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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르타뉴에서 보낸 편지> 25. ‘몽타뉴 누와르’ 산악지역에 가다 
 
‘교육일기’와 ‘하늘을 나는 교실’의 필자 정인진 님이 프랑스의 서북부 브르타뉴 지방에서 머물면서 보고 느낀 것들을 기록한 ‘브르타뉴에서 보낸 편지’가 연재됩니다. www.ildaro.com 

 

 

이번에 우리는 브르타뉴 내륙 깊숙히 들어가기로 했다. 그것은 순전히 친구의 소망 때문이었다. 산을 좋아하는 그녀는 브르타뉴 중앙, 산악 지역을 늘 가고 싶어했다. 브르타뉴에는 크게 두 군데 산악 지역이 있다. 피니스테르에 있는 ‘몽다레’(Mont d’Arree)와 모르비앙에 있는 ‘몽타뉴 누와르’(Montagnes Noires) 지역이다.

 

산악 지역이라고 해봐야 그저 야트막한 구릉이지만, 워낙 평원이 많은 부르타뉴에서는 그 정도도 꽤 산악 느낌을 주는 것 같다. 이번 체류 기간에 ‘몽다레’ 지역은 가보지 못했다. 브르타뉴에서도 너무 외진 그곳은 대중교통이 발달되어있지 않아, 시간을 많이 내지 않고는 접근하기 쉽지 않았다. 아쉽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고, 비교적 접근이 쉬운 ‘몽타뉴 누와르’ 지역의 ‘르 파우에트’(Le Faoet)를 찾은 건 지난 8월이었다. 산악 지역의 위용을 드러내듯 그곳은 여름이라도 제법 서늘했다.

 

모르비앙과 피니스테르의 경계에 ‘파우에트’ 지역이 있고, 그 중심에 ‘르 파우에트’가 자리해 있다. 지역의 중심 도시라지만 ‘르 파우에트’는 다른 도시와 비교해 작은 읍내 정도 규모였다. 볼거리라고는 시내 한가운데에 있는 ‘레 알’(Les halles: 중앙시장) 정도가 다였다. 이 시장 건물은 1542년에 세워진 것으로,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인근 주민들이 장을 보기 위해 모여드는 곳이다. 53m*19m 규모의 아르두와즈 돌편 지붕이 높고 깊게 얹혀져 있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긴 했다.

 

19C 브르타뉴에서 활동했던 여성예술가들
 

<1850~1950년의 브르타뉴 여성예술가들> 전시 포스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르 파우에트’를 찾은 건 그 즈음 이곳 ‘르 파우에트 미술관’에서 <1850~1950년의 브르타뉴 여성예술가들>이라는 제목으로 전시회가 열린 까닭이었다.

 

옛날 소녀들의 교육을 담당했던 ‘위르쉴린(Ursulines) 수녀원’이 지금은 미술관으로 쓰이고 있다. 1658년에 설립된 이 미술관에는 과거 브르타뉴에 머물면서 그림을 그린 프랑스와 외국의 여성화가 작품들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중에서도 이번 전시는 1850~1950년 사이, 100년 동안 브르타뉴의 사람들과 풍습, 자연 경관을 화폭에 담았던 여성화가들의 작품전이었다.

 

여성들에게 쉽게 허락되지 않았던 예술 교육을 남성들과 공평하게 받을 수 있도록, 길고 끈질긴 투쟁을 벌인 시기가 있었다. 그리고 여성예술가들은 작품을 전시하고, 대중들에게 알리고, 비평을 통해 재인식되도록 활동을 시작한다. 그 결과, 1850~1950년 사이에는 여성예술가들의 활발한 활동이 이어졌다. 그녀들은 대중들에게 더 많이 알려지고, 다양하고 개성있는 작품들을 발표했다.

 

이번 ‘르 파우에트 미술관’의 전시회는 바로 이들에게 헌사된 것이었다. 당시 브르타뉴에서 활동했던 여성예술가들 중 80명이 넘는 작가들의 170여편의 작품들이 전시되었다. 그림은 물론, 조각, 도자기, 장식품등 다양한 영역의 예술품들이 소개되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들은 아니지만, 나는 이 전시회를 둘러보면서 작가가 작품 속에 담겨 있는 인물들을 대하는 시선이 매우 따뜻한 데에 놀랐다. 그 당시 많은 유명 남성화가들이 모델을 성적 대상이나 흥미거리로 에로틱하게 표현했던 것과 비교해, 그녀들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소박하고 단정한 모습들이었다. 책을 읽고, 아이를 돌보고, 일하는 여성들의 모습들 속에서 당시 브르타뉴 여성들의 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하며 전시된 작품들을 둘러보았는데, 내 느낌이 틀리지 않았다. ‘그녀들은 브르타뉴의 여성들의 삶을 과장하지 않고 담담하게 표현했다’는 설명을 만날 수 있었다. 특히, 젊은 여성들만 모델로 쓴 것이 아니라, 나이든 여성들도 연민이 아닌 담담한 시선으로 많이 그렸다. 그녀들의 그림은 브르타뉴의 당시 의상과 생활 풍습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한다.

 

바르브 성녀에 얽힌 이야기

 

미술관을 나와, 우리가 향한 곳은 ‘몽타뉴 누와르’ 깊숙히 자리한 ‘생트-바르브 예배당’(La chapelle Sainte-Barbe)이었다. 이 예배당는 ‘르 파우에트’ 시내에서 걸어서 약 30분 정도 걸리는데, 오솔길을 지나 산길을 조금 올라가면 된다. 산길이라지만 야트막한 비탈길이다. 우리 나라에서 산 속 깊숙히 위치해 있는 사찰들을 수없이 다녀본 터라, ‘생트-바르브 예배당’으로 가는 길은 전혀 힘들지 않았다.
 

▲ 산 속에 위치한 ‘생트-바르브 예배당’  전경.  매우 작은 터전 위에 자리잡고 있다.  © 정인진

 

브르타뉴에서는 물론 프랑스에서조차 산속에 외따로 성당을 짓는 일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어서, 이 예배당은 유명하다. 특히 예배당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파르동’ 행렬은 브르타뉴에서 명성높은 종교 행사다. 또, 종탑이 건물과 분리되어 따로 있는 것도, 예배당에 접근하기 위해 지나야 하는 깊은 돌계단도, 모두 성스럽고 신비스러운 인상을 주었다.

 

예배당은 매우 작은 터전 위에 자리잡고 있다. 바르브 성녀의 이름을 딴 예배당답게 내부에는 그녀의 삶이 스테인글라스로 장식된 창문들이 있고, 성녀의 조각도 마련되어 있었다.

 

바르브 성녀는 불과 사고, 돌연사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한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 그녀는 소방관, 광부, 해병, 포병의 수호성인이다. 약 3세기에 살았던 바르브 성녀는 터어키 출신의 이교도였다. 그녀는 기독교로 개종하는데, 아버지가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과 결혼을 시키려고 하자 이에 완강하게 저항했다고 한다. 분노한 아버지는 망치로 딸을 때리고, 부서진 유리조각들 위에 굴리고, 이어 소금 위에 굴리는 등의 고문을 가한다. 그래도 의지를 꺾지 않자, 분노에 찬 그는 마침내 딸을 참수하고 만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16세였다. 이 순간 아버지는 하늘에서 떨어진 벼락에 맞아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고 한다. 서양에서 ‘바바라’라는 여자 이름은 바로 이 바르브 성녀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 ‘생트-바르브 예배당’ 내에 있는 바브르 성녀 조각상.  그녀에 얽힌 이야기 속에서 오늘날도 자행되고 있는 명예살인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 정인진 
 
나는 1,800년 전 바르브 성녀의 이야기 속에서 오늘날도 여전히 많은 국가의 여성들에게 자행되고 있고 ‘명예살인’의 흔적을 본다. 아버지나 남자 형제들이 가문을 치욕스럽게 한 행동을 했다고 여성들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있지만, 벌을 받은 남성은 거의 없다는 외신을 읽은 적이 있는데, 바르브 성녀 역시 이런 관습의 희생자가 아니었나 싶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저항한 어린 소녀의 삶을 생각하니, 엄숙하고 숙연해졌다.

 

우리는 바르브 예배당이 위치한 엘레 계곡을 따라 나있는 산책로를 돌아가는 길로 택했다. 이 길은 산티아고 꽁포스텔라로 향하는 순례길의 일부이기도 하다. 산책로에는 산티아고 꽁포스텔라 순례길을 상징하는 조개가 그려진 안내판들이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또한 이 산길은 나무들마다 두텁게 이끼가 끼어 있는 점이 다르기는 했지만, 한국의 산길을 떠오르게 했다. 이 길은 생-피앙크르(Saint-Fiancre)읍을 거쳐, 다시 ‘르 파우에트’ 시내로 이어져 있다.

 

산골마을 민박집 ‘초록 바이올린’ 주인 혜정씨

 

엘레 계곡을 내려와 나무 조각품들이 돋보이는 ‘생-피앙크르’ 예배당을 들렀다가 ‘르 파우에트’ 시내에 다시 도착한 것은 늦은 오후, 저녁 때가 다 되어서였다. 두 개밖에 안되는 시내의 호텔은 모두 만원이라, 그 날은 특별히 근처 민박집에 예약해 놓았다. 관광안내소로부터 이 민박집까지는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는 없지만, 약 4km 정도 거리에 있다는 정보를 받아놓은 터라, 걸어가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별로 걱정하지 않고 간단하게 저녁식사를 마쳤다.

 

그리고 민박집에 가는 길을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전화를 했는데, 시내에서 결코 걸어서 올 수

없는 먼 거리라며, 직접 데리러 오겠다는 것이 아닌가? 황당한 상황에 놀랐지만, 직접 우리를 데리러 오겠다는 친절함에는 더 놀라며, 민박집 주인 아저씨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도착한 그의 차에 오르기가 무섭게 중년의 백인 남성이 우리에게 “안녕하세요?”라고 한국말로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브르타뉴를 여행하면서 우리를 보고 ‘한국인을 처음 봤다’고 하는 사람들도 심심치 않게 만났던 터라, 한국말로 인사를 하는 사람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자기 부인이 한국인이라고 했다. 그의 부인은 예약한 우리 이름을 보고 한국인이 분명해 보인다며, 특별히 한국 요리까지 해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 민박집은 결코 걸어서 갈만한 거리가 아니었다.

 

그렇게 ‘몽타뉴 누와르’ 깊숙히 위치한 산골 마을의 ‘초록 바이올린’(le Violon vert)이라는 식당을 겸한 민박집에서 정혜정(43세)씨를 만났다. 그의 남편 ‘드니 포쥬롱’(48세, Denis Faugeron)과는 리용에서 유학할 때 만나, 1996년에 결혼을 하고 2년간 한국에서 살기도 했다고 한다. 프랑스로 다시 돌아온 것은 1998년 IMF 구제금융 위기 때문이었다. 공무원인 드니를 따라 브르타뉴로 이사한 지는 6년, 르 파우에트에서 ‘초록 바이올린’을 운영한 지는 3년이 되었다고 했다. 

▲  ‘초록 바이올린’의 정혜정씨와 드니 포쥬롱 부부   © 정인진 
 
불어를 전공했지만, 요리에 관심이 많은 혜정씨는 주말마다 스스로 연구한 세계 각국의 요리를 선보이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한국 요리가 인기가 많아 한국 요리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손님들도 제법 많다며 요리 솜씨를 뽑내기도 했는데, 말한대로 그녀의 솜씨는 정말 훌륭했다. 게다가 넓은 텃밭에서 직접 유기농으로 가꾼 야채들을 이용해 건강하고 신선한 요리를 준비한다고 한다. 그 말에 나는 짐가방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뜰을 구경하고 싶다고 했다.

 

우리가 안내받은 텃밭에는 싱싱하고 다양한 채소들이 자라고 있었다. 무엇보다 한국의 깻잎들이 엄청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데에 무척 놀랐다. 남편도, 아이들도 모두 깻잎절임을 너무 좋아한다고 했다. ’초록 바이올린’ 뜰에 펼쳐진 너른 들깨밭을 보자, ‘혜정씨에겐 저게 조국이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변변한 문화 시설이 없는 산골마을에서 ‘초록 바이올린’은 주민들에게 식당이기도 하지만, 이벤트를 즐길 수 있는 문화 시설과 쉼터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장소 같았다. 근처의 예술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판매되기도 하고, 음악회가 열리고, 각종 축하 행사들이 펼쳐지는 곳도 바로 이곳이다.

 

혜정씨는 암 투병을 하다가 2년 전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상실감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그저 지나는 길에 하룻밤 머문 우리를 보고 “산골에 외떨어져 살고 있는 제가 외로울까봐 어머니께서 두분을 보내셨나봐요!”라고 수줍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도, 동포에 대한 그리움도 모두 읽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이튿날 다음 여정지까지 우리를 데려다 주고, 직접 키워 만든 깻잎절임 한 통도 손에 쥐어 주었다. 너무 과분한 대접이었다.

 

모처럼 한국사람들로 집안이 시끌벅적해지자, 흥이 난 네다섯살 되었을 혜정씨의 딸 ‘슬아’는 한국말로 밤늦게까지 재잘거렸다. 그러다 이른 아침, 온 식구와 자동차를 타고 놀러가는 줄 알고 좋아라 했던 아이는, 차를 멈추고 ‘이제 이모들과 인사를 하자’는 뜻밖의 말에 완전히 놀라면서 풀 죽어, 쉬이 뒤돌아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슬아와 혜정씨를 뒤로 하고 우리는 ‘르 파우에트’를 떠났다.

 

혜정씨 말대로 우리는 그녀 어머니를 따라 그곳까지 갔는지도 모르겠다. 그녀를 만나러 ‘르 파우에트’에 갔었나보다하는 생각을 돌아와서도 내내 했다. 겨울이 긴 그곳 ‘몽타뉴 누와르’, 이국 땅에서 혜정씨의 겨울이 너무 춥지 않았으면 좋겠다.  ▣ 정인진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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