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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으로 말하다

상담소 가는 길

일다 2012. 7. 8. 07:30

오늘은 상담을 받으러 가는 날이다
<꽃을 던지고 싶다> 9. 조금씩 삶을 회복시키기 위해 
 
[성폭력 피해생존자의 기록, “꽃을 던지고 싶다”가 연재되고 있습니다.  -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꿈을 꾸고 난 뒤 나는 한 여성단체 상담소를 찾아갔다. 그 뒤로 그 단체의 소개로 지금의 상담선생님을 만나, 중간에 가끔 중단하기도 하고 도망치기는 했지만 여전히 상담을 진행하고 있다.
 
페미니즘을 알게 되고 나에게 일어났던 일들이 나의 잘못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또한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여성들이 나와 같은 경험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후 나에게 있었던 죄의식이나 스스로를 가두어 두었던 편견들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계속되는 불면과 두통은 나아지지 않았고 우울감도 사라지지는 않았다. 원인을 찾았다고 해서 오래된 마음의 상처가 나아지지는 않았다. 여자이기에 내가 경험했던 불합리한 일들이 설명되더라도 나의 상처가 회복되는 것은 아니었다.
 
회복하기 위해서는 상처를 안고 있던 시간만큼, 아니면 그 이상의 지난한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이다.
 
오늘은 상담을 받으러 가는 날이다. 상담을 받는 것이 여전히 내가 정상적이지 않고 괜찮지가 않다고 인정하는 것 같아 싫을 때가 있다. 무엇보다도 여전히 상담의 대부분을 눈물로 보내야 하는 것이 싫다. 언제쯤이면 울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가?
 
상담을 시작하고 처음에는 ‘나는 강간을 당했어요.’라는 말밖에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나는 이제 나의 기억들을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세세하게 그 때의 그 고통으로 들어가 이야기하고 있다. 운이 좋게도 난 지금은 안전하게 지지를 받으며 그 고통들을 이야기하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집에서 족히 2시간 거리의 상담소에 가기 위해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안정을 취하고, 손에는 좋아하는 책을 들고 지하철을 타고 움직인다. 지하철에서 어린 아이들을 만나게 되면 가슴에 아련한 통증이 느껴진다. 나는 저 나이 때에 저런 웃음을 지을 수 있었을까? 기억이 없다. 나에게도 즐거운 일상들이 있었을 터인데 이상하게도 좋았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저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을 항상 지켜줄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무엇보다 갓난아이를 안고 있는 젊은 엄마의 모습에 눈이 시리다. 젊고 아름답고 생기가 있어 보인다. 그리고 환한 미소로 아이를 내려다보는 그 눈이 너무도 선하다. 나에게도 아이가 있었으면 좋겠다. 온전히 나를 의지하며 내가 헌신할 수 있는 새 생명.
 
초등학교 4학년 다른 친구들보다 조금 일찍 월경을 시작한 나는, 나중에 어른이 되면 아이를 많이 낳아서 그 아이들과 평범한 일상들을 만들고 싶었다. 폭력이 없는 안정적인 가정을 꾸미는 그런 꿈을 잠시 가져본 적이 있었다는 생각이 스치듯 지나간다. 삼촌의 폭력이 있은 후 난 아이를 낳을 자궁도, 아이를 수유할 수 있는 젖가슴도 다 더렵혀졌다고 생각했다. 내가 조금 더 일찍 페미니즘을 만나고 나의 죄의식에서 벗어났다면 가능했을까? 나를 닮은 생명을 잉태하는 일이.
 
아이를 향해 미소를 짓는 나에게 그 젊은 여성은 방어를 거두고 ‘이제 백일 지났어요. 여자아이인데….’ 라며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다. 그 말에 사랑이 묻어난다. 나도 누군가에게 소중한 생명이었던가? 나도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존재였던가? 눈물이 나려고 해서 한 정거장 전에 아이와 젊은 엄마에게 눈인사를 건네고 내린다. 걸어가기엔 조금 더운 날씨지만 아무 때나 터져 나오는 눈물이 잘 멈추지 않아 차라리 걷는 편이 낫겠다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출근을 한 오전 열 시의 종로는 한가롭다. 밤의 화려함도 소란스러움도 분주함도 높은 건물들이 다 삼켜버린 듯, 가끔씩 보이는 홈리스분들 외에는 눈이 가는 곳이 없다.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오늘은 엄마 이야기를 하기로 했는데 왠지 이야기를 꺼내면 또 다시 무너질 것 같다. 딴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인사동 길로 접어든다. 고등학교 때부터 갤러리들을 다니면서 그림을 보는 것이 좋아서 골목 하나하나 세세하게 기억할 정도로 익숙한 길. 20년의 세월이 지났어도 여전히 20년 전의 풍경들이 남아 있다. 익숙한 거리 익숙한 건물들이 편안함을 준다.
 
계동으로 접어들면서 상담소가 가까워짐을 느끼는 순간 마음이 무거워진다. 엄마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더 힘들게 한다.
 
편안하게 꾸며진 상담소. 서울대학병원에서부터 이곳까지 상담선생님을 만나온 것이 몇 번이나 될까? 항상 내일에 대한 기대가 없는 나는 숫자를 적립하는데 익숙하지 않다. 애인과의 기념일, 가족들의 생일, 친구들의 생일 모두가 나에게 어려운 일이니 어쩌면 기억을 못하는 것이 당연할 지도 모른다. 40번은 넘은 것 같고… 앞으로는 얼마나 지속해야 하는 것일까?
 
편안하게 반겨주는 선생님을 따라 상담실로 들어간다.
 
때로는 상담선생님에게 당신이 내가 겪은 고통을 알 수 있겠냐며 비아냥거리기도 하고, 내가 그 사건들을 통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나의 고통이 무엇인지 당신 같은 잘난 여자는 모른다고 심술도 부려보지만, 나는 그녀에게 한없이 고마워한다. 세상 그 누구보다 나의 내밀한 이야기를 알고 있고 나의 회복을 누구보다 기대하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상담은 둘이 함께 하는 공동작업이기에, 나는 성실하고자 노력하고 그녀 또한 그럴 것이다. 그리고 힘든 과정이지만 꼭 필요한 과정임을 나는 알고 있다.
 
또 주변의 성폭력 생존자들이 상담사로부터 2차 가해를 경험하고 상담을 포기하는 경우를 본 적이 많은지라, 좋은 상담사를 만난 나는 운이 좋은 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오늘은 눈물이 더 멈추지 않는다. ‘엄마’ 그녀의 너무나 불행한 삶이 가여워서 견딜 수 없지만, 그녀가 나에게 했던 폭력과 방임에 대해 그녀를 용서할 수도 없다. 상담을 시작하면서 그녀도 상담을 받을 수 있었으면 바랐고, 내가 좀더 괜찮아져서 지금도 가해오는 그녀의 폭력을 견뎌낼 수 있었으면 했다. 그렇게 그녀와 관계를 회복하고 싶었다.
 
나는 그녀가 어찌 살았는지 알기에 원망하는 것조차 죄의식이 든다. 그러나 그녀를 나는 5년째 만나지 못하고 있다. 2년만 나에게 시간을 달라고 청했는데 5년이나 지나버렸다. 여전히 ‘엄마’라는 존재는 나에게 생채기를 준다. 살아오면서 그녀에게 들었던 욕설과 저주스러운 말들, 그리고 나 때문에 참고 살았기에 내가 당신의 삶을 보상해야 한다고 내 삶을 마음대로 흔들려고 했던, 그리고 흔들렸던 순간들. 여전히 당신 맘에 들지 않는 못난 딸인 것이 더욱 아픈 지도 모르겠다.
 
'남들 다 하는 결혼도 못하는 년', '가르쳐 놓았어도 사람구실도 못하는 일생 폐만 끼치는 년'이라고 어젯밤 꿈에도 그녀는 나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꿈속에서의 말들이 너무 익숙해서 화살처럼 날아와 박힌다.
 
약속되었던 2시간의 시간이 다 되어옴을, 상담실 밖에서 들려오는 다른 내담자의 목소리에 나는 서둘러 말을 정리한다. ‘때때로 상담실에서 나의 고통들을 이야기하다가 미처 그 감정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상담실을 나오는 순간 선생님에게마저 버림받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했던 지난 번의 나의 말이 걸리시는지, 선생님이 서두르는 나에게 나가도 괜찮겠냐고 물어오신다. 나는 괜찮다고 말을 한다.
 
밖으로 나오니 해가 쨍하니 눈이 부시다. 6월의 햇살은 너무도 눈부시다. 그러나 너무 울어서인지 안개가 낀 것처럼 온통 뿌옇다. 눈이 아프다. 마치 4시간 등산을 마친 것처럼 온 몸에 피로감이 밀려온다. 쉬고 싶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걷다가 커피숍으로 찾아 든다. 비싼 커피에 돈을 쓰지 않겠다고 생각하였지만 조금 쉬어야 갈 수 있을 듯하다. 오늘은 힘들었으니 맛있는 커피 정도는 스스로에게 선물해줘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아메리카노에 샷을 추가한 커피를 주문하고 기다린다. 진한 커피가 피로를 조금 견디게 해주리라.
 
집에 가면 아마도 늘 그렇듯이 그대로 잠들 것이고 내일 아침에야 정신을 차릴 것이다. 이렇게 하루를 잠으로 보내는 것이 싫다는 생각을 한다. 상담을 하는 것이 여전히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상담 받는 것도 나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선생님 말씀처럼 고통이 나를 지배하지 않는 날이 올 거라 믿기에 나는 다음에도 상담실로 향할 것이고, 또 꺼내기 싫은 이야기를 하고 지친 마음과 몸으로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앞으로 몇 번을 수없이 반복해야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나는 아주 조금씩 나의 삶을 회복시켜 갈 것이다. (너울)
 
        * 여성저널리스트들의 유쾌한 실험! 인터넷 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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