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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과 민주주의] ‘4대악 근절’ 캠페인이 허망한 이유    
 
※ ‘성폭력과 민주주의’에 대해 <꽃을 던지고 싶다 -아동성폭력 피해자로 산다는 것>의 저자 너울 님이 기고한 글입니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성폭력 예방교육은 곧 민주주의 교육이다
 
성폭력은 어른이 아이에게, 힘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에게, 권력이 있는 사람이 권력이 없는 사람에게,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저지르는 성적 폭력입니다. 성폭력을 ‘약자에 대한 폭력’이라고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현실을 반영한 말입니다.
 
성폭력에 대해 발언하고 글을 쓰는 저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성폭력 예방교육을 할 때, 인권이 바탕이 되는 민주주의 방식의 교육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약자, 혹은 소수자의 의견이 다수의 의견에 묵살되는 경험을 하지 않도록, 교육을 받는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말에 모두가 귀를 기울이는 규칙을 정하거나, 힘이나 지식으로 이길 수 있는 게임을 하지 않고, 모두에게 발언권을 주되 강요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하고자 합니다.
 
때로는 무질서해 보이고, 많은 것을 설명하지 못하더라도, 그 시간이 쌓이다 보면 약자에 대해 배려하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약자에 대해 배려하는 사람은 성폭력을 저지르거나, 자신의 힘이나 권력을 이용해 타인을 억압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똑같은 말이나 행동도 타인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따라서, 혹은 같은 사람일지라도 맥락과 상황에 따라서, 성폭력인 경우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설명하다 보면 ‘관계’와 ‘권력’에 대해 설명해야만 합니다. 그러다 보면 성폭력 예방교육은 결국 민주주의 교육과 흡사해집니다.
 
우리 사회에서 성폭력 피해여성들이 여전히 지지를 받기 어려운 것은, 차이와 맥락에 따라 다르게 구성되는 성폭력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부족한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발달하고 약자에 대한 폭력이 사라지기를 희망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약자에 대한 폭력에 민감하지 않은 사회에서는, 누구든지 약자의 위치에 설 때 성폭력 피해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많은 성폭력 피해생존자들이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꿈꾸며, 약자의 편에 서고자 합니다.
 
침묵을 강요하고 약자를 위협하는 사회에서

▲박근혜 정부는 성폭력, 가정폭력, 학교폭력, 불량식품을 4대악으로 규정하고, 근절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4대악신고센터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여성대통령이 되었으니 적어도 성폭력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지 않겠느냐’고 기대한, 어떤 생존자 분의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박근혜 정부는 성폭력을 4대악으로 규정하고, 성폭력 근절을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은 저에게는 허상처럼 느껴집니다. 그 이유는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밀양 송전탑 건설을 둘러싼 상황을 보아도 그러하고 국정원의 선거 개입 문제도 그러합니다. 정부가 통합진보당 해산심판을 청구하고, 새누리당이 이적단체를 강제로 해산할 수 있는 법을 만들겠다고 나선 것을 봐도 그렇습니다.
 
밀양의 할머니들은 어느 순간 소수가 되어, 국가에 의해 ‘다수의 이익을 위해 배제하는 사람’들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국정원이 선거에 개입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책임지는 사람도, 사죄하는 사람도 없는 지금의 상황이 당혹스럽습니다. 정부가 직접 나서서, 국민이 뽑은 대표인 국회의원이 6명이나 있는 정당을 해산시키려 하는 것은 권력이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대의민주주의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성폭력을 반대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성폭력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성폭력은 분명히 ‘약자에 대한 폭력’이기에, 박근혜 정부가 성폭력을 근절하고자 한다면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약자가 존중되는 사회를 만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과연 성폭력 근절을 어떻게 하고자 하는 것인지 저는 이 정부에 묻고 싶습니다. 성폭력 피해생존자인 저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들이 오히려 약자들에게 침묵을 강요하고, 소수자는 언제든 폭력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위험한 사회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 묻고 싶습니다. 성폭력 근절이 선언으로 남지 않기 위해서는, 민주주의를 지키고 성숙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 너울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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