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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기록되지 않은 역사] 제8회 재외동포 NGO대회 in 사할린① 

 
75년전, 일제에 의해 강제이주 당하고 끝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할린 한인의 역사와 삶, 그리고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를 짚어보는 “기록되지 않은 역사” 기사를 연재합니다. 필자 최상구님은 지구촌동포연대(KIN) 회원으로 사할린 한인 묘지조사 후속작업, 영주귀국자 인터뷰 등 ‘사할린 희망캠페인단’ 활동을 펴오고 있습니다.
 
일제 강제동원 75년,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짝짝짝짝” 사할린 항공의 비행기가 인천을 떠난 지 3시간 만에 사할린 땅에 내리는 순간 러시아 인들은 박수를 쳤다. 그들의 섬, 그들의 집에 무사히 도착했음을 기뻐하는 박수일 것이다. 그러나 이 섬엔 길게는 75년간 고향을 가지 못한 동포들이 살고 있다. 아니, 많은 수의 동포가 그리던 고향을 못 본채 눈을 감으셨고, 생존하고 계신 분들과 그들의 후손들이 여전히 살고 있다.
 
사할린 한인. 일제에 의해 머나먼 동토의 땅으로 건너가야만 했던 이들. 냉전의 벽이 가로막아 돌아 올 수 없었던 이들. 철저하게 외면했고 소극적이었던 이 땅의 위정자들로 인해 그들도, 이산가족도, 유족들도 평생의 한을 안고 살아가야만 했던 이야기. 그들의 이야기에는 삶과 죽음, 이별과 아픔, 차별과 소외가 따른다.
 
그래서인지 이야기는 조금은 묵직하다. 더욱이 이 사실을 널리 알리고픈 마음에 쓰는 글은 더 그렇다. 조금은 투박하겠지만, 그 이야기들을 시작해 본다.

▲ 사할린 남부 코르사코프 '망향의 언덕'에서 바라본 항구 전경. 일제에 의해 강제이주 당한 한인들은 러일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갈 수 있으리란 기대로 항구로 몰려들었지만,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소련군에게 저지당하고 망향의 세월을 시작하게 된다.     © 최상구 
 
고국으로 갈 배를 기다렸던 코르사코프 항구
 
지난 8월 나는 사할린으로 떠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8월 4일부터 11일까지 일주일간 지구촌 동포연대(KIN: Korean International Network)와 사할린주 한인협회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제 8회 재외동포 NGO대회 in 사할린”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재외동포 NGO대회는 재외동포들과 함께 청산되지 못한 역사와 현안 문제들을 제기하고 그 해결책을 제안하기 위해 지구촌 동포연대가 지난 2004년부터 시작하여 2007년 일본 우토로 마을, 2008년 대회를 사할린에서 개최한 후, 사할린에서는 두 번째로 개최되었다. 8회 대회에서는 ‘사할린 한인 역사 기념관 건립을 위한 국제워크숍’과 사할린 현지방문을 통해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 된지 75년동안 방치돼 온 사할린 한인의 역사와 아픔을 함께하였다.
 
이번 대회에는 사할린 한인을 대신하여 <사할린 한인 국적확인 소송>을 8월 6일 제기한 이상희, 손영실 등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소속 변호사, 2009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사할린 희망 캠페인단’ 대표 몽산스님, 재한조선족연합회 회장, 5월 서울에서 200여명이 참가하여 사할린 희망캠페인을 진행했던 전국청소년정치외교연합(YUPAD 고등학생연합) 회장 박인규군, 그리고 지구촌 동포연대 등 민간단체 활동가와 법률인, 학생과 유족 정태랑 선생님 등 한국인 참가자와 재일동포, 일본의 시민단체 활동가 및 연구자들이 참가하였다.
 
우리가 처음으로 찾은 곳은 코르사코프(옛 일본지명 오도마리). 사할린 남부에 위치한 코르사코프 항구는 일본의 홋카이도와 불과 200Km 떨어져 있는 곳으로, 사할린으로 강제 동원된 한인들이 도착한 항구이기도 하다. 당시 한인들은 시모노세끼, 나고야, 홋카이도를 거쳐 이곳 코르사코프 항구에 약 보름이 걸려서야 도착했다. 어쩌다가 이곳에까지 오게 되었을까?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북위 50도 남쪽의 남사할린을 점령한다(남사할린 일본지명 가라후토). 일본은 풍부한 지하자원과 산림자원 개발을 위해 철도, 도로, 항만, 비행장 등의 인프라 구축을 위한 개발도 진행하게 되고, 이를 위한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게 된다. 일제는 이러한 노동력의 수요를 식민지인 한반도에서 해결하고자 했다. 처음에는 탄광회사의 광고 등으로 높은 임금 등의 이유로 이곳을 찾게 되었지만, 1938년 이후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까지 이어지면서 강제동원으로 사할린에 끌려오게 된 것이다.
 
이곳 코르사코프 항구에는 ‘망향의 언덕’이 있다. 1945년, 전쟁이 끝나면서 고향으로 갈 수 있을 거란 생각에 항구로 몰려든 한인들은 소련군에게 저지당한다. 일본인들은 소련과의 협정을 통해 유골까지도 본국으로 가져가는 사이, 한인들은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기나긴 망향의 세월을 시작하게 된다. 망향의 언덕에 세워진 배 모양의 위령탑은 이러한 한인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2007년 세워졌다. 그 위령탑 바닥에 새겨진 시구는 당시의 비극을 전한다.
 
“(생략)... 짧은 여름이 지나 몰아치는 추위 속에서
이 분들은 굶주림을 견디며
고국으로 갈 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이윽고
혹은 굶어 죽고
혹은 얼어 죽고
혹은 미쳐 죽는 이들이 언덕을 메우건만
배는 오지 않아
하릴없이 빈손 들고
민들레 꽃씨마냥 흩날려
그 후손들은 오늘까지 이 땅에서
삶을 가꾸고 있습니다.” (글: 김문환)
 
70년만에 1천593기의 한인 묘를 찾은 곳 

▲ 유즈노사할린스크시 제1공동묘지. 한인 묘들이 밀집한 곳. 역설적이게도 일본인 위령탑 근처이다.  © 최상구 
 
다음날 아침 우리는 숙소에서 걸어서 러시아 사할린 주도(州都) 유즈노사할린스크(옛 일본지명 토요하라) 제1 공동묘지에 도착했다. 한국은 연일 열대야였지만 어제 비까지 왔던 터라 잠바까지 걸쳐야 했다.

이곳 제1묘지는 작년에 국무총리 산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이하 희생자 지원위원회)의 의뢰로 지구촌동포연대(KIN)가 전수조사를 통하여 1천593기의 한인 묘를 찾은 곳이다.
 
묘지 조사를 하며 약 42만㎡의 면적을 사람 키만큼 자란 머위 잎들을 낫으로 헤쳐가며 찾아내었다. 한인 묘로 확인되면 표식을 부착하고, 사진과 함께 묘비의 내용을 기록하고, GPS 좌표를 입력하여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이를 홈페이지로 만들어 유족들이 확인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묘지 통로를 따라 들어가자 작년에 부착한 표식들이 보인다. 그러나 벌써 떨어지고 훼손된 것이 많다. 좀더 깊숙이 들어가려 했지만, 풀숲이 너무 우거져 포기하고 한인 묘들이 밀집되어 있는 곳으로 도착하여 준비해간 술과 과일, 사탕들을 차려 놓고 절을 올렸다. 그리고 이어진 전체 묵념의 시간.
 
무연고 묘로 보이는 한인 묘들은 훼손 정도가 심한 것도 있었다. 가족이 사할린으로 갔다 행방불명 된 유족들은 이 현장을 봤다면 그 심정이 어떠했을까? 대한민국 정부가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숨을 거둔 이들을 70여년 만에야 처음 조사를 시작한 것이 안타까웠다.
 
“한 집에 한 명은 가야한다 해서..” 브이코프 탄광촌 
 
오후에 도착한 곳은 브이코프 탄광촌(옛 일본지명 나이부치). 미쓰비시 광업주식회사 소유였던 곳으로, 한인들이 탄광노동자로 가장 많이 끌려간 곳이기도 하다. 1천 여명 이상의 한인 독신자(당시 홀애비, 오지상 등으로 불렸다) 숙소가 있을 정도였으며, 타고베야라는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 없는 가혹한 징벌방도 있었다. 지금은 탄광이 문을 닫아 대부분의 인구는 빠져나가고 연금생활로 이어가는 분들이 계셨다. (한인 분은 4백여분 계신다.)

▲ 브이코프 탄광. 대부분의 한인들은 위험한 갱내 작업을 했다. © 최상구

철로를 따라 탄광 입구를 구경하던 중 우리는 아직 이곳에 살고 계신 배용권 어르신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한 집에서 한 명은 가야 한다고 해서 둘째인 내가 왔다. 2년이라고 하니까, 장가갔다가 바로 왔다... 여기에 180명이 강제로 왔는데 지금 넷이 살아남았다. 올 때 한번에 몰아서 와요. 대구 칠곡군에서 근처 사람 한데 모아 기차로, 바다로 왔다.”
 
두고 온 부인은 11년만에 개가하셨고, 어르신도 여기서 결혼하셨다고 한다. 말씀은 띄엄띄엄 하시다가 결국 숨이 차서 쉬어야겠다 하시곤 이내 갱도 밖으로 나가셨다. 2년만 갔다 오면 될 줄 알았던 그 발걸음이 결국 생이별을 겪어야만 하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걷고 만 것이다.
 
지역 한인회에서는 우리의 방문을 반가워하며 차와 빵을 대접했다. 해맑게 웃던 한 꼬마는 최연소 참가자인 고등학생 박인규 군에게 연신 말을 건넨다. 폐광이 되어 빈집이 많은 이곳에 형 뻘인 친구가 방문했으니 반가운 마음이야 오죽할까. 먼발치에서 까지 손을 흔들며 배웅하는 그 아이를 보며 웃으며 헤어졌지만, 이들이 품고 있는 그리움이라는 것이 느껴져 한편으론 웃을 수만은 없었다.
 
사할린에 남은 사람들 “우리에게도 지원을…”
 
다음날, 우리는 유즈노사할린스크시에서 110Km떨어진 홈스크(옛 일본지명 마오카)시를 방문했다. 사할린에서 두 번째로 많은 한인들이 살고 있는 지역으로 커다란 제지공장과 수산업이 발달하였으며, 한인협회에서 운영하는 한국어 학교와 한국어 수업이 정규과정에 포함되어 있는 ‘나제즈다 리체’ 특수학교가 있다.
 
홈스크에서 우린 여러 명의 한인 분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연세가 대부분 70~80대이신 분들과 마주 앉았다. 처음 약간의 서먹함이 있었지만, 이내 옛날 얘기와 현재의 생활에 대한 이야기로 분위기는 뜨거워진다.
 
“어린 자식들을 두고 가려니 마음이 좋지 않아 (한국에) 못 갔다. (사할린에서는) 연금이 적어 살아가기 바쁘다. 우린 사할린 남은 사람 아무것도 없다. 영주 귀국한 사람들은 집도 주고 살림도 주고 연금도 주지요. (여기 남은 사람은) 자기 손 움직이지 않으면 먹고 살기가 힘들어. 그르니 영주 귀국한 사람처럼 우리에게도 (지원이) 필요하다.” (최근자/ 80세)
 
“옛날에 일본 사람들이 집으로 총을 메고 와서 아들 셋인데, 한 명은 가야 한다. 아무도 안 가면 내일 이 집에 와서 다 쏴 죽이겠다고 했다. 아버지가 큰 아들이니까, 내가 가겠다고 해서 왔다. 남편은 65세. 영주귀국 하기 위한 나이에서 6달 모자란다. 어린 아이일 때 뱃속에 있었는데 왜 안되나(하하). 딱 6달 모자란다...” (방순녀/ 65세)
 
“한국에 갈 마음이 있는데 혼자 나갈 마음이 없다. ... 여기 일본사람들은 자기 가족도 데리고 아들, 딸 손자까지 다 데리고 갔다.” (홈스크 한인회 부회장)
 
“사할린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아버지. 아버지는 (내가) 12살에 사망하시고 17세에 시집갔다. 집이 어려워서. 남에서 모집으로 들어온 양반이다. 경남 창녕군... 작년 편지 왔는데 주인이름으로 왔는데, 보상금 주겠다고 했는데, 한국여권 있어야 돈을 받을 수 있다고 하더라. 그 돈 받자고 내가 가야 합니까.” (김록녀 / 81세)
 
영주귀국 자격과 위로금, 이해하기 어려운 ‘조건’ 

▲ 홈스크 지역에 살고 있는 한인들과의 만남. 간담회가 끝나도 헤어지기는 쉽지 않다. 아쉬운 마음에 박인규군이 할머니의 두 손을 꼭 잡아드린다. ©최상구 
 
한국과 소련의 수교 이후 1992년부터 본격적으로 실시된 영주 귀국. 일본 적십자가 귀국 비용을 제공하고 한국에서 거주지와 생활비를 제공하는 형태로 실시되고 있다.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사할린에 이주했거나 출생한 자’로 한정되었다가 2007년부터 ‘장애인 자녀’가 대상에 포함되었다. 영주 귀국을 하면 기초수급생활권자로 인정되어 영구임대주택을 배정받는다.
 
그러나 영주 귀국은 고령자만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장애인 자녀 이외의 자녀들과는 다시 이산가족이 되는 기형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사할린에 올 때는 고향의 부모형제와 헤어지고 늙어서는 자식들과 헤어지게 되는 구조인 것이다. 더욱이 영주귀국자들이 점차 고령화되는 점을 감안한다면 보완이 필요하다.
 
국내에서는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을 통해 사할린에 강제 동원되었던 피해자들에게도 확인절차를 걸쳐 위로금 지급이 가능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대상을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자’로 한정하여 사할린 현지의 무국적자나 러시아 국적으로 있는 분들은 제외된다. 누구를 위해 위로금을 지급하는 건지 이해하기 어려운 조건들이다.
 
사할린에서 현지방문 동안 보았던 많은 것들은 나의 뇌리에 깊게 남았다. 자작나무 빽빽한 숲과 드넓은 초원의 풍경에서부터 머위 잎 우거진 길에 있는 한인 묘지들, 이제는 폐허가 되어버린 탄광에서 알게 된 한인들의 흔적. 쉽사리 지울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가는 곳마다 환한 미소로 맞아 주신 한인 분들의 마음과 비포장 도로를 포함하여, 뽀로나이스크 지역에서 샤슬릭(돼지고기 꼬치구이)과 음식으로 환대를 해주신 정성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저 동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에게 베풀어준 관심은 역설적이게도 그동안 그토록 고국으로부터 받고 싶었던 관심에 대한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여기 있는데, 만나면 이렇게 반갑고 즐거울 수 있는데, 왜 그토록 외면했냐고...
 
지울 수도, 잊을 수도 없는 그들의 역사. 그것은 70여년간 우리가 미처 기록하지 못한 역사이며, 그래서 기록하고 보존해야 할 역사이다. 더욱이 그 역사의 생생한 증언을 할 동포들은 고령이기에 우리에겐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 이제라도 그 통한의 세월을 보듬을 수 있는 손길을 뻗어야 한다.
 
그리고 한 많은 생을 이미 마감하신 분들을 찾아내고 그 넋을 위로하는 발걸음 또한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 손길 하나 그 한걸음은 그동안 우리가 품지 못했던 그들의 역사에 대한 최소한의 사과이며 동포애의 출발점일 것이다.

사할린 희망캠페인단 75인 추진위원회에 참여해주세요!
 
이번 8회 재외동포 NGO대회 참가자들은 한국, 일본, 사할린 세 나라에서 각각 민간 차원의 ‘사할린 희망캠페인단 75인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기로 하였습니다. 75인 추진위원회는 강제동원 75년의 역사를 기억하고 보존하기 위하여 1세 아이부터 75세 어른까지 각 연령대별로 참여하는 위원회입니다.
 
한국에서 ‘75인 추진위원회’는 크게 두 가지 활동을 합니다. 그동안 국회에서 입법발의 되었지만 통과되지 못한 ‘사할린 한인 특별법’ 제정을 위한 캠페인과, 사할린 현지에 위령시설 및 기념관 건립을 위한 모금활동입니다. 한국에서는 50여명의 추진위원을 모집했고 현재도 모집 중입니다. 관심 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 관련 사이트
-사할린 희망캠페인단 홈페이지 http://www.sahallin.net
-사할린 희망캠페인단 페이스북 http://www.facebook.com/sahhope
-제8회 재외동포 NGO대회 in 사할린 사진모음 http://youtu.be/7Pl6WNsMxBI
-EBS 지식채널ⓔ 슬픈 틈새 http://mylord.egloos.com/5346063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영문 블로그> ildaro.blogspo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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