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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에 걸린 ‘사람’은 어떤 ‘삶’을 살까
<오지 않은 미래의 발견> 치매라는 공포: 허구와 실재 사이
피오나의 뇌, 점점 빛을 잃고 황량해져가는 우주
“세포막 외부에서는 끈적거리는 플라크가 뉴런들을 뒤덮고, 세포막 내부에서는 복잡하게 뒤엉킨 것들이 마이크로 튜브의 전달을 짓뭉갠다. 수천만 개의 신경접합부들이 사라지고, 이러한 사라짐이 어디에서 발생하는가에 따라 특정 인지 기능이 사라진다. 기억력이나 언어 능력, 혹은 시공간 파악 능력이나 추상적 사고력, 판단력 등. 그것은 마치 거대한 집의 회로 차단기가 하나씩 하나씩 차례로 내려지는 것과 같다.”
▲ 영화 <어웨이 프롬 허>(Away from Her, 2006)
이것은 영화 <어웨이 프롬 허>(Away from Her, 2006)에서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아내 피오나를 어쩔 수 없이 요양원에 보내고 난 뒤 남편 그랜트가 관련 서적에서 습득한 ‘과학지식’이다. 그는 눈으로 뒤덮인 광활한 벌판을 스키 신발을 신고 걷고 또 걸으며 이 지식을 어떻게든 몸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애쓴다.
마지막 문장의 비유는 언어의 표현력을 잔인할 만큼 선명하게 보여준다.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군더더기 하나 없이 명료하게 알려준다.
나는 이 비유를 토대로 피오나의 뇌를 상상해본다. 수많은 뉴런들, 작고 아름다운 별처럼 빛나는 이 뉴런들을 입체적으로 연결하는 무수한 회로들, 그 회로들이 정거장처럼 서로 만나는 지점에 세워져 있는 접합 차단기들. 뇌는 작은 우주처럼 깊고 신비스럽다. 그런데 갑자기 이 우주의 질서를 책임지던 접합부의 차단기가 하나씩 아래로 내려지고 그만큼 콜타르처럼 막무가내인 검은 어둠이 들어서기 시작한다. 한번 내려진 차단기는 돌이킬 수 없다. 다시는 끌어올릴 수 없다. 그리고 도미노 게임을 하듯이 차례차례 차단기들이 내려간다. 점점 더 빛을 잃어가는 우주. 황량한 어둠만 짙어간다.
그리고? 그 다음엔? 인간을 가장 인간이게 하는 상상력의 힘이란, 이런 경우 저 비유가 담고 있는 차가한 절망을 더욱 더 극단으로 밀어붙이는 데에는 적합하지만, 어떤 따스한 극적 전환점을 만들어내기에는 그저 나약할 뿐임을 실감하게 된다. 상상력 또한 상투와 관습에서 충분히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세밀하게 오래 관찰한 실제의 디테일과 예외적이지만 분명 존재하고 있는 ‘다른 이야기들’을 모아 상상력에 자양분을 마련해 주는 게 필요하다.
아이리스 머독, 돌아오지 못한 ‘어둠 속의 항해’
영국이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했던 작가 아이리스 머독은 알츠하이머에 걸려 5년 동안 남편 존 베일리의 돌봄을 받다 1999년 사망했다. 그녀가 죽은 후 2년 후에 만들어진 영화 <아이리스>(A memoir of Iris Murdoch, 2001)는 이 5년 동안 아이리스 머독이 어떻게 변해갔는지, 존 베일리는 그녀의 변화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아니 이해할 수 없었는지를 ‘언어’에 집중해서 그려낸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아이리스>를 보면서 나는 ‘10년도 더 전에 이 영화를 보던 나는 어떤 위치에 있었지?’ 질문해본다. 당시 영화를 보고 나서 뭔가 밍밍하다고 느끼며 아쉬워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도대체 뭘 기대했던 걸까.) 그런데 한 장면만은 10년이 넘도록 내 머릿속에 또렷이 새겨져 있었다. 아이리스가 텅 빈 시선으로 해변 모래밭에 앉아 활자가 아직 기입되지 않은 노트를 한장 한장 찢어 자기 둘레에 죽 늘어놓고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돌멩이로 눌러놓던 장면이다.
결국 바람에 날아가 버렸지만, 바람에 날아가지 않았다면 그 흰 종이 한장 한장에는 무엇이 기록되어 있던 걸까? 매우 독특한 언어철학을 펼쳤던 벤야민은 ‘써지지 않은 것을 읽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읽기’라고 말한 적이 있다. 언어 능력이 완전히 상실되었다고 판정된 ‘알츠하이머 환자’가 손에 꼭 쥐고 있던 그 노트에는, 그 흰 여백에는 우리가 읽어야 할 무엇이 써져 있었던 걸까?
단어들이 떠오르지 않고 단어의 모음이나 자음이 지워지기 시작하면서, 아이리스는 명민하고 독창적이었던 작가에서 언어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치매 환자’가 된다. ‘퍼즐’이라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단어 하나를 떠올리기 위해서도 까다로운 퍼즐 게임을 하듯이 머리를 쥐어짜야 하는 상황이 반복된다. p.u.z.z.l.e. 퍼즐, 이라는 단어를 몇 번이고 종이 위에 쓰던 아이리스는 남편 존에게 말한다. “마치 어둠 속에서 항해를 하는 것 같아.”
어둠은 점점 더 짙어지고 항해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 아이리스가 얼마나 ‘언어’를 중요하게 여기고 ‘단어’를 사랑하는 사람인지 40년이 넘도록 곁에서 지켜보고 경탄했던 존은 이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이리스가 단어를, 문장을, 잊어버릴 수 있다는 말인가. 그는 신음하고 저항한다. 의사의 판단과 포기를 참을 수가 없다. 아이리스의 뇌 상태는 단지 ‘닫힌 책’일 뿐인데, 그 책을 열기만 하면 되는데, 열쇠를 발견하기만 하면 되는데, 그러면 그 안에 무궁무진한 단어들과 문장들이 최고의 윤무를 추고 있을텐데, 왜 그 열쇠를 발견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왜 그 열쇠를 발견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단 말인가.
아이리스의 ‘책’은 그러나 끝내 다시 열리지 않는다. 5년을 사랑과 신뢰와 여전한 경탄으로 돌봤지만 아이리스는 어둠 속의 항해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살아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니야’
<어웨이 프롬 허>에서나 <아이리스>에서나 수포처럼 계속해서 떠오르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뇌에서 신경접합부들이 사라지면, 그래서 특정 인지 기능이 사라지면 과연 이 ‘사람’은 어떤 ‘삶’을 살게 되는 걸까?
▲ 미치 앨봄의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41개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 독자들을 감동시켰던 미치 앨봄(Mitch Albom)의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에서, 모리는 ‘삶’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들려준다. 모리는 루게릭병을 앓고 있다. 그는 지금 ‘천천히 죽어가고 있는’ 중이다. 혹은 ‘그 어느 때보다 꽉 찬 삶을 살고 있는’ 중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 지대에 있는 그의 현재 삶을 뭐라 부를지는 언어학의 문제가 아니라 실존주의적 존재론의 문제다. 모리의 목소리를 듣는 독자들 각자가 자신의 관점에 따라 답하리라. 답이 어떤 식으로 내려지든 사람들은 이 경계 지대에 있는 사람의 견해를 소중히 여겼다.
미치 앨봄이 모리 슈와츠에게 던진 질문들은, 산다고 하면서도 계속 죽음도 삶도 아닌 미혹에만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건 아닌지 불안한 사람들을 대신한다.
“사람들은 나를 다리로 생각해. 난 예전처럼 살아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벽하게 죽은 것도 아니야, 뭐랄까 ... 그래, 난 일종의 ... 그 중간쯤에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어.” “난 지금 마지막 여행을 하고 있고, 사람들은 내게 어떤 짐을 챙겨야 하는지 듣고 싶어하지.”(미치 앨봄,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미치 앨봄이 던진 질문 중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 ‘사후의 완벽한 삶을 위한 시나리오가 있는가.’ 모리는 대답한다. “내 의식이 계속되는 한 ... 나는 우주의 일부라네.” 나는 모리의 이 말에서 ‘의식이 계속되는 한’이라는 조건이 마음에 걸린다. 의식이 계속되지 않으면, 그/녀는 더 이상 우주의 일부가 아닌가. 의식이 계속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주의 일부다, 혹은 우주의 일부가 아니다, 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치매’에 걸려서 특정 인지 기능이 사라지는 사람들은 그럼 어떻게 되는 거지?
‘치매’에 걸린 사람들의 존재태를 고민하기 전에 읽었다면 나는 이 조건부 문장에서 멈추지 않았을지 모른다. 몸이 ‘멀쩡’한데 의식이 작동하지 않는 사람과, 의식이 ‘멀쩡’한데 몸이 작동하지 않는 사람 사이에 금을 긋는 거 아니냐, 육체와 정신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방식 아니냐, 는 식으로 따지자는 게 아니다. ‘사람’이나 ‘삶’의 기준치 혹은 가치나 위엄, 존엄을 묻는 질문은 훨씬 더 어렵고 복잡하다는 사실에 당혹스럽다는 것이다.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을 계속해서 읽다 보면 이 당혹감을 조금은 해소시켜줄 수 있는 모리의 또 다른 견해와 만난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죽어가면서 평화로울 수 있다면, 마침내 진짜 어려운 것, 즉 살아가는 것과 화해하는 일을 할 수 있다.” 루게릭병에 걸린 사람도, 알츠하이머에 걸린 사람도, 몸이 사라지든, 의식이 사라지든, 궁극적으로 평화롭게 죽어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그게 다에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평화롭게 죽어갈 수 있지?
100세 수명 시대, ‘치매’에 대한 공포
‘치매’는 노년이 기이하게, 즉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멈추는 지점이다. 노년의 사회적 자아와 관련해 사회노년학은 유리이론이나 활동이론, 하위문화이론, 지속이론, 사회적 교환이론 등을 펼치지만 이 모든 이론들에 치매는 포함되지 않는다. 치매 이후의 삶은 보건복지학이나 간호학으로 인수인계된다.
사회로부터의 유리를 정상적이고 필연적인 것으로 보든, 그 반대로 사회활동의 유지를 통한 긍정적 자아 이미지의 유지를 강조하든, 혹은 동년배 노년들 간의 상호관계가 만들어내는 하위문화의 의미에 주목하든, 기본적으로 개인의 생애는 단절이 아니라 지속으로 봐야한다고 주장하든, 긍정적 자아 이미지를 사회적 자본의 교환과 관련한 협상의 결과로 보든(정진웅, <노년의 문화인류학>, 한울, 2004/2012) 노년은 ‘치매’에서 멈춘다. 치매에 잠식되면 자아의 자리에 비-자아, 즉 ‘그것’만이 남는다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치매라는 경계 이후의 삶에는 이름이 없다. 그냥 ‘치매에 걸린’ 사람일 뿐이다. 사회노년학에서 출발점으로 삼는 인식론적 중심은 ‘자아 이미지’,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훼손되기 쉬운 노년의 자아 이미지’다. 노년은 가장 상처받기 쉬운 주체다.
노년은 언제부터 시작되는가, 에 대한 답은 여러 개가 있을 수 있지만, 어떤 답변이든 그 안에는 ‘훼손된 자아 이미지’ 즉 ‘타자화된 자기’가 있다. 다른 문화인류학적 관심의 영역과 마찬가지로 노년의 삶에서도 각각의 행위나 선택이 남기는 외형적 자취와 여기에 행위자 자신이 부여하는 의미가 가장 중요하다면, ‘치매’는 치명적 영역이다. ‘행위자 자신’이라는 부분에 커다란 의문부호가 들어서기 때문이다.
경계를 넘어간 ‘저 곳’의 삶으로 치매‘환자’들의 삶은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공포와 불안,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킨다. 언제부터인가 치매는 모든 사람들의 암묵적인 공포, 금기 지대가 되어가고 있다. 즉 노화의 생의학화(Biomedicalization of aging)는 ‘치매’에서 절정에 이른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특히 서구에서 노년에 관한 논의가 근대적 개인 이해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강화된다. 독립적이고 생산적이며 고유한 자아로서 사회 환경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개인의 능력을 강조하는 가치체계 속에서, 더 이상 독립적이거나 생산적이지 못한 노년은 긍정적 이미지를 유지하기 힘들다. 소비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과 소비의 적극적 주체가 아닌 개인은 궁극적으로 그 고유성마저 박탈당하고 기생적 존재로 추락한다.
여기에 ‘의식’마저 갖추지 못한다면 사태는 더 극단적으로 치닫는다. 치매 상태에 있는 사람은 어디에서도 ‘그 공포스런 모습’을 드러내면 안 된다.
“친한 친구가 우리 집에 오고 싶다, 그래서 오지 말라고 했죠. 우리 집에 오면 병원 냄새 나거든요. 노인네가 풍기는 오줌 냄새가 나거든요. ... 그게 싫어서 오지 말아라, 그랬는데, 근데 굳이 온다고 해서 (친구가) 왔어요.” (양현미) -이동옥, 2009, <노년기 여성의 보살핌 경험과 가치에 관한 연구> 이화여대 대학원 여성학과 박사학위 논문, 90쪽.
“얼마나 힘들어. 서로 고통이지. 자식도 고통이고. 나도 고통이고. 어머니는 아주 건강하셨지, 그 정도면. 근데 돌아가시기 1년 전에 우리 집에 오셨는데 팬티에 똥 묻은 걸 모르시더라고, 전혀. 근데 항상 자기가 빨려고 그래요. 그 정도가 되면 그렇게 오래 살 필요가 없어. 전혀 뭘 모르셨어. 사람이 몸에서 냄새가 나잖아. 그 냄새를 전혀 못 맡으시더라고. 동생이 팬티를 많이 보냈어. 왜 그런가 싶었는데 그걸 알고 팬티를 많이 산거야. 어머니가 똥 싼 팬티를 감추시더라고. 어머니가 팬티를 벗어놓으면 내가 빨고 그랬지.”(송진경) -이동옥, 같은 논문.
치매에 걸린다는 것은 인지 능력이 사라지는 것뿐만 아니라 생리적 신체 행위를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치매가 어떤 식으로 시작하는지, 돌보는 사람들에게 어떤 고통을 가져다주는지에 대해 그동안 적지 않은 연구와 이야기들이 축적되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연구나 이야기들이 치매에 대한 무한대의 공포로 수렴된다는 사실이다.
더 많이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치매 이야기는 빠른 속도로 그리고 노골적으로 공포 바이러스를 전파한다. ‘치매의 날’이 만들어지고 국가나 사회, 의료-복지 시스템이 나서서 치매를 예방하고 치매에 걸린 사람들을 비인격적인 삶의 조건에서 보호한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오히려 그 반대의 효과를 증폭시키고 있다.
그러나 100세 수명이 점차 공상이 아닌 현실이 되기 시작하면서 치매에 걸릴 확률 역시 증가하고 있다. 인체의 신비가 밝혀졌다고 의학계는 말한다. 몸은 이전과 같이 각각 유리된 부분에서가 아니라, 부분들의 상호관계 뿐 아니라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시간대 전체를 아우르는 총체적 관점에서 관찰, 관리, 치료된다는 것이다.
의료과학이 늘려놓은 이 수명은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축복이나 희망이 아니라 두려움과 과제로 다가온다. 개인이나 사회, 국가 모두 이 힘겨운 과제 앞에서 당황하고 있다고나 할까. 생각으로든 느낌으로든 100년 삶이라는 것과 친숙해지지 않았는데 기술이 저 혼자 앞서간 것이기도 하고, 또한 100세 수명이 모두의 구체적 현실이 되기 전에 두려움이 먼저 모두의 뒷덜미를 낚아채기 시작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두려움의 한가운데에 똬리를 틀고 있는 게 치매다.
치매에 걸린 ‘사람’들, 이런 ‘삶’을 살고 있다
뇌에서 신경접합부들이 사라지면, 그래서 특정 인지 기능이 사라지면 과연 이 ‘사람’은 어떤 ‘삶’을 살게 되는 걸까? 이 답을 모자이크로, 퀼트로 만들어나갈 관심어린 관찰과 이야기들은 너무나 희귀하지만 그렇다고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 사라 폴리 감독의 영화 <어웨이 프롬 허>
우선 재현된 이야기들로 시작해보자. 영화 <어웨이 프롬 허>는 그런 드문 영화 중 하나다. 사라 폴리 감독의 이 영화는 (82세가 되던 2013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캐나다의 여성작가 앨리스 먼로의 단편 “곰이 산을 넘어가다”를 토대로 만들어졌다. 먼로가 이것을 책으로 묶어 낸 게 2001년, 70세 정도 되었을 때니 자신의 생애 단계적 경험과 감각에 이끌려 쓴 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라 폴리가 이 단편을 영화로 제작했을 때 그녀는 겨우 20대 후반이었다. 20대란 ‘치매’에 걸린 ‘노년’을 이해하거나 상상하기에는 꽤나 젊은 나이다.
그러나 영화는 시종 일관 성숙한 시선으로 알츠하이머에 걸린 사람의 ‘변화한’ 모습과 그럼에도 ‘단절이 아닌 지속으로 남아 있을 수 있는’ 정체성을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알츠하이머로 자신과 주변 사람을 더 이상 기억하거나 식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단절되지 않고 지속적인 정체성을 가지는 것은 그/녀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그/녀와 함께 시공간을 보냈던 사람이 건네는 지속적인 인정과 관계 맺기를 통해서 가능하지 않겠냐고 영화는 조용히 묻는다.
피오나는 요양원에 들어간 뒤 자신이 누구인지 망각한 상태에서 요양원의 남자 환자인 오브리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그녀가 오브리에게 보내는 시선은 애틋하고 부드러우며, 그를 돌보는 손길에는 정성과 진심이 가득하다. 밥 먹을 때나 카드 게임을 할 때나 늘 그의 곁에 머물며 그의 평온을 지킨다.
남편(이었던) 그랜트는 날마다 요양원에 가서 이 모든 모습을 지켜본다. 피오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짧고 내용도 교양 있는 사람들 사이의 친절한 호의 정도에 머문다. 그녀에게 특별한 사람은 새로 사랑에 빠진 오브리지 그가 아닌 것이다. 그래도 날마다 자신을 보러 오는 그를 두고 피오나는 ‘당신 참 고집스럽네요(persistent)’라고 말한다. 주의 깊은 관객이라면 얼마나 여러 번 피오나가 그랜트에게 이 형용사를 사용하는지 알아차릴 것이다.
그렇다, 그랜트는 고집스럽게 멈추지 않는다. 무엇을? 자신과 44년을 함께 보낸 피오나를 바로 그 피오나로 계속 대하는 것을. 즉 피오나, 라는 그가 알고 있던 한 사람의 존재됨을 계속 존중하는 것을. 현재의 그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존중하지 않으면, 자신의 기억 속에서 그녀와 함께 숨 쉬고 있는 자기 자신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걸 그는 느끼고 있다.
44년이라는 시간 속에 녹아 있는 일상과 감정과 취향, 성격 – 이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임을, 알츠하이머에 걸린 그 여자의 존재됨에 자신의 존재됨이 빚지고 있고 기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아는 그는 얼마나 현명한 남자인가. 그렇게 그랜트는 피오나의 뇌 속 접합 차단기가 여기 저기 내려져 있어도, 그 작은 우주가 어둠 속에 잠겨 있어도 피오나가 계속 ‘의미 있는’ 삶을 지속할 수 있게 돕는다.
치매 걸린 엄마와 20여년의 시간을 보내며
이제 꼼꼼하게 관찰한 현실을 소개해보자. 나는 거의 20년이 넘게 치매 상태에서 살고 계신 엄마를 곁에서 지켜봐왔다. 누군가가 귀중품을 훔쳐갔다고 의심하는 것에서부터 끊임없이 물건을 쌓았다 풀었다 반복하고, 길을 잃는 등 치매 초기 증상부터 단기 기억을 상실하고 똑같은 질문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서서히 친지들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중기 증상을 거쳐 자식들 이름을 떠듬떠듬 불완전하게 떠올리는 것 외에는 더 이상 어떤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말기 증상까지 엄마는 모든 치매 단계를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대소변 등 생리현상의 자율적 통제가 불가능해진 건 이미 아주 오래 전 이야기. 엄마는 아프다고 이마를 찡그리며 주위 사람들을 의심하고 화내는 ‘미운 치매’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기회에 ‘이쁘다, 고맙다, 감사하다, 사랑한다’ 칭찬하고 미소 짓는 ‘이쁜 치매’의 상태로 옮겨갔다.
막내인 나는 엄마가 가장 오랫동안 유일하게 알아보고 기억하는 사람으로 남는 기쁨을 누렸다. 내가 막내딸이라는 것도 알고 이름도 기억했지만 그 외의 모든 기억은 사라진 상태에서 엄마는 묻고 또 물었다. 결혼은 했니? 아이를 낳았니? 몇을 낳았니? 어디에서 사니? 남편 밥은 해주고 왔니? 나는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서 결혼을 했다고 말하기도 하고, 혼자 산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식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항상, 셋이 있다, 고 말하며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는 나의 가족들, 즉 요꼬(강아지 )와 토비, 꼬맹2(고양이) 사진을 보여준다. 내가, 이쁘지? 물어보면, 엄마는, 잘 생겼다, 말하며 웃는다. 아들 둘에 딸 하나라고 말하면, 똑 맞춰 잘 낳았네, 라고 좋아한다. 강아지와 고양이가 인간과 다른 종임을 엄마가 아는지 모르는지 나는 모른다. 꼬치꼬치 묻지 않는다. 인간 중심 생명체 이해의 편협함에서 벗어나 ‘내 자식들’을 좋아하고 만족하는 엄마가 매우 마음에 들 뿐이다.
인간과 다른 종 뿐 아니라 가끔은 남자와 여자의 구별도 엄마에게는 사라진다. 누가 뭐래도 천오백 프로 여자라고 할 수 있는 며느리를 보면서 ‘너가 여자냐? 남자냐?’ 묻는다. 그러면 나는 ‘생물학적 성도 젠더의 효과’라고 한 버틀러의 말을 떠올리며 웃는다.
이렇게 근본적인 지식들이 사라져도 호기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녀는 지금도 방 밖 거실에서 노래배우기 등 공동 프로그램이 진행되면 열린 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귀를 세운다. 호기심이 생명 일반의 특성임을 확인한다, 그래서. 가끔 요양보호사들이 그런 엄마를 휠체어에 태워 거실로 나가 프로그램을 구경할 수 있게 한다. 그 모습을 찍은 사진이 한 장 있다. 나는 그 사진을 엄마에게 보여주며 “엄마, 마음에 들어?” 물어보았다.
“이게 누구냐?” 엄마가 물었다.
“엄마잖아.”
“엄마?”
“응, 엄마야.”
“이게 내 엄마야?”
이렇게 해서 나는 한국어의 한계를 경험하기도 했다. 영어라면 I’t you, 독일어라면 Du bist es, 라고 하면 될 텐데, 한국어로 ‘이거 너잖아’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당신이에요, 어머니.’ - 이 말은 이제 그녀에겐 너무 어려운 말이 되어버렸고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사진 속 얼굴과 영원히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들 어떤가?
소통이란…치매 노년의 ‘스토리텔링’
매번 엄마를 만날 때마다 ‘그날의 문장’이 있다. 몇 시간이고 그 문장이 반복된다. ‘내 딸이래서가 아니라 정말 이쁘네. 코도 눈도 눈썹도 이뻐. 다 너무 이뻐’라거나 ‘오늘 나랑 같이 자고 내일 우리 집 가자. 내가 바닥에서 잘 테니 여기 침대에서 자’라거나 ‘내가 죽기 전에 너네 집 가서 살다가 죽으면 소원이 없겠는데’라거나. 나와 그녀가 함께 등장인물인 그 시간 그곳에서의 드라마는 이 반복되는 그녀의 문장과 그에 대한 나의 답 문장들로 이루어진다.
엄마의 문장은 동일하게 반복되지만 나의 대답은 여러 갈래로 변주된다, 내가 지치지만 않으면. 대부분 나는 1시간 정도 엄마의 문장을 토대로 나름 다양한 대화를 엄마와 나눈다. 적어도 두 번 정도는 나의 대답과 질문에 엄마가 응답하고 다시 본래의 문장으로 돌아가는 식으로 대화는 이어진다. 언어 능력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언어적 존재가 더 이상 아니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고양이나 개가 언어적 존재가 아니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치매가 극단적 상태에까지 이른 사람도 언어적 존재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고 나는 엄마와 함께 1시간씩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느낀다. 언어 능력에 대한 생각 자체를 바꿀 필요가 있는 것이다.
실제로 나만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게 아니다. 2006년 밀워크와 뉴욕의 요양센터에서 ‘치매노년들과 함께하는 스토리텔링’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A.D.Basting, 2006 "It's 1924 and somewhere in texas, two nuns are driving a backwards volkswagen: Storytelling with people with dementia") 치매 노년들이 둥근 원을 그리며 앉아 있고 이들에게 몇몇 단어나 문장이 적힌 카드가 제시된다. 누군가 한 사람이 느낌이나 아이디어를 전하면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잇는다.
이 조각보 이야기를 짜는데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바바바바”와 같은 의성어, 반복되지만 연결성은 없는 단어나 문장, 눈의 깜빡임까지 모두 구성요소가 된다. 인물의 동질성도 기승전결도 일관성도 없다. 그러나 한 편의 텍스트가 짜진다. 이 프로젝트는 언어/능력, 텍스트 등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진지하게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언어가 기본적으로 표현이라는 한 축과, 송신-수신으로 이루어지는 소통이라는 또 다른 축으로 이루어진다면 적어도 표현의 차원에서 우리는 치매노년의 언어 행위에 동참할 수 있을 것이다.
치매가 걸린 상태에서 어떤 경계적 삶을 산다는 것은 혼자 힘으로는 넘어설 수 없는 미세한 덫들의 포진과 매순간 대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이 이런 삶 또한 ‘저곳’이 아닌 ‘이곳’의 삶이라고 인정하고, 두렵다고 고개를 돌리는 대신 적절하게 관계하면 그 대결은 그렇게 어려운 것만은 아니지 않을까.
치매 걸린 엄마와 함께 20여년의 시간을 보내며, 엄마가 사는 요양원의 치매 걸린 다른 노년들을 보며 나는 자주 생각한다. 치매를 모르는 ‘의식’ 있는 사람들이 존재에 대해, 시간에 대해 지혜로운 안목을 지니게 되면 치매 걸린 사람들이 가리키는 시간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삶에 대한 지혜들이 보이기 시작하지 않을까. 치매에 대한 공포는 사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심 없고 진정한 교류가, 모멸감과 치욕을 걷어내 줄 그 관계가 사라진 지금의 우리네 삶에 기인하는 것일 수도 있다.
▲ 마츠이 히사코 감독의 영화 <소중한 사람> (2002)
일본에서 2002년 만들어진 영화 <소중한 사람>은 10년 동안 공동체 상영을 통해 200만 관객을 동원하고, 지금도 한 달에 두 세 번은 상영된다고 한다. 치매/에 걸린 사람에 대한 실질적 관심이 그만큼 크기 때문일 것이다. 알츠하이머 병을 앓고 있는 시어머니와 그녀를 돌보는 며느리가 겪는 갈등과 화해의 과정을 담고 있는 <소중한 사람>은 실제 경험을 기록한 간호일지에 토대를 둔 것이다.
마츠이 히사코 감독은 "마치 아이에게 말하듯 연신 웃으면서 부드럽게 리드하는 며느리와 그 며느리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는 시어머니,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이 내게는 너무나 아름답게 느껴져 스크린으로 옮길 것을 결심했다"고 한국 상영회 때 말했다. 영화는 이런 신뢰의 관계가 형성되기까지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어떤 불신과 불안, 오인을 지나왔는지 촘촘한 묘사로 성찰한다.
“죽어가면서 평화로울 수 있다면…”
82세 생일 날, ‘엄마 요즘은 장수하는 시대야. 나는 엄마가 좋으니까 90까지 살아 봅시다’라는 내 말에 ‘아이고 끔찍하다, 그런 말 하지도 마라, 자식들 고생시키게 그 무슨...’이라고 말했던 엄마는, 작년 어느 날 ‘나, 조금 더 살아도 될까? 여기서 사는 게 참 좋은데’라며 수줍게 양해를 구하듯 물었다. ‘엄마 행복해?’라는 나의 물음에 ‘응, 좋아. 다 좋아’라는 대답과 함께.
일제 식민지 시절 만주에서, 한국전쟁 전 북한에서, 그리고 1.4 후퇴 이후 남한에서 실향이주민으로 온갖 고생을 다 겪으며 살아왔던 엄마는 지금 가장 행복하고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죽어가면서 평화로울 수 있다면, 마침내 진짜 어려운 것, 즉 살아가는 것과 화해하는 일을 할 수 있다”던 모리의 말을 떠올린다. ‘의식’ 있는 모리가 한 말을 ‘치매’에 걸린 나의 엄마는 나날의 삶으로 살아내고 있다. 이들이 함께 전하는 지혜는 치매에 대한 공포의 해독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 여기에 실린 이 모든 이야기는 물론 실질적인 돌봄노동을 감당하는 사람들의 헌신이 있기에 가능하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김영옥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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