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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되지 않은 역사] 해방직후 사할린 한인 학살사건 

 
[75년전, 일제에 의해 강제이주 당하고 끝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할린 한인의 역사와 삶, 그리고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를 짚어보는 “기록되지 않은 역사” 기사를 연재합니다. 필자 최상구님은 지구촌동포연대(KIN) 회원으로 사할린 한인 묘지조사 후속작업, 영주귀국자 인터뷰 등 ‘사할린 희망캠페인단’ 활동을 펴오고 있습니다. www.ildaro.com]
 
최근 또다시 밝혀진 사할린 한인 학살사건들
 
2012년 8월 14일, 국가기록원은 러시아 사할린 국립문서보존소에서 입수한 러시아 정부의 1946년 보고서 초안을 공개했다. 이 문서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전에는 사할린 서북부 에스토루 (현 우글레고르스크)지역에 한인이 1만229명 살았지만, 전쟁 후에는 5천332명밖에 남지 않았다. 한인 인구가 50%가량 감소한 것이다.
 
당시 소련측 보고서에는 한인 인구의 급격한 감소 이유로 피난·귀환과 함께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학살을 지목했다. 이에 대하여 지난 11월 구체적인 증언이 나오기도 하였다.
 
이 지역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일본군이 누군가를 죽였다더라' 하는 막연한 증언이 대부분으로, 이번처럼 목격자로부터 구체적인 장소와 날짜, 정황을 직접 들은 2차 증언이 확보된 것은 처음이라고 국가기록원은 밝혔다.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사할린에 사는 황순영(78·여)씨는 11살이던 1945년 여름 에스토루에 살던 이모부와 이모부의 동생이 일본군에 의해 학살됐다는 소식을 어머니에게 전해 들었다고 증언했다.
 
황씨는 "이모부 내외가 에스토루로 들어가 농사짓고 살고 있었는데, 일본군들이 전쟁에서 진 1945년 8월 20일께 이모부와 이모부의 동생을 끌어내 뾰족한 나뭇가지로 막 찔러 죽였다고 한다"고 말했다. 황씨는 "당시 임신 중이었던 이모는 3살짜리 아들과 숨어서 그 상황을 목격했고, 나중에는 땅을 파 굴 안에 숨어있었다고 한다"며, "전쟁이 끝난 뒤 이모는 땅에 묻힌 남편과 시동생을 파내 초상을 치렀는데, 그때 어머니가 다녀오셨다"고 덧붙였다.

                                       ▲ 남사할린 지도: 학살지역

1945년 8월 당시 5살이었던 이태엽(72)씨는 나중에 이웃으로부터 들은 또 다른 이웃집 부자의 사연을 증언했다. 사할린에 머무는 이씨는 "이웃에 살았던 최씨가 얘기해줬는데, 에스토루에서 강씨와 부인, 아들 둘로 구성된 일가족 중 강씨와 큰 아들이 일본군에 살해당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일본군이 소련군과 싸울 죽창을 만들라고 해 최씨는 만들러 갔지만, 강씨는 '다리가 불편한 큰아들을 돌봐야 해서 못 간다'고 하다가 일본군의 칼에 찔려 죽었고, 큰아들은 거기에 항의하다 함께 죽음을 맞았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올해 밝혀진 이러한 정황은 그간 알려진 두 학살사건 이외에도 사할린 전역에 전쟁의 광기가 휘몰아 쳤음을 보여준다. 1945년 8월, 소련군의 진격과 일본의 패전 사이에 피난과 해방, 꿈에 그리던 귀향을 그리던 사할린 한인들에게 미래는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조선인이 폭동 일으킬 것” 카미시스카 학살사건
 
뽀로나이스크시(시스카: 수도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288Km거리)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공터에는 김경순 여사가 세운 “통한의 비”가 있다. 1945년 8월 17일, 부친 김경백(당시 54세)과 오빠 김정대(당시 19세)가 일본 헌병과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18일 경찰서에서 다른 조선인 16인과 함께 살해당하고 경찰서까지 불태워진 사건을 고발코자 이 비석을 세운 것이다.

▲ 통한의 비. 비석 건립 당시 토지 임대를 해결하지 못해 늘 철거 위기에 놓여있다.   © 최상구 
 
가미시스카 지역은 북위 50 근처 소련과의 국경과 인접해 있고, 일본군 부대가 진주하고 있던 군사지역이었다. 또한 오지(王子)제지의 제지공장과 6개의 주요한 탄광도 위치하고 있는 산업과 군사적인 면에서 요충지였다. 특히 1940년대 이후 철도의 연장공사와 도로, 비행장 건설에 따라 조선인 노동자의 수가 증가하는 추세였고(자유모집과 강제동원 모두), 강제동원 이전부터 농업과 건설업 등에 종사하던 조선인들에 대한 일제의 감시가 꾸준했다.(소련에서 이 사건의 전말이 드러난 것은 바로 일제의 감시를 수행했던 조선인 앞잡이에 대한 재판과정이다.)
 
1945년 8월 9일 소련의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와 함께 소련군은 비행기와 탱크를 앞세우고 남사할린으로 진격한다. 최북단 군사도시였던 가미시스카 지역은 급박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8월 17일 일본인에 대한 소개(疏開)를 결정하고 주민 대피와 모든 주요 시설의 파괴 명령이 하달되었다. 그러나 조선인들에 대한 소개 조치는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수 있다. 조선인들은 소련군을 도울 것이다. 조선인들은 소련의 스파이다. 쳐들어 온 소련병은 모두 조선 사람이었다.”
 
소련군 중 몽골계 혹은 북방동양계 병사들이 있었는데, 이에 대한 오해로 의심과 의혹이 증폭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문만으로 경찰과 헌병이 나서서 그와 같은 학살을 저질렀을까? 긴급한 피난 시점에 유독 조선인들, 유랑 노동자뿐만 아니라 그 지역에 오랫동안 정착했던(감시했던) 조선인들까지 스파이 혐의로 끌고 가 처형한 점은,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불안한 심리에 의한 것으로만 볼 수는 없다.
 
군사지역이라는 점, 그리고 군사시설 건설과 관련된 조선인들이 포함되었던 점으로 보아 군사보안의 측면에서 학살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론해 볼 수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병과 경찰이 개입된 점을 볼 때 조직적인 상부의 지시에 대한 의혹은 떨칠 수 없다.
 
이 지역에서의 학살은 여러 증언이 있다. 출산한지 얼마 안 된 산모가 물을 길러간 남편이 오지 않아 나가 보니 남편의 목이 떨어져 있었다는 증언, 피난 차량에 조선인을 탑승하게 한 후 그대로 수장시킨 증언, 해방의 기쁨에 만세를 외쳤던 비행장 건설 조선인 노동자들을 처형한 증언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일제는 후퇴하는 과정에서 무차별적인 방화도 저질렀는데, 22개의 공장, 22개의 호텔, 병원, 극장, 이발소, 세탁소, 사진관, 신사, 일반 주택 등이 소실되었다.
 
“조선인은 스파이다” 미즈호 학살 사건
 
사할린 서쪽 큰 항구도시인 홈스크(마오카)로부터 내륙으로 40Km정도 떨어진 포자르스코예(미즈호)촌. 농촌인 이곳은 1940년대 250호까지 규모가 제법 늘어난 곳이었다. 이곳의 조선인들은 일본인 농가의 소작인이거나, 공사나 계절농을 목적으로 한 임노동자들이었다.
 
한편, 식민지에 농업을 통해 정착하는 것은 당국의 지원(토지 무상임대, 이주비, 가옥건축비 보조 등)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다양한 지원책들은 그 혜택을 누리는 일본인들이 국가에 대해 부채의식을 가지게 되는 계기이며, 또한 다양한 지원들을 받기 위한 농촌 특유의 유대와 단결력의 형성은 이 학살 사건이 평범한 농민이었던 이들이 집단적인 살인마로 바뀌는 배경이 된다.
 
한가로운 농촌이었던 곳에 광기가 휩쓴 것은 1945년 8월 20일 후였다. 8월 20일 소련군은 17척의 함선과 다섯 척의 수송선, 80기의 태평양 전투비행대, 병력 3,200명을 홈스크(마오카)에 상륙시켰다. 이로 인하여 원래 홈스크에서 배를 타는 피난 계획을 세웠던 미즈호 주민의 소개는 급하게 변경되었다. 홈스크 반대방향으로 일단 피신하고 코르사코프(오토마리)로 가는 것으로 변경된 것이다.
 
8월 21일 주민 소개에 따라 일단의 일본인들이 피난을 떠났으나, 조선인은 소개의 대상이 아니었다. 피난 당시 분위기는 매우 침통했다. 일본이 패전했다는 것과, 소련군의 진격에 자신의 최후를 걱정하면서 떠난 것이다. 이때 “조선인들이 스파이다”라는 소문도 돌았다.
 
마을에는 조선인과 일본인 남자들이 있었다. 이들 일본인들은 예비군 훈련에 동참했던 재향군인회와 마을 청년단 소속이었다. 준군사조직이었던 이들 단체들을 중심으로 의용전투대가 결성되었고, 지도급 인물들에 의해 ‘상부의 지시’라며 조선인 살해명령을 집단적으로 실행에 옮긴다. 한 마을에서 서로 알고 지냈던 조선인들(여성과 6명의 아이들이 포함된 총 27명)을 일본군도와 죽창 등으로 살해하였다.
 
8월 20일부터 25일까지 이어진 이 학살 행위로, 사실상 마을에 있었던 조선인 전체가 몰살된 것이다. 일본이 패전했다는 집단적 불안감과 공황상태는 이를 극복할 상대를 찾게 된 것이다. 마치 일본 관동 대지진 때 벌어졌던 조선인에 대한 학살처럼 말이다.
 
이 조선인 살해사건의 본격적 조사에는 조선인의 역할이 있었다고 한다. 소련군 정치부 소속 중위로 사할린에 들어온 고려인 허봉득이 조사요청을 받아 정치부에 이를 보고하여 조사가 실시되었다고 한다(다른 증언에서는 홈스크에 교사로 들어온 고려인을 통하여 조사를 요청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1946년 7월~8월 4회에 걸쳐 실시된 사체 발굴 작업의 기록은 당시의 참혹상을 잘 보여준다.
 
“사체 검증: 머리 부분은 사체에서 떨어져 있다. ···두 개의 머리뒷부분에는 관통한 구멍이 있고, 광대뼈는 금이 가고 앞니가 빠져있다.···사체는 30~35세의 여성으로 판명. 근육조직은 심하게 부패되어, 쉽게 뼈에서 떨어진다. 좌우 늑골에 다수의 골절이 있다.” <진상규명위원회(2008), 53쪽>
 
소련 법정은 재판을 통해 이 사건을 ‘18명의 일본인으로 구성된 테러그룹이 미즈호 마을 조선인 주민을 모두 살해하기 위해, 같은 마을 조선인 주민 27명 전원을 학살’한 범죄로 규정하고 이들 가해자들에 대해 사형 7명, 11명은 10년형을 구형했다. 7명은 1947년 블라디보스톡에서 사형이 집행되었고, 10년형을 구형 받은 이들 중 일부는 일본인 송환시기에 일본으로 돌아간 것이 확인되었다.
 
역사를 더욱 가슴 아프게 만드는 한국의 현실 

▲ 7인 학살사건 추모비(앞·뒤)     © 최상구 
 
미즈호 마을 인근에는 27일 학살사건 추모비가 있다. 1996년 8월에 (사) 해외희생동포 추념사업회(회장 이용택)에서 세운 것이다. 홈스크로 가는 도로 근처 풀숲에 지나지 않았던 이곳을 한국 3730지구 로타리 클럽과 유즈노 사할린스크 로타리 클럽, 사할린주 두마 정 왈레리 의원 등의 도움으로 2012년 가을에 주변을 정리하였다고 한다. 추념비 일대에 석판을 깔고 계단도 만들고 나무도 심는 등 정비를 하였다.
 
역사를 기억하고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이와 같은 정비사업을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추념비를 만든 해외희생동포 추념사업회의 회장 이용택은 2차 인혁당 사건 당시 그 수사책임자였던 중앙정보부 6국장 출신이다. 인혁당 사건은 실체도 없는 인혁당을 재건하려 했다는 혐의로 체포된 8명이 사형확정 18시간만에 사형된 사건이다.(8명은 재심을 통해 2007년 모두 무죄판결을 받는다.)
 
이른바 ‘사법살인’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 세운 ‘학살사건 추모비’라… 씁쓸하기만 하다. 이 역사의 아이러니 속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시대의 광기에 희생된 넋들이다. 최근 밝혀진 사례들처럼 아직 체계적인 조사도 시작되지 않은 사건도 있다는 점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즉, “기록되지 않은 역사”에 대한 발굴과 이를 알리는 작업은 해가 바뀌는 이 순간에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최상구)

* 참고 자료/ 문헌
국립민속박물관 편 <러시아 사할린.연해주 한인동포의 생활문화> 2001.
이토 다카시, 김문규 옮김 <사할린 아리랑-카레이스키의 증언> 눈빛, 1997.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검은 대륙으로 끌려간 조선인들> 2006.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사할린 가미시스카 조선인 학살사건 진상조사> 2007.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사할린 미즈호 조선인 학살사건 진상조사> 2008.
 
        상업광고 없는 여성저널리스트들의 언론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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