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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후차라 마타> 공연을 앞두고④ 생성의 성 정체성
공연창작집단 ‘뛰다’의 <바후차라 마타: Beyond Binary> 공연이 4월 5일(토)~20일(일)까지 서울 남산예술센터에서 열립니다. 남/녀 이분법에 갇히지 않는 성(性)에 대해 이야기할 이번 공연을 앞두고, 연극평론가이자 남산예술센터극장 드라마터그 조만수 교수(충북대 불문과)의 안내글을 싣습니다. –편집자 주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성을 발견하는 자’
▲ <바후차라 마타: Beyond Binary> 시연회. © 뛰다
하나의 존재로서 인간을 정의하는 다양한 방식 중에서 성(性)을 기준으로 인간을 규정할 때 이를 성적인 정체성이라 한다. 그런데 남성, 혹은 여성이라는 이원론적인 구분의 범주 밖으로 나갈 때 성적 정체성의 문제가 제기된다.
생물학적으로 정의되고, 사회적으로 규정된, 자신에게 당연하게 주어진 성적 정체성과 갈등 관계에 놓일 때, 그는 스스로를 어떻게 인식하고 또 타인은 그를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 호모섹슈얼리티로 정의되는 성적 정체성은 자아 속에 타자가 혼재될 때 발생한다. ‘나’ 혹은 ‘나로 규정된 바’와 그것의 외부로부터 이질적인 것으로 규정되는 것이 혼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 혼재성을 사유하는 여러 방식 중에서, 가장 기초적인 것은 누구도 실제로 전적으로 남성이거나 전적으로 여성은 아니라는 점을 지각하는 것이다. 아니마(anima, 남성들의 무의식에 내재된 여성성의 원형)/아니무스(animus, 여성의 무의식에 내재된 남성성의 원형)라는 대립은 남성/여성의 이원론을 ‘여성 속의 남성성’과 ‘남성 속의 여성성’으로 확장시킨다. 그러므로 확장된 개념 속에서 누구도 전적으로 동성애자이거나 전적으로 이성애자일 수 없고, 누구도 단일한 성으로 규정될 수 없다.
그런데 단지 주어진 성적 정체성과는 다른 성적 정체성을 선택하는 것이 아닌, 혹은 주어진 몸에서 다른 형태의 몸으로 전환하는 것이 아닌 것으로 이 혼재성을 확장하려고 하는 것이 들뢰즈적인 방식이다. 이것은 하나의 생식 기관을 지닌 몸으로부터 그것과 대립적으로 파악되는 생식 기관을 지닌 몸으로의 이동이 아니다.
들뢰즈에 따르면 “동성애자는 동일한 성으로 남으려는 자가 아니라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성들을 발견하는 자”이다. 자기 안에 n개의 성, n개의 타자를 알게 되는 자는 바로 n개의 성으로 스스로를 생성하는 자이다. 이는 n개의 유기체적인 변환이라기보다는, 성과 성 사이를 수없이 가로지르는 운동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성 정체성을 이와 같이 생성의 움직임으로 설명하면서 들뢰즈는 ‘되기’ 개념을 제시한다.
“연극에서 체험할 수 있는 건 어떤 순수한 힘들”
▲ 두 번째 창작레지던시 <바후차라 마타> © 뛰다
뛰다의 <바후차라마타> 공연에 앞서, 이 작품의 이해를 돕는 글에서 들뢰즈를 인용하고자 하는 것은 성 정체성에 대해 숙고할 때 들뢰즈의 사유가 유용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들뢰즈 자신이 소위 ‘드라마화’라는 방법론을 내세우면서 “철학 안에서 연극에 상응하는 놀라운 등가물”을 발견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는 연극적 실천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사유를 실현하는 ‘뛰다’의 방식을 견인하고 있다.
『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는 차이를 생산하는 반복적 운동으로서 연극의 본질을 정의한다. 들뢰즈는 재현의 연극을 개념에, 참된 연극을 운동성과 관계짓는다. 그에 따르면 “반복의 연극에서 체험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순수한 힘들이며 공간 안에서 용솟음치는 어떤 역동적인 궤적들”인 것이다. 개념 혹은 일반화가 아니라 순간을 개별화시키는 것, 그것이 연극의 본질이라고 들뢰즈는 생각하는 것이다.
매순간을 개별화시키는 이 운동적 궤적은 성적 정체성이라는 맥락으로 되돌아와 생각할 때 n개의 성이 되는 생성의 움직임과 동일한 것이며, 이는 극단 ‘뛰다’가 그들의 연극을 통해서 구현해야 할 움직임이기도 하다. 참된 연극을 만드는 것과 성적 정체성을 생성 속에서 사유하는 것은 들뢰즈에게서나 <뛰다>에게서나 동일한 것이다.
통계적이고 포괄적인 방식으로 규정되는 성적 정체성을 부정하고 다른 성을 향한 움직임 안에 놓일 때, 주체는 주어진 형식 혹은 형상으로서의 자신을 부정한다. 타자와 구별되는 개별성을 지우고, 자신 안에서 타자의 울림을 느끼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의 ‘얼굴’을 지워야 한다. 얼굴은 타인과 자신을 구분지음으로서 자신에게 하나의 정체성을 고착시키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얼굴을 지우는 것은 개체가 아닌 ‘무리’ 안에서 자신을 위치짓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를 ‘동물-되기’ 개념으로 설명한다. 한 마리의 동물을 우리는 일반적으로 개별성으로 환원하지 않는다. 동물의 무리, 동물들의 다양체는 얼굴없는 개별체들의 집합이다. 물론 이 집합의 가장자리에 예외적인 특이자가 존재한다. 고래의 무리와 모비딕의 관계처럼 무리와 이 특이자는 모순적 관계를 형성한다. 특이자는 다양체와 관련해서 어떤 위치를 지닌다. 이를 성적 정체성의 맥락에서 다시 생각해보자.
주어진 정체성으로 축소되지 않는, ‘얼굴 없는 무리’ 속에서 예외적인 위치를 지닌 특이자가 있다. 그는 남성 혹은 여성이라는 기관이 있는, 얼굴이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무리로서의 인간-동물의 일원이다. 그리고 그는 이 인간-동물들의 가장자리에서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생성한다. 계속되는 특이자의 발생과 그 위치의 집합이 하나의 선을 그린다. n개의 성을 이어가는 이 선은 바로 탈주선이다.
‘나’의 자리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 <바후차라 마타: Beyond Binary> 시연회. © 뛰다
생성의 성 정체성을 이해하기 유용한 또 다른 개념이 ‘여성-되기’이다. 들뢰즈는 ‘남성-되기’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것은 여성에서 남성으로의 성적 전환을 요구하는 욕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되기’는 항상 소수자를 향한 것이기 때문이다. 남성은 다수성을 구성하는 표준으로서의 얼굴을 갖는다. 남성, 어른, 백인 등의 얼굴은 기억, 그러므로 과거의 시간에 속하는 것이며, 생성을 구성하지 않는다.
여성-되기는 여성의 모습을 모방하거나 그 자태를 갖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선 중요한 것은 대립적인 유기체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로부터 훔친 몸체를 찾는 것이다. 여성의 어떤 얼굴, 여성의 성적 기관과 연결된 여성성의 통념화된 개념들이 여성의 몸을 훔쳐간 것이다. 이제 유기체적 기관이 없는 신체로서의 여성-되기가 문제인 것이다.
여성은 기관없는 신체 위에서 끊임없이 질주한다. 이 신체는 기관이 아닌 ‘분자’로 구성되는데, 이 분자 입자가 여성을 이루는 가장 기초적인 단위들이며, 기호학에서의 의미소와 유사한 것이다. 매우 부드럽지만 또한 견고하고 질기고 환원불가능하고, 길들일 수 없는 입자들이 여성을 생성한다.
무대 위에서 내가 말을 한다. ‘나’는 얼굴을 지닌 채, 기관을 지닌 채, 말을 한다. 내가 나의 자리에서 나의 성적 정체성에 대해서 말을 한다. 그러나 나는 오이디푸스적인 욕망을 말하고 있다. 생성의 성정체성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오늘의 자리에서는 이와 같은 ‘나’의 자리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내가 아닌 자리. 우리의 연극에서 그 자리는 우선 연극 안에서 주어진 배역의 자리이다. 하나의 배역에서 다른 하나의 배역으로 계속 옮겨가면서 나는 다른 이름 속에서, 나의 얼굴은 다른 얼굴들 속에서 부수어지고 파편화된다. 비인격화된 익명화된 주체의 중얼거림이 무대를 채운다. 연극은 현실적 자아가 실제로 말해낼 수 없는 것을 이와 같이 다르게 배치된 자리 속에서 말하게 해준다.
그리고 불현듯 익명화된 이름, 얼굴을 대체한 파편화된 다른 얼굴들 너머로 하나의 머리가 솟아오른다. 하나의 이름을 지니고 있지만 반드시 개인의 얼굴이 아닌, 그-혹은 그녀, 혹은 비인칭으로서 주체가 자신을 가두는 원의 밖으로 탈주선을 그리며 말한다. 그의 말은 그러므로, 특정한 개인의 말이 아니라, 익명의 집단 속에서 개체화된 말이며, 세상 모든 사람들의 말처럼 보편적인 말인 것이다. ▣ 조만수 (연극평론가) www.ildaro.com
※ <바후차라 마타> 공연 안내 http://bit.ly/1gV3lF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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