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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동원 역사와 희생자를 위로하는 ‘힘’
[기록되지 않은 역사] 제8회 재외동포 NGO대회 in 사할린②
75년전, 일제에 의해 강제이주 당하고 끝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할린 한인의 역사와 삶, 그리고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를 짚어보는 “기록되지 않은 역사” 기사를 연재합니다. 필자 최상구님은 지구촌동포연대(KIN) 회원으로 사할린 한인 묘지조사 후속작업, 영주귀국자 인터뷰 등 ‘사할린 희망캠페인단’ 활동을 펴오고 있습니다. www.ildaro.com
“사할린 한인의 고난의 역사는 아직도 현재진행형”
쌀쌀했던 10월의 마지막 날. 독립영화관 인디스페이스에서 한 영화의 시사회가 있었다. “잔인한 내림(유전)”. 이 작품은 한국 원폭2세환우회 한정순 회장의 삶을 바탕으로 원폭피해자 문제로부터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까지, 핵에 대한 문제는 ‘그들의’ 문제가 아닌 우리의 문제임을 각인시킨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저 당할 수밖에 없었던 원폭피해자들의 처지와 사할린에서 돌아올 수 없었던 한인들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리고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역사의 매듭을 풀어 낼 용기와 손길이 필요함을 느꼈다. 아픔의 세월을 보내야 했던 사람들을 위로하고, 이들에 대한 역사를 기록하고 보존하여 전쟁, 식민지 착취의 제국주의 역사가 얼마나 야만적인가를 드러내야 한다. 지난 8월, 사할린 유즈노사할린스크시 한인문화센터에서 열린 “사할린 한인 역사기념관 건립을 위한 국제워크숍”은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였다.
임용군 사할린주 한인협회 회장은 국제워크숍 기조발제를 통해 “사할린 한인의 고난의 역사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기에, 기념관을 건립하는 일은 사할린 한인의 역사를 회복하고 “우리의 아픔과 상처, 피와 눈물과 땀을 보존하고, 그 가치를 인정받고 더 이상 불행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이를 위하여 역사기념관에는 보존해야 할 역사적 자료와 유물을 전시하는 전시관, 사할린 현지에서 사망한 동포들을 위한 ‘위령시설’과, 고령의 동포들을 위한 노인복지시설이 필요하며, 다음 세대를 위해서 문화활동과 교육 및 교류를 위한 공간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 오른쪽부터 임용군 한인협회 회장, 김춘자 우리말방송 국장, 배덕호 KIN 대표, 통역자 ©최상구
독립기념관을 설계한 김원 선생님(건축환경연구소 ‘광장’ 대표)은 기념관의 핵심 요소는 역사성과 장소성이라고 말했다. 사할린 현지는 강제동원의 역사를 잘 드러내는 장소이며, 이를 토대로 사할린 한인의 정체성을 담을 수 있는 기념관을 건립하길 기원하였다.
박신의 경희대 교수는 기존의 전시 위주의 정적이고 공급자 중심의 기념관에서 벗어나, 지속적인 연구와 다양한 교류활동으로 문화, 교육센터로서의 기능을 포함할 것을 주문하였다.
워크숍 중 유태인에 대한 홀로코스트 기념관들을 살펴보면서, 사할린 동포들에 대한 기념관 건립이 여태 논의조차 되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저렇게 세계적인 기념관이 프랑스와 미국에까지 만들어지는 건, 그만큼 유태인의 아픔에 대한 공감과 공유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유태인 세력의 영향력을 무시할 순 없지만.) 사할린 하면 아직도 일본땅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은 판국에, 사할린 동포의 문제에 거기다 기념관이라니. 갈 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강제 동원되어 이주한 한인들은 거의 다 돌아가시고 천 여명 정도 생존해 있다. 이 분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첫 삽’이라도 뜨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기념관을 건립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지원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이에 대한 공감대를 확대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75인 추진위원회’는 기념관 건립 모금운동에 주춧돌이 될 것이다. 이번에 NGO 대회에 참가한 일본인들과 재일동포들도 일본에서 ‘75인 추진위원회’를 만들겠다고 하였다. 한국에선 10월 현재 61명이 추진위원의 뜻을 밝혔다.
‘지구촌 동포연대’의 배덕호 대표와 사할린 ‘우리말방송’의 김춘자 국장의 사회로 진행된 워크숍은 국내유족 정태랑 선생님의 사연을 직접 소개하는 시간도 가졌다. 1941년 징용으로 끌려간 정태랑 선생님의 부친 정봉규(일본명 다카야마. 高山)님은 나이호로(현재 지명 고르노자보드스크)탄광으로 가신 것으로 확인되었지만, 그 후 어떤 소식도 확인할 수 없었다. 워크숍에서 정태랑 선생님의 사연이 소개된 이후, 다음날 숙소로 고르노자보드스크 현지 한인 분께서 찾아오셔서 정태랑 선생님과 함께 그 일대를 다니며 수소문을 하였고, 그 당시의 사진 한 장을 받았다고 한다.
▲ 바다를 보며 나지막이 아버지를 부르며 흐느끼는 정태랑 선생님. 선생님 뒤편이 고르노자보드스크 공동묘지인데, 선생님의 부친이 끌려간 나이호르 탄광에서 돌아가신 분들이 묻혀있는 곳이다. 여기서도 어렵지 않게 한인묘를 찾을 수 있다. © 최상구
“한국 여권 있어야 위로금을 받을 수 있다니”
워크숍 중 도착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하 민변) 소속 변호사 6명도 동포들에게 많은 박수를 받았다. 국적확인 소송과 위로금 지급신청 소송에 대한 소식을 전했기 때문이다. 민변과 ‘공익 변호사 그룹 공감’(이하 공감)은 사할린 희망캠페인단과 함께 2년여의 준비 끝에 사할린 동포를 대리하여 국가를 상대로 국적확인 소송과 위로금 지급신청소송을 제기했다.
강제동원 피해자를 지원하는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하 특별법)은 한국-소련 수교가 이뤄진 1990년 이전에 숨진 사람만 위로금 지급 대상으로 하고 있다. 또한 위로금 지급신청의 요건으로 ‘대한민국 국적’을 요구하고 있어, 똑같은 강제동원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사할린에 거주하는 동포들의 위로금 지급 신청 기회를 원천 봉쇄하고 있다.
▲ 2010년 민변 소속 이상희, 공감의 정정훈 변호사 등이 국적확인, 위로금 지급신청 소송인들과 면접 및 자료조사를 하는 모습. © 최상구
이에 대하여 민변(담당: 손영실 변호사)은 사할린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 8명을 대리하여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이하 지원위원회)를 상대로 위로금을 지급하라는 소송을 지난 8월 6일 서울행정법원에 냈다.
이들은 소장에서 “국적 소지 여부와 사망 시점에 따라 위로금 지급에 차이를 두는 것은 헌법의 평등 원칙을 위배하고 있는 것”이며, “특별법은 사할린 한인들이 왜 고국에 돌아올 수 없었고, 왜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할 수 없는가에 대한 현실적 고려”가 없고, “차별의 기준이 자의적이고 재외국민 보호의무 및 헌법 정신을 위반하고 있다”고 소송 이유를 밝혔다.
우리나라 국적법은 자진하여 외국 국적을 취득한 자에 대해서는 대한민국 국적을 상실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사할린 동포들이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게 된 동기는 냉전의 국제정세, 소련에서의 무국적자에 대한 차별정책 등으로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것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 대한 고려 없이 지원 대상을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으로 한정한 것은 불합리한 결정이다. 더욱이 그 지원 대상이 강제동원 피해자들 아닌가! 중국과 동남아시아, 사할린 등지로 끌려갔던 피해자들을 찾아내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그 대상을 한정 짓는 것은 특별법이 만들어진 취지와도 모순이다.
“우린 러시아인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니고 그랬잖아요”
▲ 지원위원회의 강제동원 피해결정서. 피해자로 인정은 받았지만 위로금은 받을 수 없다. ©최상구
국적확인 소송(담당: 공감 윤지영 변호사)은 1945년 일본의 패전에 의해 해방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귀환의 권리가 철저하게 묵살된 사할린 동포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 국민인지’ 한국 정부에 물으려는 것이다. 조선족 등 중국 국적의 동포가 비슷한 소송을 낸 적은 있지만, 국적이 아예 없는 한인 2세가 국적을 인정해달라고 요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소송인 김모(58세/여)씨는 소장에서 "사할린으로 강제 징용된 사람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구소련의 강제억류 정책 탓에 끝내 귀국하지 못했다"며, "혈통주의를 채택한 국내법에 따르면 사할린 한인은 애당초 국적을 이탈한 적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대한민국 국적자(재외국민)"라고 주장했다.
김씨의 부모는 일제강점기에 각자 사할린으로 끌려갔다가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채 현지에서 사망했고, 딸에게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김씨는 이러한 부모의 뜻에 따라 현지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무국적자로 살아왔다. (무국적자가 받는 차별 중 한 예는 이동의 자유를 제약한 것이다. 거주지에서 20km 되는 다른 지역으로는 가지 못했다. 아예 행정구역 밖으로 못 벗어났다고 한다.)
소송에 대한 설명이 끝나자, 워크숍에 참석한 동포들의 발언이 이어졌다. 영주귀국을 한 사람들은 한국에서 편하게 지내는데, 여러 사정상 사할린에 남게 된 사람들에 대한 대책을 호소하기도 했다. 부모님과 자신의 처지를 담담한 시로 읽어 내려간 동포 분도 있었다. 기념관 건립보다는 사할린 현지에 있는 동포들에 대한 현실적인 지원을 호소하는 동포의 발언에는 박수가 이어지기도 했다. 워크숍은 사할린 동포들의 뜨거운 관심 속에서 이렇게 끝이 났다.
역사기념관 설립, 아픔의 역사를 함께 어루만진다
국제워크숍이 열린 한인문화센터는 일본 정부의 지원(약5억엔)을 통해 2006년 개관하였고, 한인회와 한국어교육원, 식당, 숙박시설이 있다.
1995년 일본은 무라야마 수상의 과거사에 대한 담화와 전후 50년 프로젝트에 의해 “인도적 차원”에서 사할린 한인들에 대한 지원을 발표한다. 영주귀국과 고향방문, 역방문(한국에서 사할린으로)에 대한 지원과 사할린 현지에 문화센터 건립 등이다. 정확하게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고 여전히 “인도적 지원”으로 그 역할을 다 했다는 입장이다. (올해 하반기부터 부동산 정책변화로 임대료가 수 배 상승할 예정이었는데, 그나마 재외동포재단에서 부지매입비를 지원하여 위기를 모면했다).
문화센터 앞마당에 한국과 사할린 민간단체의 힘으로 세워진 두 개의 비석은 더욱 쓸쓸해 보인다. 하나는 ‘사할린 희생사망동포 위령탑’이고, 다른 하나는 ‘사할린 한인 이중징용광부 피해자 추모비’이다.
‘이중징용’이란 강제동원으로 사할린에 끌려온 조선인 광부들을 태평양 전쟁말기 일본 본토로 다시 끌고 간 것을 말한다. 태평양전쟁 말기 사할린에서 생산한 석탄과 석유를 일본 본토로 운송하는 것이 어렵게 되자, 사할린의 탄광을 폐쇄하고 조선인 광부들을 일본 본토로 옮긴 것이다. 사할린을 올 땐 부모형제와 헤어지고, 일본으로 갈 땐 처자식과 헤어진 이들은 정확한 피해 인원도 파악조차 안되고 있다.
▲ 사망동포위령탑/ 이중징용 추모비 © 최상구
기념관 건립보다는 사할린 현지에 남은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지원을 해달라는 요청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돌이킬 수 없는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는 것보다 현재 일신의 편안함이 더 절실할지도 모르겠다. 대부분 고령인데다 연금으로 생활하기에, 늘 넉넉하지 않은 생활이 나아지는 것도 물론 필요하다. 그러나 지울 수 없는 과거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이야 말로 이러한 만행을 저지른 자들에 대한 준엄한 심판이자, 그들의 잊을 수 없는 아픔의 역사를 어루만질 수 있는 길일 것이다.
사할린 한인 역사기념관의 건립은 사할린 한인의 이주사, 생활사 등 과거사에 대한 전승과 사할린 동포들의 자긍심을 높이고, 후대에게 교육의 장을 마련하여 동포들의 정체성 확립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 또한 기념관에는 동토의 땅에 묻혀야만 했던 고인의 넋들을 위로하고 추도할 위령시설이 포함되어야 한다. 늦게나마 망자들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정성일 것이다. (최상구)
* 사할린 희망캠페인단 홈페이지 http://www.sahalli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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