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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고 또 물어 길을 내는 사람
『나는 뜨겁게 보고 차갑게 쓴다』 저자 조이여울 인터뷰 (by 자야)
어떤 글은 재미를 주고, 어떤 글은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제공한다. 읽으면 가슴에 스며들어 오래도록 따스한 여운을 남기는 글이 있는가 하면, 한 방에 정수리를 내리치듯 간결하면서 힘 있는 문체로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글도 있다. 이런 글들은 모두 제 나름의 매력을 지니지만, 내 가슴에 진정 ‘좋은’ 글로 기억되는 것은 따로 있다. 단지 재미가 있다고 해서,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전달한다고 해서, 또 소소한 감동이 살아 있고 문체가 개성 있다고 해서 꼭 좋은 글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좋은 글이란 어떤 것인가, 하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작가 스스로 물음을 놓지 않고 독자에게도 물음을 품게 하는 글. 그리하여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 책 밖에서도 계속되게 만드는 글. 이 점에서 지난해 발간된 조이여울의 책 『나는 뜨겁게 보고 차갑게 쓴다』에 수록된 기사들은, 내게 매우 인상적이었을 뿐 아니라 두고두고 기억될 좋은 글로 남을 만했다.
‘성찰’의 그늘을 드리우기 위해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뜨겁게 보고 차갑게 쓴다』 저자 조이여울.
조이여울은 어떤 사안을 다루든 그에 관한 글을 쓰기에 앞서 ‘나는 누구고’ ‘어디에 서 있으며’ ‘왜 쓰려고 하는가’를 절실하게 묻는 사람이다. 이런 태도는 그의 글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친다. 사안에 밀착해 다가서면서도 그것을 바라보는 데 필요한 거리감은 잃지 않는다고 할까, 아니면 공감은 하되 치우치지 않는 균형감을 드러낸다고 할까.
덕분에 그의 글은 너무 뜨겁게 타오르거나 싸늘하게 식는 대신, 깊고 서늘한 사유와 성찰의 그늘을 스스로 품게 된다. 그리고 그 그늘 아래서 독자들 또한 글쓴이가 곳곳에 심어놓은 의미를 스스로 묻고 곱씹는 행운을 누릴 수 있다. 이를테면 나는 무엇을 알고 싶어 하고 또 알고 싶어 하지 않는가를. 내가 이해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진실에 가까운가를. 왜곡되고 은폐된 것들의 영향 아래서 나는 또 얼마만큼 자유로운가를.
세상 밖을 향해서만 날을 세우는 것이 아닌, 화살을 자기 자신에게 돌려 정직하게 묻게 만드는 조이여울의 글이 좀 더 많은 이들에게 읽히길 기대하던 중, 나는 그이의 책이 소리 없이 꾸준히 나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해를 넘기기 전에 2쇄를 찍었다는 반가운 얘기도.
- 2쇄 찍은 것 축하한다. 독자들의 반응이 어떤지 궁금하다.
“주변에 글을 쓰거나 책을 내본 사람들이 많아서 아무래도 그들의 반응을 먼저 듣게 되는데, 하는 얘기가 비슷하다. 내 입으로 말하긴 쑥스럽지만, 한마디로 글이 쉽게 읽히면서도 힘이 있다고들 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내 책을 보고 난 후 글쓰기에 회의를 느꼈다고…. (웃음)”
- 본인 글의 어떤 점이 그런 반응을 이끌어낸다고 보는가?
“나는 기자니까 당연히 글이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더군다나 이번 책은 내가 지난 13년간 발로 뛰어 취재한 내용을 주제별로 엮어서 풀어낸 것이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 때문에 독자들이 내 글을 통해 생생한 현장과 사람이 지닌 힘을 느끼고 발견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또 하나는, 오랜 시간 동안 저널리스트로 활동해 오면서 이제는 내가 다루는 사안과 그에 관한 나의 글을 스스로 객관화해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많은 이들이 내게 ‘왜 책을 이제야 냈느냐’고들 묻는데, 솔직히 나 스스로 보기엔 몇 년 전만 해도 지금과 같은 내적인 힘이 느껴지는 글을 쓰기엔 내공이 부족했다는 생각이 든다.”
- 자신의 글을 객관화해서 바라본다는 표현을 했는데, 그것이 어떤 경험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줄 수 있을까?
“2010년에서 2011년으로 넘어가던 즈음의 일이다. 고대 여성주의 교지 <석순> 편집부로부터 원고를 써 달라는 편지를 한 통 받았다. 당시 나는 일을 쉬면서 글을 전혀 쓰지 않고 있던 상태였지만, 학내 여성주의 매체에 대한 고민을 정성스럽게 써서 편지로 보내온 것에 마음이 움직였다. 그래서 나도 역시 편지로 답장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 과정에서 나의 글쓰기가 이전과는 뭔가 다르게 변하고 있음을 알았다. 과거에는 취재를 하든 글을 쓰든 그냥 앞만 보고 달리는 ‘활동’을 했다면, 그때는 내 안에서 그것들이 ‘언어’로 정리되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물론 그 전에도 나는 완성도 있는 기사가 나오기 위해서는 내가 쓰려는 대상에 가까이 다가가기도 했다가 또 조금 떨어져서 보기도 했다가, 그런 복합적인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확연하게 인식했다기보다 그냥 몸으로 느끼는 식이었다. 예를 들어 과거에 나는 글을 쓰려고 책상에 앉으면 갑자기 솟구치는 감정 때문에 눈물을 쏟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마다 폭풍 같은 그 시간이 지나가고 감정이 고요하고 맑아지길 기다렸는데, 돌이켜보면 그 경험을 통해 글쓰기에는 ‘그런 과정’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체득했던 것 같다. 다만 <석순>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는 그 과정에 객관화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저널리즘과 관련해 언어로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큰 차이다.”
- 이번 책에서 강조한 ‘성찰’이야말로 그 ‘객관화’에 꼭 필요한 덕목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성찰은 한 번 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성찰에 대한 재성찰이 계속해서 일어나야 한다. 이는 매우 의식적인 과정이며, 그런 점에서 과거에 글 쓰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난 성찰은 한계가 있었다고 본다. 반면 이제는 성찰이 왜 필요한지, 성찰이 반영된 글과 그렇지 않은 글이 어떻게 다른지를 알고 내 언어로 설명할 수 있으니 더 강조할 수밖에 없다. 흔히 선정적이라고 얘기되는 글들엔 성찰이 결여되어 있다. 그런 글은 쓰기도 쉽고 독자들의 호응도 즉각적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런 글쓰기로 빠진다. 다행히 나는 그에 대해 경계하는 태도를 유지해 왔고, 동시에 어떤 글을 쓸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과정을 거쳐 왔다. 그래서 새로운 저널리즘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저널리스트로서 다시 말하고픈 여성주의
▲ <나는 뜨겁게 보고 차갑게 쓴다>(부제: 세상과 사람과 미디어에 관한 조이여울 기록)
조이여울이 바깥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그에 대해 기록하는 자기 자신, 그리고 그 둘의 관계까지도 객관화와 성찰의 대상으로 삼으며 차근차근 다져온 새로운 저널리즘의 중심에는 <일다>가 있다. 그만큼 조이여울과 일다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착된 사이로, 그가 앞만 보고 내달리던 시기에는 <일다>에도 가쁘고 거친 숨소리와 뜨거운 열기가 가득했고, 그가 옆과 뒤까지 돌아보며 구석구석을 매만질 즈음엔 <일다> 역시 조금은 차분하고 넉넉해진 태도와 관조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만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태도와 시선에 깃든 에너지가 변했다고 해서 기본 관점이랄까 신조가 바뀐 것은 아니다. 조이여울과 <일다>는 여전히 ‘여성주의 저널리즘’으로 묶여 있고, 그 점에서는 오히려 전보다 더 ‘돈독해진’ 면이 있다. 현실은 변한 게 없는데, 아니, 심지어 정권이 바뀐 이후로는 전보다 더 안 좋아졌다고도 할 수 있는데, 저널리즘은 일명 ‘낚시질’과 ‘받아쓰기’로 스스로의 정통성과 권위를 깎아먹고 있고, 여성주의는 꽃도 피우기 전에 벌써 구시대의 고루한 유물쯤으로 취급되는 탓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이여울은 무엇보다 여성주의를 다시 말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 일을 다름 아닌 저널리즘을 통해 하길 원한다. 그러고 보면 그이가 여성주의 저널리스트로서 첫 책을 작년에 펴낸 것은, 그게 꼭 <일다>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고 해도 결과적으로는 <일다>가 걸어온 길에 박수를 보내고 앞으로 더 힘차게 비상할 것을 독려하는 가장 특별한 선물이었으리라 짐작된다.
- <일다>는 기존에 여성주의를 다뤄온 저널과는 좀 다른 인상을 주는데, 혹시 그런 얘기를 종종 듣는가?
“한국 사회에서 전형적인 여성주의로 얘기되어온 것과 일다는 분명 다른 점이 있다. 보통 여성주의 매체라고 하면 주로 직접적인 여성 문제만을 다루고, 다른 이슈를 이야기하더라도 남녀의 대립 구도라는 일정한 프레임 안에서 조망하는 경향이 강하다. 예를 들면 폭력을 다루더라도 성폭력과 가정폭력으로 한정시킨다든지, 이주민 문제도 한국인 남성과 국제결혼한 이주민 여성의 문제를 부각시킨다든지 하는 식이다. 그에 반해 <일다>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직접 몸으로 겪는 문제 외에도 생태환경, 근현대사의 이해, 동성애, 베트남의 사회적기업, 귀농귀촌, 공정여행 등 정말 많은 것에 관심을 보인다. 또 그것들을 남녀의 대립구도와 가부장제라는 프레임 안에 묶어두는 대신 좀 더 다각도로, 통합적으로 보려 한다.”
- <일다>가 만들어진 초기부터 그랬나?
“<일다> 초기에는 여성 정치세력화 논쟁이 한창이어서 그에 관해 주장하는 글을 주로 썼다. 그야말로 거침없이 내지르는 시기였다면 정확하다.(웃음) 당시에는 <일다> 전체적으로도 현실을 ‘봐주지 않는’ 센 글들이 많았다. 필진도 대부분 젊은 여성들이어서 유교주의 문화와 비혼, 사회에 만연한 가부장적인 관계와 권위주의 등이 주로 다뤄졌다. 그러다 몇 년 후 <일다> 내부적으로 정체성에 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여성운동을 하는 매체로 남을 것인지, 여성주의를 담은 저널리즘으로 갈 것인지가 논의의 핵심이었는데, 우리가 내린 결론은 후자였다. 그때부터 현장에 달라붙어 취재하는 것과,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기자의 역량을 키우는 것이 좀 더 중요해졌다고 보면 된다.”
- <일다>의 정체성 고민을 하면서 본인의 관심사도 더 넓어지고 다양해진 것인지?
“그렇다기보다는 <일다>의 정체성이 변화하고 본격적으로 현장에 뛰어들면서 많이 배웠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한 것 같다. 일례로 아동권에 대해 전부터 관심은 있었지만, ‘여성 어른보다 아이가 약자’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된 것은 그와 관련해 취재를 하고 기사를 쓰면서였다. 또 우리나라의 ‘에너지’ 문제가 중요하다고만 생각했지 잘 몰랐는데, 관련 기사를 기획하고 필자를 섭외하고 만나는 과정에서 정말 많이 배웠다.”
- 그러면 <일다>가 표방하는 여성주의란, 그 많고도 다양한 사안들에 대한 적절하고도 대안적인 관점을 다 포괄하는 것인지가 궁금하다.
“나는 그게 여성주의와 다르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사람들은 흔히 여성주의라고 하면 ‘여자’ 중심에 ‘비주류’ 정도로, 굉장히 편협하고 단순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지식인조차도 여성을 우대하는 것이 여성주의라는 식으로 사고한다. 하지만 나는 지금보다 조금 나은 대안적인 미래를 꿈꾸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여성주의라고 본다. 그러하기에 여성주의 관점에서 사회를 해석하고 다양한 정치 의제를 바라보고 정책을 세워나갈 때만, 이 무지막지하게 남성중심이고 가부장성이 강한 한국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 여성주의 저널리즘의 핵심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무어라 하겠는가?
“핵심은 객관성이다. 사실 어느 누구도 온전한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진 않고, 또 언론 그 자체가 객관적일 수 없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객관적일 수 없는 자신의 태생적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심지어 객관성을 가장하여 특정 세력의 입장을 대변함으로써 사실을 왜곡하고 진실을 은폐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언론과 언론인들이 보이는 가장 큰 문제가 아닐까 싶다.
이런 상황에서 독자는 단지 기사를 표면적으로 읽는 행위 이상의 것, 즉 글에 숨겨진 의도를 적극 파악하고, 나아가 그 글이 생산되기까지의 과정에도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직접 객관성과 진실성 여부를 판단할 것을 요구받는다. 나는 이런 독자들이 많아지는 것을 환영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언론 스스로 기사의 기획 의도와 취재 과정과 기자의 관점 등, 하나의 기사가 완성된 형태로 나오기까지의 총체적인 과정을 집요하게 파고들면서 윤리를 묻는 것이라 생각한다. 한마디로 객관성에 대해 끝까지 회의하고 성찰해야 한다는 얘기고,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여성주의 저널리즘이다.”
- 위의 말은, ‘한국사회와 언론이 너무나 남성 위주로 굴러가고 있기에 진정한 의미의 객관성이 침해되고 있다’는 주장으로 들린다.
“그렇다고 볼 수 있다. 단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언론인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할 만한 중견급 기자란 보통 40대 초중반의 남성에, 좋은 학벌과 인맥을 지닌 부류로 획일화되어 있다. 그들은 자신이 성장해 온 환경과 문화와 동떨어져 사고할 수 없고, 그 점에서 하나의 단단한 세계에 갇혀 있다고 봐도 무리는 아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어떻게 해야 자신과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과, 그가 처한 환경과 처지를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다른 세계로 찾아가서 그곳에 사는 이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또 그에 비추어 스스로를 성찰하지 않고도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여성주의 저널리즘은 기자 스스로에게 ‘내가 누구인지’ 묻게 하고, ‘기록하려는 자와 기록되는 대상의 관계’를 끊임없이 묻게 한다. 바로 그 점에서 다른 세계에 대한 경청과 성찰과 사유가 가능하도록 도울 수 있고, 결과적으로 조금 더 솔직하고 정직한 기사, 고민이 많이 담긴 기사를 쓰게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떡잎부터 달랐던 한 여자아이의 성장담
<일다>를 통해 여성주의 저널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고 있지만, 사실 조이여울은 그 전부터 이미 여성주의자였고 또 저널리스트였다. 그이는 <일다>에 앞서 여성신문 기자로 일한 전력이 있고, 그보다 더 이전, 우리 사회가 한창 ‘피씨통신’의 향연에 빠져 있던 시기에는 나우누리 미즈에서 페미니스트 논객으로 필력을 발휘했다. 또한 대학에서는 여성위원회에서 활동하며 <3차성징> 등의 학내 잡지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면 어린 시절에는 어땠을까. 또래보다 결코 몸집이 크지는 않았을, 어쩌면 더 작고 여렸을지 모를 한 여자아이가 보고 듣고 생각하고 꿈꾼 세상은 과연 어떠했을까. 나는 그게 궁금했다.
- 어떤 아이였나? 왠지 그때부터 페미니스트의 기질이 엿보였을 것 같은데.(웃음)
“어릴 때부터 이 세상에 분노가 많았다. 아이의 작은 눈으로 보기에도 말 안 되는 차별이 너무 많았던 거다. 일례로 우리 때만 해도 학교에서 반장은 남자가, 부반장은 여자가 하는 걸로 돼 있었다. 나는 머리가 커갈수록 남녀차별을 비롯해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온몸으로 반항하기 시작했다. 다니던 중학교에서 단발령을 내렸을 때 끝까지 머리를 안 자른 사람이 나다.(웃음) 또 어느 남자 교사가 여자 교사를 성희롱한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수업 시간마다 그 가해자 교사와 심한 기 싸움을 벌였다. 고등학생 때는 학교의 반대를 무릅쓰면서 동아리 활동을 하고, 연극 공연도 올렸다.”
- 그러니까 요즘말로 ‘개념 꽉 찬’ 반항아였던 건가?
“뭐, 그럴 수도 있겠다.(웃음)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개념이 있었다기보다 겁이 없었던 것 같다. 말 안 되는 건 못 참고, 있는 대로 성질부리고,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살았으니까.”
-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아이의 경우 일단 집에서 제재를 받지 않나?
“다행히 우리 집에서는 내가 틀에 박힌 대로 살 수 없는 아이라는 걸 일찍부터 알고 인정해 주었다. 돌아보면 부모님이 그처럼 아무 조건 없이 나를 인정하고 받아주고 믿어준 것이 내 인생에 아주 큰 힘이 된 것 같다. 그 덕분에 어떤 상황에서도 나 스스로를 보호하고 지킬 수 있는 자존감과 믿음을 키울 수 있었으니까.”
- 여성운동은 대학생 때 시작한 것인가?
“대학에 와서 여러 책을 보면서, 나보다 앞서 나와 같은 고민을 한 사람이 많다는 것에 위로를 받았고 희망을 느꼈다. 또한 한 명의 여자로 세상에 묻혀 살기보다, 나도 그들처럼 사회에 나가 맘껏 지르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확고하게 다지는 계기가 됐다. 그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여성운동에 눈을 떠 기존의 학생회와는 다른 ‘여성위원회’라는 자치조직에서 일을 했다. 그때 선후배들과 함께 벌였던 활동으로 고대생의 집단 난동 사건을 여성 공간 침탈로 보고 성폭력 담론으로 이슈화한 것,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단지 민족적 관점으로서가 아닌 전쟁에서 여성이 처하는 위치의 문제로 바라봐야 한다고 새로운 담론을 제기한 것 등이 기억에 남는다. 또 2차성징을 뛰어넘는 의식의 각성을 이루자는 의미에서 <3차성징>이라는 제목의 학내 잡지를 발행한 것도 재미있었다.”
조이여울의 어린 시절과 성장담을 듣다 보면 작은 나무 한 그루가 떠오른다. 다들 세상이 미리 정해놓은 방향으로 뿌리를 뻗고 가지를 드리울 때, 어떻게든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기준과 원칙을 만들고 그것을 씩씩하게 지켜가려는 나무. 세월이 흘러 그 나무는 어느새 둥치 굵은 아름드리나무가 되었지만, 변하지 않은 게 하나 있다. 여성주의자로, 또 저널리스트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한 후에도, 그이는 여전히 정해진 방향을 그대로 따라가기보다 스스로 납득하고 이해할 때까지 세상과 관계 맺고 대화하길 주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그가 지난 세월 동안 답을 가지려 집착하는 대신, 끝없이 자기 안에서 물음을 만들고 키워 왔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 여성주의자로 활동하면서 처음 맞닥뜨린 고민은 무엇이었나?
“대학에 와서 무엇보다 놀라고 실망한 것은 비슷한 학벌끼리 모인다는 점, 이른바 운동을 하고 여성운동을 한다는 사람들도 다를 게 없다는 점이었다. 또 농활을 가서는 서울과 다른 지역 간의 경제적 문화적 차이가 엄청나게 크다는 것에 놀랐다. 이 두 가지 사례는 내게 사람과 사람이 소통하고 연대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고민하게 했다. 그 하나는 어떤 사람을 알고 이해하려면 그가 자라온 환경과 문화적 맥락 안에서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 다른 하나는 나 스스로 학벌과 지연 등의 꼬리표에 갇혀 있지 않으려면 부단한 성찰이 요구된다는 것이었다.”
- 그 두 가지 고민의 연장선에서 소수자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게 된 것인가?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분열과 소외감, 또 구조적인 차별을 극복하려면 비주류와 소수자 집단에 당연히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이, 나는 그들이 소수자이기에 갖는 독특한 문화와 장점이 있고 그것이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대안문화 혹은 정치담론을 제시할 수도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소외계층으로서의 여성은 주류 남성보다 훨씬 덜 경쟁적인 대신 돌봄의 기질은 더 많이 지니고 있다. 또 장애인과 동성애자와 이주민은 소수자 그룹이 갖는 배타성도 보이지만, 그들 나름의 배려의 철학이랄까 윤리 같은 것을 체화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 점을 문화와 삶의 정치로 끌어들여 적용하면, 더 많은 이에게 유익한 새로운 대안을 탄생시킬 가능성이 커질 거라 생각한다.”
- 대립과 갈등이 난무한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기사를 쓰다 보면, 자칫 이 거칠고 부박한 현실에 대한 환멸이나 냉소에 빠질 수도 있는데 그런 경험은 없는가?
“사람들이 이권에 따라 어떻게 움직이고 대응하는지를 알게 되면서 놀라고 당황한 적은 많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이 세계라는 것을 받아들이니 마음이 오히려 편해졌고, 세상에 대한 환멸이나 냉소에 빠지기보다는 ‘제대로 취재하고 기록하기 위해 정신을 바싹 차려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내게는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믿음이 있다. 누구라도 자신에게 가장 좋은 길을 선택할 수 있다는 믿음 말이다. 그러니까 내가 어떤 사람을 믿는다고 하면, 그의 말과 행동을 믿는다기보다 그가 내면에 지니고 있는 궁극적인 힘과 선함 같은 것을 믿는다는 얘기다.”
- 그래도 요즘처럼 많은 것이 퇴보하는 듯 보이는 상황에서는 고민이 많을 것 같다.
“물론이다. 내가 가진 믿음은 ‘세상이 이렇게 바뀔 거야’ 라고 보는 낙관이나 희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에, 분노도 하고 한숨도 쉬고 머리가 깨져라 고민도 한다. 하지만 나는 혁명이나 개혁을 통해 뭔가 빠르게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놓은 지 이미 오래됐다. 또한 이것이 대안이라고 주장하며 사람들을 끌고 가는 식의 운동이 아닌, 이미 그 길에 접속해서 살아가는 이들을 조명하면서 지혜와 희망을 발견하는 활동을 해왔기에 좌절감이 훨씬 덜한 것 같다.”
쉴 새 없이 달려온 삶에 쉼표를 찍다
▲ 작년 12월 21일 부산 인문학 카페 <헤세이티> “기록과 미디어”에 관해 강의 중인 조이여울 기자.
지난 세월 동안 조이여울의 생각과 글과 일에 많은 변화가 있었듯, 최근 그이는 먹고 쉬고 자는 일상의 영역에도 잔잔하지만 따스한 바람이 불고 있음을 경험하고 있다. 재작년 여름, 거주지를 서울에서 경북 함창으로 옮긴 것이 그 계기다.
룸메이트와 함께 함창에서 카페 <버스정류장>을 운영하는 박계해 선생님을 인터뷰하러 내려간 길. 시골의 한적한 정취가 살아 있으면서도 너무 고립되고 외지지 않은 그 마을에 반해 살 곳을 물색했고, 마침 초등학교 뒤편 비탈진 언덕에 서 있는 전망 좋고 햇살 밝은 집이 비어 있는 것을 알고는 덜컥 계약까지 하고 말았다.
귀촌의 과정은 이렇듯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치러졌고, 그 후에도 한동안은 집을 고치고 정리하고 손님맞이를 하느라 분주했다. 그러나 귀촌 생활 2년차에 접어들어 서서히 생활이 안정기에 들어간 지금, 최소한 그 집에서만은 한없이 나른하고 고요한 시간을 누리고 있다. 서울에서 정신없이 뛰어다니다가도 그 집에 들어서면 몸과 마음에 쉼표가 찍히는 것.
- 2년 전 서울을 떠나 시골 읍으로 이사를 했는데 어떤가?
“집을 시골로 옮기면서 가장 좋은 것은 진정한 ‘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서울에서 출발할 때부터 마음이 설레기 시작하고, 집에 도착하면 안도감이 든다. 일로 점철된 바깥생활에서 한 발 비껴나는 기분이랄까. 또 가장 크게는 ‘먹는 것’이 바뀌었다. 서울에서는 조미료에 질려 더이상 못 먹을 정도가 될 때까지 사 먹었는데, 여기서는 작은 텃밭이나마 거기서 난 것을 주로 먹으니 식탁이 훨씬 건강해졌다. 마당이 있어 빨래를 햇살에 말릴 수 있다는 것, 마당을 오가는 길고양이가 새끼를 배고 낳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는 것, 집 앞 닥나무에서 잎이 돋고 지는 것을 보면서 계절의 변화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는 것도 내 삶에 생동감을 주는 더없이 좋은 장점들이다.
이건 좀 다른 차원의 이야기지만, 이제야 비로소 서울 중심에서 벗어나 모든 지역을 동일하게 바라보게 되었다는 것도 의미 있는 변화라 하겠다. 전에도 물론 그런 생각이 올바르다고 여기기는 했으나, 서울에 살면서 진심으로 그렇게 사고하기란 대단히 어려웠다. 그런데 몸이 서울을 떠나니 사고하는 패러다임이 자연스럽게 바뀌더라. 그 결과 지금은 함창이든 부산이든 서울이든, 그저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곳을 중심 삼아 활동할 수 있게 됐다.”
- 그러면 이제 살림에도 취미를 좀 붙인 건가?
“전혀 아니다.(웃음) 사실 나는 생활적인 면만 보면 자립의 능력이 한참 모자란 사람이다. 그나마 시골에 살면서 그런 점에 하나둘 눈을 뜨고 있고 내 손으로 직접 해보려고 노력도 하지만, 아직은 익숙하지 않다. 더군다나 공적인 일이 아닌 일상에서 드러나는 내 캐릭터는 방만하고 허술하기 짝이 없어, 뭘 찬찬히 못하고 덤벙댄다. 오죽하면 텃밭에 작물을 가꾸는 것은 고사하고 남이 심어놓은 것을 밟지나 말라는 말을 들을 정도다.”
- 그건 마치 ‘내게도 반전매력이 있다’는 말로 들린다.(웃음) 하지만 여전히 완벽한 일 중독자처럼 보이긴 한다.
“일을 할 때, 그리고 그 일을 제대로 해낼 때 가장 행복한 것은 맞다. 다만 그 행복을 지속적으로, 더 온전한 형태로 누리려면 일에서 한 발 떨어져 쉴 때도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활자 안팎에서 함께 배우고 성장하는 행복
인터뷰가 얼추 끝나갈 무렵. 2014년에 <일다>에서 다루고 싶은 사안을 묻자, 그는 북한 문화 전반에 대해 다룰 필자를 이미 섭외했다는 소식과 20대 여성들이 자신의 노동 경험을 이야기하고 나눌 수 있게 장을 마련하려 한다는 계획을 전했다. 또한 이주민 문제도 꼭 한 번 다뤄보고픈 사안이라며 이렇게 덧붙였다. 올해는 기존처럼 이주민 여성의 국제결혼을 위주로 조명하는 대신, 인종 문제의 관점에서 더 깊숙이 들어가 파헤쳐보고 싶다고. 그것을 계기로 우리 모두가 얼마나 폐쇄적이고 ‘다름’을 받아들이는 것에 취약한지 깨우칠 수 있으면 좋겠다고.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조이여울이란 사람의 글 앞에서는 왜 마음을 놓을 수 없고 늘 얼마간은 불편할 수밖에 없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건 바로 ‘이 정도면 됐다’는 자기만족에 안주할 수 없게 만드는 집요한 물음 때문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처럼 아픈 물음을 던져주는 사람이 있고 글이 있어 우리의 무의식에까지 뿌리 내린 폐쇄성의 빗장이 조금은 헐거워진다면, 그래서 진실을 향해 조금 더 열려 있을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독자가 누릴 수 있는 최대의 행복이 아닐까.
그리고 이런 상상도 해본다. 그 행복을 맛본 독자들이 활자에 갇혀 있는 대신 책 밖으로 튀어나가 삶의 현장 곳곳에서 사유와 성찰의 꽃을 피우며 함께 배우고 성장할 수 있다면, 조이여울 또한 지금보다 더 많이 행복할 수 있을 거라는. ▣ 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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