 

 

나막신, 나무 접시, 나무 숟가락…

 

이곳에서는 20세기 초까지 나막신을 신었는데, 나막신을 너무 많이 만들어 브르타뉴의 숲이 지금처럼 파괴되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당시만 해도 지역마다 나막신 만드는 장인들이 여러 명 있었다. 나막신은 주로 너도밤나무(hetre)로 만들었다. 나막신이 다 만들어지면, 재빨리 말리기 위해 훈제실을 거치게 된다.

 

장인들은 마을이나 숲 근처에 살면서 장에 나와 직접 만든 신을 팔았다. 가끔은 재단사처럼 농가에서 숙식을 제공받으며, 주인이 특별히 마련한 나무들로 모든 식구들의 신발을 만드는 동안 머물기도 했다. 또 나무가 많이 우거진 산골 마을에서는 나막신 제조인은 가게를 열기도 했다. 

 

▲ 장인들은 나무 숟가락을 장터나 농가를 다니며 팔았다. © M. E Gueguen et G. M. Thomas, Petits metiers bretons d’autrefois (Bruxelles; Editons Libro-Sciences, 1978)  

 

나막신 못지 않게 나무 숟가락도 브르타뉴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생활용품이었다. 이곳에서는 오랜 세월 접시, 사발, 숟가락 등 목제 식기를 사용해 왔다. 영주들 역시 주석으로 식기를 만들기 전까지 나무 식기를 썼다. 은제 식기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매우 드물었고, 더욱이 시골에서는 아주 오랫동안 나무 식기를 사용했다.

 

물론 서민들은 나무 식기조차 풍부했던 것은 아니다. 옛날에는 지금처럼 식사하는 데 많은 그릇을 갖추고 먹지 못했다. 수프나 삶은 귀리 등을 냄비에서 떠 먹는 정도였다. 아버지를 시작으로 가족 구성원들은 번갈아 가며 차례로 냄비에 담긴 음식을 떠 먹었다.

 

식기 중에서 숟가락만은 각자 자기 것이 정해져 있었다. 식사가 끝나면 숟가락은 바퀴모양으로 생긴 숟가락 꽂이에 꽂아 식탁 위에 높게 매달아 놓았다. 숟가락 만드는 장인들은 장터나 농장을 순회하며 직접 칼로 깎은 나무 숟가락을 팔았다. 이 숟가락은 단순한 형태였는데, 드물게 색깔이 돋보이는 것들도 존재했다.

 

꼬르누아이유 ‘결혼 숟가락’에 얽힌 이야기

 

그런데 브르타뉴의 ‘록호낭’이라는 도시를 여행할 때, 나는 매우 화려한 문양이 조각된 나무 숟가락을 한 공방에서 발견하고 놀란 적이 있다. 귀엽고, 조각이 화려한 숟가락들에 관심을 보이는 내게, 숟가락 조각가인 ‘에르베 로랑’(Herve Lorant)씨는 이 숟가락과 관련된 옛날 풍습에 대해 즐겁게 이야기해주었다.

 

로랑씨에 의하면, 그 숟가락들은 보통 숟가락이 아니라 피니스테르 남부에 있는 꼬르누아이유 지역에만 존재하는 ‘결혼 숟가락’(la cuillere de mariage)이다. 

 

▲  에르베 로랑(Herve Lorant)씨는 ‘결혼 숟가락’에 흥미를 보이는 내게, 이와 관련된 옛 풍습을 매우 즐겁게 이야기해주었다.   © 정인진 
 

미혼남성들은 마음에 드는 여인이 생기면 이 ‘결혼 숟가락’을 직접 만들어주면서 청혼을 했다. 이런 행위 속에는 ‘함께 식사를 하면서 살자!’는 의미가 담겨 있단다. 숟가락을 받으면 결혼 승낙이 이루어진 것이다. ‘결혼 숟가락’은 젊은이들의 약혼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해주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 숟가락은 사용하지 않고 벽에 걸어 전시해놓는다고 한다.

 

‘결혼 숟가락’에는 주로 기하학적 문양을 새겼으며 하트 문양이 자주 발견된다. 19세기에 유행했던 이 풍습은 지금은 사라졌고, 21세기에 들어와서는 민속공예품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 에르베 로랑(Herve Lorant)씨의 페이스북 페이지 <Hervé Lorant Sculpteur cuillères de mariage et autres>에서 그가 만든 멋진 ‘결혼 숟가락’들을 볼 수 있다.

 

독특한 풍습을 볼 수 있는 ‘닫힌 침대’ 리클로

 

나무로 만든 생활용품들 가운데 브르타뉴의 ‘리클로’(lit-clos)를 빼놓을 수는 없다. 직역하면 ‘닫힌 침대’라는 뜻의 리클로는 찬장처럼 생긴 가구로, 이곳 사람들은 그 안에 들어가서 잠을 잤다. 브르타뉴에서 리클로는 오래 전부터 사용되어오다가 19~20세기를 거치면서 점차 사라졌는데, 시골에서는 20세기까지 쓰였다고 한다.

 

브르타뉴의 전통 가옥은 가족 전원이 한 공간에서 생활하는 형태를 띠었다. 이런 상황에서 리클로는 각자의 사생활을 어느 정도 보장해주었으며, 겨울에는 추위를 막아주었다. 형태는 지역에 따라 다양한데, 미닫이가 달려 열고 닫을 수 있는 것도 있고 문 없이 커튼이 쳐져 있는 것도 있다.

 

리클로 외관은 화려한 문양들이 조각되거나 지역에 따라서는 징을 박아 장식했다. 그 안에 매트리스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보온을 위해 ‘귀리 보따리’가 깔려 있을 뿐이었다. 길이는 160~170cm로 다소 짧은 듯한데, 브르타뉴 사람들은 서너 개의 베개에 기댄 채 거의 앉은 자세로 잠을 잤다고 한다. 

 

▲  미닫이 문이 달린 ‘닫힌 침대’ 리클로.  식탁 위 숟가락 꽂이가 매달려 있다. ©퐁-크르와 민속박물관  

 

리클로 앞에는 의자를 겸할 수 있는 긴 함(banc-coffre)을 놓았다. 그 함 안에 속옷들을 담았는데, 리클로를 드나들기 위한 발판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동시에 의자로도 쓰였다. 흙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옛날 농가에서, 땅에서 올라오는 습기를 피하기 위해 리클로의 잠자는 칸은 높이 위치해 있었기에 발판은 필수적이었다. 2층으로 된 리클로의 경우 위층에서는 아이들이 잤다.

 

리클로는 프랑스에서 매우 독특한 브르타뉴의 생활풍습이었던 만큼, 요즘에는 도시 곳곳의 민속 박물관에서 그 모습을 자세하게 볼 수 있다.

 

화려하게 채색된 나무 부조 작품들

 

나무로 만든 물건들이 생활용품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브르타뉴에는 화려하게 채색된 나무 부조들도 존재한다. 이 부조들은 성당의 대들보나 제단 뒤 장식 벽, 조각, 혹은 꼴롱바주 건물의 외벽에 새겨져 있을 때가 많다.

 

안타깝게도 그 조각품들은 원래 모습을 완전하게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 전쟁, 화재, 수세기에 걸친 검열, 잘못된 복원 등 다양한 이유로 오늘날 존재하는 것들은 일부에 불과하다. 그래도 여전히 브르타뉴에는 옛날에 만들어진 나무 부조가 상당히 남아 있다. 코트다르모르 지방의 트레고르(Tregor)같은 동쪽의 ‘오트 브르타뉴’ 도시에도 드물게 존재하지만, 피니스테르의 ‘앙클로 파루와쏘’(울타리 쳐진 교회)들과 모르비앙의 ‘루와 모르방’(Roi Morvan) 지역의 성당과 예배당 등 서쪽의 ‘바스 브르타뉴’에는 이런 조각품들이 특히 많다.

 

오랜 옛날 브르타뉴의 건축물 골조들은 대부분 참나무로 만들었다. 15~17세기 사이에는 이러한 나무 골조에 부조를 새기는 방식의, 주목할 만한 변화가 생기게 된다. 가장 오래된 조각품들은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  ‘생-피앙크르’(Saint-Fiancre) 예배당에 있는 2002년에 복원된 나무 조각품. (르파우에트)   © 정인진  

 

현재 남아있는 것들은 단색이나 다색으로 채색한 것들과 가공하지 않은 천연색 그대로의 조각 등 다양한 형식을 띤다. 그러나 원래는 채색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중세에는 성당의 주랑이나 제단 뒤의 장식벽과 조각, 또 건물의 장식들에 모두 채색을 했기 때문이다. 19~20세기를 거치면서 보수, 복원 공사를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채색한 조각품들이 존재하게 되었다. 가령 색깔이 사라진 조각품은 채색을 닦아낸 뒤에 그대로 둔 것이고, 단색 조각품은 복원 과정에서 다른 색으로 칠한 것이라고 한다.

 

여전히 옛날 그대로 화려한 채색을 간직하고 있는 몇몇 조각품들이 이런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실제로 17세기 프랑스에서는 중세에 만들어진 제단 뒤의 장식벽과 조각들의 채색을 더욱 선명하게 색칠하는 작업을 대대적으로 벌였다고 하는데, 화려한 채색은 그때 복원된 것이다.

 

이들 가운데 르파우에트의 생-피아크르(Saint-Fiancre) 예배당에 있는 조각품을 직접 본 것은 큰 행운이었다. 화려한 나무 채색조각들에서 오랫동안 눈을 뗄 수 없었다.

 

사실 채색조각으로 유명한 ‘루와 모르방’ 지방의 케르레나(Kerlenat) 학파의 장인들이 만든 유머 있고 서민적인 조각들도 구경하고 싶었지만, 대중교통으로 접근하기 힘들어 포기해야 했다. 나중에서야 관광안내소에서 주관하는 버스투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아쉽게도 보지 못하고 귀국해야 했다. 언젠가 브르타뉴에 다시 갈 기회가 생긴다면 꼭 이 조각품들을 보러 가고 싶다.  ▣ 정인진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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