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동성애자 청소년이 겪는 폭력과 절망
<법 앞에 선 성소수자> 청소년 동성애자 (1) 
 
[여성주의 저널 <일다>는 공익변호사그룹 <공감>과 공동 기획으로, 우리 법이 성소수자 인권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살펴보는 <법 앞에 선 성소수자> 기사를 연재합니다. 필자 정명화님은 연세대학교 총여학생회와 <공감>에서 인턴으로 활동한 경험을 바탕으로, 소송과 판례 분석을 통해 성소수자 인권 현황을 보여줄 것입니다. –일다 www.ildaro.com]
 
중학교 성교육 시간에 접한 “청소년 동성애자”
 
내가 ‘동성애자’를 처음 본 것은 중학교 2학년 무렵이었다. 그날은 학교에서 중학교 2학년 전체를 대상으로 성교육을 하는 날이었다. 때문에 학생들은 오전 수업만 마치고 성교육을 받기 위해 구청 강당으로 갔다.
 
갇혀있던 자들이 보통 그러하듯 우리 역시 네모난 교실을 벗어나는 사소한 일탈에 감격해 있었고, 나는 단짝들과 더위사냥을 나눠먹으며 들뜬 얼굴로 재잘거렸다. 혹은 쌍쌍바였던가? 워낙 오래 전 일이라 자세한 것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 들었던 성교육만은 유독 또렷하게 생각난다.
 
대충 자리가 채워지자 조명이 일제히 꺼지고, 강당 앞쪽에 위치한 스크린에 빛과 소리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신촌 공원에서 생활하는 10대 레즈비언에 대한 다큐멘터리였다. 영상 속에서 공원은 언제나 밤이었고, 우리가 앉아있던 강당보다도 훨씬 어두워 보였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등장하는 소녀들의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로 인해 흉하게 어그러져 있었다. 심지어 목소리는 너무 높은 음조로 변조되어 알아들으려는 시도를 하기조차 괴로웠다.
 
당연한 일이지만 다큐멘터리를 진행하는 인물은 소녀들이 아닌 나레이터였고, 그는 소녀들을 “동성애자 청소년”라고 불렀다. 화면 속의 “동성애자 청소년”들은 벽도 지붕도 없는 한데서 담배를 태웠고, 발밑으로는 과자봉지나 빈 깡통 따위가 맥없이 뒹굴 거렸다. 그 광경은 지저분했고 불법적으로 보였다. 담배 끝에서 퍼지는 주황색 불빛만이 영상 전체에서 유일하게 밝은 부분이었다.
 
마지막에 이르자 나레이터는 분명한 목소리로 “동성애자 청소년”의 문화 전체를 비행이라 규정하며, 사회는 이들을 선도하기 위해 손을 뻗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당을 나와 하교하는 길, 나와 친구들은 별 말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어쩌면 날씨에 대해서 뭔가 얘기를 했을지도 모르지만, 그 영상에 대해서는 어떤 말도 나누지 않았다. 우리는 여자중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우리 주변엔 “동성애자 청소년”이 많이 있었다.
 
어떤 아이는 ‘칼머리’를 하고 있었고, 어떤 아이는 다른 반 여자애를 짝사랑하느라 연일 골머리를 앓았으며, 나는 한 학년 위의 여자 선배를 쫓아다니는 왈가닥으로 유명했다. 그 선배는 나이에 비해 키가 큰 편이었는데, 축제 때마다 풍채만큼이나 시원시원한 동작으로 남자 아이돌의 춤을 추어 전교적인 스타가 되곤 했다.
 
그러므로 내가 성교육시간에 처음 본 것은 “동성애자”는 아니었다. 이미 나는 스스로를 ‘이반’(異般. 이성애자를 ‘일반’인이라고 보는 시각에 대해 역설적인 의미로 성소수자들이 스스로를 칭하는 말)이라 소개하는 친구, 규범과 다른 젠더 표현을 하는 친구를 여럿 알고 있었다. 여자중학교에서 멋진 언니에게 호감을 품거나 단짝 친구에게 질투를 표현하는 동성애적 욕망은 별로 특이할 것도 아니었다.
 
정확히 말해 성교육 시간에 내가 처음 배운 것은 “청소년 동성애자를 보는 사회의 시선”에 가까웠다. 다큐멘터리 속에서 청소년 동성애자는 “비행”했고, “불량”했고, 무엇보다 “불쌍”해 보였다. 그 시선이 너무나 단호했던 까닭에 일순간 나는 그동안 내가 사랑했던 친구들, 언니들, 우리가 다녔던 중학교 전체가 이상해 보일 지경이었다.
 
성소수자 학생을 못살게 구는 가정과 학교 

▲  10대 레즈비언 학교폭력에 관한 다큐멘터리 <이반검열1>  스틸컷.   © 출처 - 여성영상집단 '움' 
 
이후에 나는 대학교에서 여성주의 활동을 하면서, 그때 받았던 성교육이 호모포비아(동성애 혐오증)에 찌든 문화물임을 알게 되었다. 그 이후에 나는 대한민국에서 청소년 성소수자가 겪어야 하는, 나 역시 겪었던 가혹한 세계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되었다.
 
많은 어른들은 청소년을 무성적이고, 무지한 동시에 유혹에 약한 존재로 가정한다. 그러면서 청소년에게 정상적인 젠더나 섹슈얼리티를 주입하기 위한 무수한 장치를 마련해놓고 있다. 가정에서는 모든 자녀가 이성애자로 태어나고, 이성애자로 자란다고 가정한다. 학교에서는 성교육이란 명목으로 올바른 이성교제의 행동양식을 나열하며 이성애주의를 설파하거나, 임신의 과정 혹은 낙태의 잔혹함을 담은 영상을 틀어주면서 여성의 모성성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들려고 했다.
 
이 와중에 어른들 보기에 ‘비정상적’인 젠더나 섹슈얼리티를 표현하는 청소년들은 지은 죄도 없이 혹독한 벌을 받아야 했다. 셀프 다큐멘터리 <이반검열>에 등장하는 천재는 학교에 성소수자라는 사실이 알려져 고등학교를 그만둔다. 영화 속에서 학교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 레즈비언을 색출하고, 스킨십에 따라 벌점을 매기거나, 머리를 짧게 자르지 못하게 하는 등 학생들의 행동에 제재를 가한다. 또래 친구들은 ‘이반’으로 알려진 주인공들을 잔인하게 따돌려서, 그들을 투명인간으로 전락시킨다.
 
이외에도 끔찍한 장면들은 많지만, 그보다 절망적인 진실은 이 영화가 특정한 한 청소년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데서 온다. 지금 이 순간에도 대한민국의 청소년 성소수자들은 일상적인 폭력을 경험하고 있다.
 
2005년 서울대학교 사회복지대학원 강병철ㆍ하경희씨가 연구한 “청소년 동성애자의 동성애 관련 특성이 자살위험성에 미치는 영향”에는, 한국의 13살에서 23살 사이의 청소년 동성애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가 나온다. 청소년 동성애자의 절반 이상(52.9%)이 욕설 등 언어폭력을 당한 적이 있고, 20%는 신체적인 폭력을 당하거나 소지품이 망가진 적이 있으며, 무기로 공격하는 등 심각한 수준의 폭력을 당한 경우도 10%가 넘었다.
 
‘아우팅’(동성애자나 성소수자의 성 정체성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타인에 의해 폭로되는 일)도 심각한 문제였다. 대상자 중 32.4%가 아우팅을 당한 적이 있고, 이 중 14명이 아우팅으로 인해 친구와 교사에게서 부당한 처우를 받았다고 응답했다.
 
이 설문결과에서 가장 묵직하게 다가오는 통계는 ‘자살’에 관한 항목이다. 조사 대상자의 70% 이상이 자살에 대해 생각해본 경험이 있고, 18.1%가 ‘매우 자주 해봤다’고 응답했으며, 실제 자살을 시도해본 경우가 45.7%로 절반 가까이에 이르렀다. 아마도 그들 중 다수는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자신의 성별 정체성을 부정해야 했을 테고, 혹여 긍정했다가는 호된 처벌을 받았을 것이다.
 
삶을 포기하려는 청소년들의 고통에 다가갈 수 있길
 
학교와 가정은 청소년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며, 이전 시대를 살아온 선생들의 가르침을 받아 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한 훈련을 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어쩌면 청소년 성소수자들은 선조들이 안내하는 사회에서 자신의 미래를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자신이 살아가야 할 세상에 도저히 자신의 존재를 대입해볼 수 없었던 사람들, 선생과 부모가 전해주는 이성애주의, 남녀라는 이분법으로 나뉜 젠더 규범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가감 없이 부정당했던 사람들. 나는 어쩌면 그 청소년들이 사회가 행하는 성소수자에 대한 실질적/상징적 타살에 절망한 나머지, 스스로의 힘으로 자살하기를 택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분명한 것은 지금 살아있는 우리가 이들의 죽음에 어떤 식으로든 응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까지 ‘계속되는 해고와 가망 없는 복직’이라는 상황에 처한 쌍용자동차 노동자 13명이 연이어 자살을 택했다. 그들 중 누구도 유서를 남기지 않았지만, 우리는 대기업의 이윤 논리에 의해 단번에 정리해고가 감행되는 것을 목격했고, 해고된 노동자들이 감당해야 하는 어마어마한 허망함과 가난을 나눠지지 않는 사회의 모습도 알고 있다. 그들의 죽음은 우리에게 이 시대 자본이 앗아가는 삶의 기반이 무엇인지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자살은 개인의 결단에서 비롯하기 때문에 그 이유를 일반화하기 어려운 사건 중 하나이다. 하지만 특정 집단에서 자살을 선택하는 비율이 표준치를 훨씬 상회한다는 통계는, 단지 개인의 일로만 넘겨버리기 어려운 사회적 현상이기도 하다. 청소년 성소수자의 자살도 마찬가지다.
 
살아온 날보다 훨씬 많이 남아있는 살아갈 날 전체를 통째로 포기하려는 청소년들을 보며, 우리는 무언가 끈질기게 생각해야 한다. 이들이 처한 상황을 구체적으로 상상하면서 그들이 겪었을 고통을 사회가 공유하는 ‘공적 감정’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그래야만 한다’는 나의 의지이자 희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모두에게 적용되는 의무이기도 하다. 지금 살아있는 자들은 여태껏 살아왔다는 그 사실만으로 이 사회를 유지하는 일에 어떻게든 한 발을 담가왔기 때문이다.  <정명화>
 
* 여성 저널리스트들의 독립언론 <일다> 바로가기 www.ildaro.com

댓글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