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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구석에서 줄곧 일해 왔어”
<기록되지 않은 노동>⑥ 싱글맘 윤명선의 노동일기
"일다"는 "여성노동자글쓰기모임"과 공동 기획으로, 지금까지 기록되지 않았던 여성노동자들의 일과 삶을 이야기하는 기사를 연재합니다. 싱글맘의 노동과 삶에 대해 기록한 안미선님은 르포작가이자 여성노동자글쓰기모임 회원입니다. 이 연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는 노동
집을 나왔을 때 윤명선(가명)은 마흔여덟 살이었다. 함께 나온 두 딸은 스물셋, 스무 살이었다. 남편과 헤어져 홀로어멈이 되었을 때 가장 급했던 것은 딸의 학비였다. 큰딸은 고등학교를 다니다 그만두고 횟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살아갔지만, 둘째 딸은 지방의 사립 대학교에 덜컥 들어간 다음이었다. 어떻게든 졸업할 수 있게 도와주고 싶었다.
월세 방을 구하고 바로 일을 찾아 나섰다. 2002년 대전에서였다. 처음에 간 곳은 반찬가게였다. 아홉시부터 여섯시까지 일했다. 월급이 50만 원이었다. 매일 바뀌는 반찬을 혼자 만들며 그는 처음으로 자기 노동의 대가를 받지 못한다는 생각을 했다.
새로 시작한 일은 남의 집에서 세 살 먹은 아이를 돌보는 일이었다. 아침 여덟시에 출근해서 저녁 여섯시까지 줄곧 돌보았다. 100만 원을 받았다. 주인은 부동산 가게를 했는데 월급을 줄 때마다 “장사도 안 되는데 이렇게나 주고 말이야.” 하면서 듣그러운 불평을 했다. 매번 잔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숙여 돈을 받다가 명선은 문득 말했다. “애를 어린이집 보내세요. 나는 꼼짝 못하고 아이를 보는데 정 그렇다면 또래끼리 놀게 하는 게 더 낫겠네요.”
▲ 월 50만원, 80만원... 고된 노동의 값어치는 어째서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않는 것일까. © 일다
‘이제 뭘 할까?’ 지역 정보지를 보다가 독서실을 청소하면 30만 원을 준다는 광고를 보았다. 노래방을 청소해도 30만 원이었다. 두 군데를 다 청소하면 60만 원이다. 60만 원으로 살 수 있을까? 살 수 없을 것이다. 노래방에 찾아갔더니 주인이 턱짓을 하며 물었다. “위층이 주점인데 주방 일 해볼래요?” “난 주방에서 일한 적 없는데요.” “해보세요.” 80만 원을 준다고 했다. 60만 원보다 80만 원이 크다는 사실이 기뻤다.
저녁 여섯시에 출근해 새벽 세시나 네 시까지 일했다. 두어 시간을 무급으로 더 일하는 날이 흔했다. 주방에서 과일안주를 만들고 서빙도 보았다. 방이 열두 칸이었고 손님들이 한 번에 몇 십 명씩 들이닥쳤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세상이었다. 처음에 여사장 밑에서 혼자 일하면서 너무 힘들었다.
자신의 몸이 80만 원을 받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설거지해야 할 접시들이 꽉 쌓여 있는 주방 바닥에 쭈그려 앉아 ‘내 몸 값어치가 이건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여사장에게 항의했다. 그러자 100만 원을 주겠다고 했다. 여사장이 덧붙여 제안했다. “우리 집 애들을 봐주면 20만 원을 더 주겠다.” 그때부터 사장의 집에 먼저 가서 아이들의 저녁밥을 챙겨주고 돌봐주고 다시 출근해서 120만 원을 받았다.
주점은 일요일도 일했다. 한 달에 두 번 쉬었는데, 나중에 구한 아줌마 하나와 같이 돌아가며 쉬어서 가게는 문을 닫는 법이 없었다. 새벽에 퇴근할 때 보아도 사방은 다른 주점의 간판들로 번쩍였다. 여사장은 돈을 많이 벌었다. 1년 주점을 하더니 몇 억을 벌어서 나갔다. 나갈 때 국수 한 그릇을 그녀에게 사주었다. 퇴직금도 받지 못하고 명선은 국수 한 그릇을 먹고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사장이 바뀌었다. 남자사장 밑에서 그녀는 주문이며 장부 정리, 카운터까지 맡아서 일했다. 그래서 130만 원을 받았고 그곳에서 5년을 일했다.
‘쎄 빠지게’ 일해도 권리는 없다
명선은 ‘인간시장에 온 기분이었다’고 그때를 표현했다. 주방에서 일하면서 ‘쎄가 빠졌다.’ 열 개가 넘는 방을 둘이서 치우다 손님이 오면 뛰쳐나오고 손님을 맞고 주방에서 안주를 만들어 또 날랐다. 주점에는 아가씨들이 있었다. 남자손님들이 ‘돈 주니 내 추태를 받으라’고 아가씨들에게 ‘별 꼬라지’를 다 부렸다. 남자 직원이 서빙을 하면 손님의 술병에 맞고 욕지거리를 들어야 하니까 서빙은 언제나 늙은 여자인 둘의 몫이었다. 방에 들어갈 때는 단정한 옷차림에 더 점잖은 모습으로 들어갔다. 그래야 군소리를 듣지 않았다.
머리가 아팠다. 담배 피고 술을 먹는 지하공간이 그녀의 일터였다. 기관지가 탈이 나더니 약해졌다. 낮밤이 바뀌어 그런지 정신이 늘 휘황했다. 허리에 협착증이 생겨서 서 있으면 통증이 왔다. 화장실 청소를 하다가 넘어져 무릎을 다쳤다. 연골이 찢어졌다고 했다. 내내 서서 일하니 발을 디딜 때마다 ‘바닥에 불이 나듯’ 아파왔다. 새벽에 돌아오는 길이면 길바닥에 앉아 뜨거운 발바닥을 긁어대었다. 집에 오면 아무것도 할 힘이 없어 핼쑥하게 누워 있다 다시 나갔다. 일이 벅찼다. 무엇보다 부끄러웠다.
“나 왜 이 돈을 받고 먹고 살아?”
명선이 한탄하며 말하자 함께 일하던 여자가 말했다.
“우리는 수고비 받는 거야. 자기들이 향락 즐겨 벌 받는 거는 사장이지, 우리는 노동해서 임금을 받는 거야. 노동의 대가야. 벌 받으면 사장이 벌 받지, 우리는 벌 안 받아.”
위로의 말이었다. 사장에게 “고용보험, 4대 보험을 들어달라”고 말했다. 들어주지 않았다. 사장은 그네가 노동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젊은 남자들이 손님으로 오면 명선을 보고 엄마라고 불렀다. 그 엄마 소리도 미안했다. “엄마가 얼마나 고귀한 이름인데 부끄러우니 그런 소리 하지 말아요.”라고 일렀다. 그냥 이모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녀는 그곳에서, ‘엄마’, ‘이모’였다. 저녁에는 아가씨들과 같이 만 원씩 거둬서 장을 봐서 밥을 직접 해먹었다. 아가씨들은 허기져했다. 밥을 많이 먹고, 시도 때도 없이 주방에 들어와 허겁지겁 밥을 먹었다. ‘술을 많이 먹어도 밥을 많이 먹으면, 과일을 많이 먹으면 몸이 덜 상할 거라’고 명선은 생각했다.
‘돈을 떠나 삶의 기쁨이 있어야 하는데 뭐하는 짓인가? 애들 키우는데 이런 꼴 봐야 하나?’ 그러나 그 속에서 아이를 대학 보냈다. 한 달에 20만 원을 딸아이에게 보내고 등록금을 내야 할 때는 100만 원을 보냈다. 딸은 엄마가 보내주는 돈을 받고 부족한 나머지는 학교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하거나 장학금을 받으며 메꾸었다. 그렇게 딸은 대학을 마쳤다.
명선이 말한다. “사방을 돌아봐도 벌어먹을 데가 없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일했다. 나이 많은데 감지덕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했다.” 같이 일하는 여자는 아들에게 차를 사줄 돈을 모으려고 일한다 했다. 사는 데 급급한 자신과 그이와는 처지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손님들이 줄어들었다. 사장은 일하는 두 아줌마 중 하나를 ‘자르겠다’고 했다. 명선은 일하게 되고 함께 일하던 여자가 나가게 되었다. 명선이 말했다.
“아니에요. 그러지 마세요. 같이 일하고 싶어요. 둘을 써주고 칠십만 원을 주시면 되잖아요.”
노동시간은 그대로였다. 그녀는 칠십만 원을 받으며 몇 달을 더 일했다. 명선이 일을 그만두기로 했을 때 남게 된 여자는 그녀에게 감사의 표시로 코트를 하나 사주었다. 그것을 받고 명선은 고맙다고 인사했다.
사장이 말했다. “이모, 나중에 퇴직금 드릴게요. 전화하세요.” 명선은 주점을 다시 찾아갔다. 가게는 넘어갔고 주인이 바뀌어 있었다. 몇 번을 다시 찾아가보았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니가 나이가 그만큼 먹도록 일한 것만도 감사하라’ 그녀의 귀에는 사장이 했던 말이 그렇게 다시 들렸다. ‘퇴직금이 없구나. 한 구석에서 몇 년 일해도 없구나.’ 몹시 씁쓸했다. 밤잠 못 자고 오륙 년을 일했는데, 사장들은 돈을 그렇게 벌어 건물을 사 나갔는데도 그랬다. 야비한 짓이었다. ‘전화하라더니, 퇴직금을 준다더니, 다른 사람 보는 앞에서 생색내더니, 사람을 두 번 희롱한 거야.’ 씁쓸했다.
일용직, 섧은 이름
4년제 대학을 졸업한 딸은 서울의 한 회사에 비정규직으로 취직했다. 딸이 150만 원이 되는 월급을 받으며 사회생활을 하기 시작한 게 든든했다. 큰딸은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고 두 아이를 낳았다. 그사이 명선은 주점에서 일하다 다친 무릎을 수술 받았다. 몇 년 동안 친척집 아이를 봐주기도 했다.
“전 쉰여덟이에요. 무릎이 좋진 않지만 아직 건강하고 성실하게 일을 잘해요. 좋은 일을 소개해주세요.”올해, 다시 일자리를 구하러 여성회관에 찾아가 명선은 그렇게 부탁했다. 소개로 찾아간 곳은 냉면 만드는 회사였다. 냉면 육수를 하청 받아서 만드는 곳이었다.
면접을 보러 갔는데 면접관이 자신을 쳐다보지 않고 지나치려 했다.
“안녕하세요?”
먼저 일어나 인사했다. 알고 있었다. ‘나이 먹어서 나를 꺼리는구나.’ 하지만 자신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려야 했다. 머리를 염색하고 올 걸 그랬다. 모자를 쓰고 있지 말 걸 그랬나. 저 사람 가고 나면 이 일을 못 구할 거라고 마음이 급했다.
그의 떨떠름한 첫마디는 이랬다.
“여기는 일이 일용직이고 언제 어느 시기에 어떻게 될지 몰라요. 괜찮아요?”
그녀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필요 없을 때 말하세요.”
쉰여덟에 유일하게 일터로 들어갈 수 있는 관문일 거 같아 그렇게 말했다. 모든 걸 접고 들어가야 일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랬다. 다른 이는 공장 내부 구경을 한 바퀴 시켜주었는데 자신에게는 내부 구경을 시켜주지도 않았다. 공장을 제대로 보고 싶었지만 사람들은 그냥 자기 앞을 지나쳤다.
“내일 와도 될까요?” 명선이 물었지만 대답이 없었다.
“월요일부터 올까요?” 다시 물었다. 그렇게 하라는 답이 뒤늦게 왔다.
명선의 뒤에 면접을 본 사람들은 사십대 초반의 여자들이었다. 마트에 다닌 적 있다는 두 사람은 야무졌다. 월급이 얼마인지 확실히 하고 자기가 일용직 아닌 정규직이라는 것을 확인받고서야 들어오겠다고 했다. 같은 일을 하고 같은 월급을 받는데 정규직과 일용직의 기준이 없었다. 공장에는 모두 열다섯 명이 일했다. 냉면 만드는 곳에는 여자들이 다섯 명 일하고 육수 만드는 곳에는 육수를 담는 여자들과 큰 봉지를 담당하는 남자, 박스 이동을 맡는 이들이 있었다.
명선이 하는 일은 육수를 담는 것이었다. 냉면 육수는 기계를 따라 똑같이 손을 움직여 포장해야 했다. 육수를 큰 통에 끓여 즙을 내리는 통에 담아 똑똑 떨어지는 액체를 받은 다음 냉동시키기 위해 박스에 담아 식혀 다섯 개씩 포장했다. 손이 정신없이 돌아갔고 일을 끝내도 손이 뻐근했다. 아침 여덟시 반부터 저녁 여섯시까지 일했다. 다행히 토요일과 일요일은 쉬었다. 월급은 만근수당, 특별수당, 차비까지 포함해 108만 5천 원이었다.
파김치가 되어, 서로를 뜯어먹으며
명선은 열심히 일하려고 했다. 하지만 주위를 청소라도 할라치면 정규직 동료들이 싫은 소리를 했다. “더 일하지 말아요. 우리만 더 힘들어지니까.”
명선이 웃었다. 자기 같은 건 경계하지 않아도 된다는 웃음이었다. “괜찮아요, 나는 일용직이니까.”
날카로운 대꾸가 되돌아왔다. “일용직이니까 더 하면 안 되지!”
명선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속으로 되물었다. ‘넌 뭐가 무서운 거냐?’
필리핀이나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여자들도 같이 일했다. 명선의 일당은 4만 5천원이지만 인력사무소에서 오는 외국인 노동자는 일당이 6만원이었다. 인력사무소에 수수료를 떼어주겠지만 그들이 자신보다 더 많이 받는 것 같았다.
같이 일하는 필리핀 여자는 늘 아프다는 소리를 명선에게 했다. 덩치도 작고 여윈 여자였다. 육수를 담은 무거운 상자를 같이 들어야 할 때 “언니, 나 아파, 아파” 하고 말했다. 자궁수술을 받았다며 배에 난 수술자국도 보여주였다. 그 얘기를 들은 다른 한국 여자가 더 의기양양하게 화를 내었다. “명선 씨가 만만해서 골탕 먹이는 거야, 걔가!” 그 여자가 필리핀 여자 앞에 우뚝 서서 고함을 질렀다. “야! 똑같이 돈 받고 하는데 왜 너 혼자 안 해, 해!” 그 후로 그 여자는 필리핀 여자에게 힘든 일을 시키고 자신은 더 쉬운 일을 골라 했다. 명선은 필리핀 여자가 아픈 게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그 한국 여자가 사람을 부려가며 일하는 방식이 나쁘다고 혼자 생각했다.
일을 할수록 자신이 나이가 들었다는 것, 젊은 사람과 달리 이제 힘이 달린다는 것을 느꼈다. 공통 작업화를 신고 뜨거운 것을 들었을 때 뒷걸음질 치다가 신발이 벗겨져 큰 사고가 날 뻔하기도 했다. ‘일용직이라고 4대 보험 같은 건 들어주지 않았는데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겠다.’ 같이 일하는 정규직은 4대보험이 보장되어 있었다. 명선은 무거운 육수를 박스 같은 것에 담아 들고 가면서 허리가 아프고 힘에 부쳤지만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석 달 정도 일했을 때였다. 어느 날 가니까 일거리가 없었다. ‘일거리가 있다 없다 하나보다.’ 주는 일감은 없었지만 명선은 일을 찾아서 했다. 맑은 날이었다. 주위를 청소하고 풀도 뽑고 비가 오면 넘칠 테니 하수구도 뚫고 모래도 나르고 도랑을 치웠다. 사흘 동안 혼자 계속 일했다.
그리고 물어보았다.
“왜 일거리가 없나요? 사장님.”
“그렇게 됐다. 회사도 일거리도 없고 그만두려 했는데”
“얼마간 있다 그만둬요?” 대답이 없었다.
그녀가 다시 물었다.
“내일부터 그만둬요?”
“그래.”
짧고 분명한 답이었다. 울컥 서러웠다. 냉면이니까, 여름이 끝날 때까지는 일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래, 나같이 나이 먹어 너무 설치는 것도 밉상스럽겠다.’ 자신을 깎아내려 스스로 다독거리려 해도 서러웠다.
면 만드는 곳에서는 세 사람이 해고되었다. 육수가 고깃국물이 아니라 조미료 국물이라고 방송에 나온 탓인 거 같기도 했다. 물건이 나가지 않고 스톱이 되고, 물건을 해둔 양은 창고에 꽉 찼다. 다 쫓겨난 것은 아니었다. 들어올 때 정규직을 약속받고 온 이는 남아 있고, 명선처럼 일용직이라고 들어온 이들이 먼저 쫓겨났다. 명선의 뒤에 정규직으로 들어온 여자 둘은 계속 일하고 있었다. 그렇게 ‘사람들은 파김치가 되도록 일하고 서로 뜯어먹으며’ 살고 있었다.
‘단념’해야 살 수 있는 사람
▲ 윤명선 씨의 수첩에 적힌 메모. © 안미선
“나는 일을 하면서 저항을 못했어. 말을 못하고 목이 싸하고 가슴이 답답해도 ‘생각하지 말자, 버려야 내가 산다.’ 그렇게 살았어. 힘든 거, 슬픈 거 감정은 나에게 다 사치다, 살기 위해 버려야 한다, 그렇게 생각했어. 일하다 오십견이 왔는데 아픈 거도 나는 사치라고 생각했어. 병원도 안 가고 자석목걸이를 하고 팔을 위로 올리고 자고 옆으로 해서 자고. 그런데 자다가 심장이 두근거리거나 갑자기 눈을 번쩍 떠져. 난 괜찮은데 내 몸과 정신은 안 그런가봐. 그러면 ‘이게 아니구나’ 내 몸은 아니라고 하는구나 하는 걸 알게 되지.
사람들에게, 세상에 실망하게 돼. 말을 하지는 않지만 속으로 늘 그렇게 대꾸하지. ‘겨우 이거였어?’ ‘이거야?’ ‘이것뿐이구나.’ 나는 내 지나간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 희망찬 이야기만 하고 싶어.”
그리고 잠시 후 그녀는 덧붙였다.
“내가 희망을 얘기하고 싶은 건 희망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몰라. 지난 일을 떠올리면 가슴이 아리니까. 가슴이 아린 건 느끼고 싶지 않아. 나는 더를 바라지 않는 사람 같애. 대화를 많이 하고 합리적으로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없었어. 미운 사람은 없어. 다시 살면 다르게 살고 싶어. 아니, 세상을 알았으니까 새로운 게 없으니까 나는 다시 살고 싶지는 않아.”
명선은 집에 있다. 함께 사는 큰딸이 집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할 일을 찾지 못하고, 마땅히 할 일이 없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작고 어두컴컴한 아파트 안에서 정작 돈을 버는 사람이 없는 이 지루한 여름이 마음에 걸린다. 명선은 국민연금으로 20만 원을 받고 생활한다. 가끔 큰딸은 술을 먹고 “엄마는 내 속을 몰라.” 하고 울었다. 그때마다 집에 돈이 없다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된다. 명선은 그래도 겁나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딱 단념을 했지. 내가 살려면 단념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
구석자리에서 줄곧 일해 온 사람, 언제나 떠나라 하면 군소리 없이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 하는 일을 부끄러워하면서도 자기보다 다른 이의 일자리를 먼저 걱정한 사람, 노동한다는 인정을 한 번도 받지 못한 사람, 하지만 언제나 일했던 사람, 그 착한 사람 윤명선은 단념을 해서 지금 웃을 수 있다.
안미선/ 르포작가. <여성주의 저널 일다> 바로가기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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