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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야, 귀촌을 이야기하다: 가슴에 또 한 그루의 나무가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밤꽃 필 때 콩을 심으면 틀림없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다. 이런 종류의 표현은 왠지 모르게 신뢰를 줄 뿐 아니라 멋스럽기까지 하다. 오래도록 자연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온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기에 그렇다.
 
지난 주말, 밭에 콩을 심고 해질녘에 내려오는데, 아닌 게 아니라 산마다 흐드러진 밤꽃들로 가득한 게 눈에 들어왔다. 소나무 꽃가루를 뒤집어 쓴 듯 텁텁해 보이는 그 풍경 속을 걷자니, 실제인지 착각인지 밤꽃 특유의 비릿한 냄새가 진동하는 것도 같았다. 

▲  비릿한 밤꽃 향기가 진동하는 계절이면, 먼 옛날 내게 첫 나무가 되어준 그 밤나무가 떠오른다.   © 자야 
 

내게는 특별했던 뒷간 옆 밤나무  
 
이십 년하고도 몇 년쯤 전인가. 경북에서도 오지에 속하는 영양군으로 농활을 갔었다. 당시에 농활은 흔히 말하는 의식화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노동을 등한시한 것은 아니어서, 몸을 써본 일이 드문 우리 학생들은 낮이고 밤이고 끙끙 앓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살았다.
 
먹고 씻고 자는 일상이 도시에서처럼 편했다면 몸이 덜 고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시절의 시골집이란 하나부터 열까지 순 옛날식이어서 무엇 하나 녹록치 않았고, 특히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여학생들은 배변에 어려움을 겪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다들 만성 변비 환자인데다, 집 뒤편에 세워진 화장실이 일명 '푸세식'이라 불리는 재래식 뒷간이어서 사용하기가 상당히 불편했기 때문이다.
 
때는 7월 말. 좁고 어두운 뒷간에는 늘 파리와 모기가 들끓었고, 가끔은 누렇고 통통한 구더기 몇 마리가 꼬물대기도 했다. 더군다나 거기서 풍기는 지독한 냄새는 단순히 똥오줌 냄새라고 하기엔 뭐랄까, 너무 비릿하고 야릇했다고 할까.
 
뒷간에 다녀온 이들이 다들 그 냄새에 대해 툴툴거리자, 하루는 남쪽지방 시골에서 나고 자란 한 선배가 이렇게 말했다. 느그들이 잘 모르는 모양인데, 그거시 뭐다냐 밤꽃 냄새여. 도시에서만 살아놔서 야들이 순 무식하구마.
 
나중에 가서 보니 정말로 뒷간 근처에는 제법 오래돼 보이는 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었고, 나는 그것이 밤나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남은 힘을 다해 막바지 꽃을 피우고 있느라 그런가, 나무는 좀 지쳐 보였다. 그에 반해 꽃들은 어찌나 생생하던지. 그것들은 곧 져버릴 운명을 예감한 듯 욕망을 한껏 분출하고 있었고, 그래서인지 냄새가 더욱 강렬하게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며칠을 먹기만 하고 내보내지는 못하는 고통 속에서 신음하던 나는 늦은 밤 홀로 일어나 휴지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자정이 가까운 늦은 시각이어서 무섭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기엔 아랫배가 너무 무겁고 더부룩했다.
 
몇 번을 망설인 끝에 뒷간에 들어가 앉는 데 성공한 나는, 들고 간 랜턴을 끄고 문을 살짝 열어 두었다. 장마철의 습한 대기 속에서 예의 그 냄새가 심하게 코를 찔렀지만, 시간이 좀 지나니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마침 달빛이 은은하게 비추고 있어서 그런지, 오히려 다른 때와 다르게 그 밤나무는 근사하다 못해 신비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하여 나는 뒷간에 쭈그려 앉아 있다는 것도 잊은 채 한동안 넋을 놓고 그 나무를 찬찬히 바라볼 수 있었다.
 
개념이 아닌 실체와 관계 맺기          
 
돌이켜보면 그 해 농활을 경험하기 이전의 내게, 나무란 단지 추상적인 개념으로서의 나무였던 것 같다. 나무는 이러이러하다는 고정관념에 갇혀, 고유의 뿌리와 줄기와 잎과 꽃을 지닌, 실제로 존재하는 나무와는 만날 수 없었다는 얘기다. 그래서 미술시간이 되면 나무를 보지 않고서도 머릿속에 저장돼 있는 특정한 이미지대로 나무를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점에서 늦은 밤 홀로 뒷간에 앉아 달빛 아래 밤나무를 바라본 것이야말로, 내가 한 그루의 나무를 구체적인 대상으로 인지하고 접촉하고 느낀 최초의 사건이 아니었나 싶다. 그날 밤을 계기로 비로소 한 나무의 다양한 면면들, 이를테면 크기와 두께와 표피의 결과 꽃의 형태와 색깔 따위의, 매일 보면서도 몰랐던 것들을 알아차릴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한 번 그런 경험을 하고 나니 그 밤나무뿐 아니라 다른 나무들도 고유의 몸을 지닌 실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중에 특히 기억나는 것은, 선배 하나와 같은 조가 되어 고추밭에 풀을 매러 갔을 때 본 아카시 나무다.
 
'얼마 안 되니까 천천히들 하라'는 할머니의 말과 달리 광활하기 이를 데 없는 고추밭에 파묻혀 둘이 고개 한 번 들지 않고 두어 시간쯤 풀을 매고 났을 때. 도저히 더 이상은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한 우리는 밭 위로 봉긋 솟은 둔덕 위로 올라가 나무 그늘에 기대어 앉았다. 분명 한낮인데도 밤보다 더 적막한 하늘 아래서, 한동안 이어지던 침묵을 깨고 선배가 내게 물었다. "너, 이 나무가 뭔지 알아?"
 
어디서 학습된 건지는 몰라도 시골에 있으면 다 느티나무라고 생각해 온 내게, 선배는 그 나무의 이름을 알려주는 대신 “동구 밖 과수원길”로 시작하는 동요를 불러 주었다. 그러고는 바닥에 떨어진 잎을 줍더니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이긴 사람이 잎을 하나씩 손가락으로 퉁겨내는 게임을 하자고 했다. 그 제안은 좀 뜬금없기는 했어도, 아무튼 그걸 계기로 나는 아카시 나무를 요리조리 살펴보고 만져보며 하나의 온전한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경험을 했다.
 
농활이 끝나고 복잡한 세속도시로 돌아온 이후, 하나하나의 나무를 관찰하고 봐주고 알아가면서 일대일로 관계 맺는 법을 내가 빠르게 잊었음은 물론이다. 그렇다고 내 몸에 각인된 기억까지 완전히 소멸된 건 아닌지 간혹 지구상에 하나밖에 없는 그 밤나무와 아카시 나무가 떠올랐고, 그럴 때면 나는 알 수 없는 그리움에 괜히 먹먹해하곤 했다.
 
포플러 아래서 사랑을 느끼다     

▲산 아래 밭으로 향하는 길목 옆 둔덕에 서 있는 포플러 나무. 하나의 대상이 지닌 구체성과 고유성에 눈뜸으로써 사랑이 시작되는 것을, 나는 또 한 번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 자야 
 
내가 농활 중에 그와 같은 경험을 한 것이 우연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목적이 무엇이었건 간에 그때 나는 난생 처음 자연 한가운데 있었으니까. 보고 듣고 느끼고 생활하는 모든 것이 어쩔 수 없이 자연과 연결되어 있었으니까. 그러니 비단 나무뿐 아니라 하늘과 흙과 잡풀과 들꽃마저도 보통 때와는 다르게 다가오지 않았겠는가.
 
도시에서 자연이 관념이고 이미지라면, 시골에서는 내 세포 하나하나를 반응하게 하는 실물이다. 하여 단지 내가 키우고 가꾸는 작물뿐 아니라 풀과 곤충과 나무들에도 전에 없던 관심이 생기고 궁금증이 커진다. 이것의 이름은 무엇인지, 저것의 특성은 어떤지 알고 싶어지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다 보면 어느 순간 그냥 나비였던 것이 배추흰나비와 노랑나비와 호랑나비로, 뭉뚱그려 잡초로 인식되던 것이 바랭이와 꽃마리와 괭이밥으로 달리 보이기 시작하는데, 이때 싹트는 감정이 참으로 묘하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왠지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진다고 해야 하나.
 
"나무를 세기 시작하면서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다 다름을 알게 되었고, 그러자 나무에 대해 사랑하는 마음이 폭발적으로 생겼다"고 고백한 강판권(『어느 인문학자의 나무 세기』 저자)씨만큼은 못 되도, 나의 가슴 뭉클함이 어쩌면 그가 말하는 사랑하는 마음과 조금은 통하는 구석이 있는 건 아닌지.
 
최근에 나는, 그 옛날 밤나무와 아카시 나무가 그랬듯 또 한 그루의 나무가 가슴 속에 파고드는 것을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무더운 어느 날, 그것도 볕이 가장 강하다는 두세 시경에 홀로 밭을 둘러보고 내려오는 길이었다. 어디선가 불현듯 파도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나는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보이는 거라곤 전부 산뿐이었으나, 가만히 멈춰선 순간에도, 그리고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을 때도 내 귀를 적시는 청아한 그 소리는 계속되었고, 그때부터 왠지 근사한 뭔가를 발견할 것만 같은 기대감에 내 가슴은 콩콩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정말로 내 눈 앞엔 멋진 무언가가 하나 나타났다. 밭을 오가는 길목에서 약간 떨어진 둔덕에 서 있는 그것은, 바로 포플러 나무였다.
 
나는 고개를 꺾어 들고 키 큰 그 나무를 쳐다보았다. 쏴아쏴아, 차르르르. 나무는 이제야 자신을 발견한 나의 어둔 눈을 탓하기는커녕 팔랑팔랑 잎사귀들을 까뒤집으며 파도 소리를 들려주었고, 그때 나는 그 나무에 대한 어떤 감정이 가슴에서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건 비록 폭발적인 사랑은 아닐지 몰라도, 사랑은 사랑이었다. 이렇게 해서 내 안에 또 하나의 사랑이 뿌리를 내린 것이다.  (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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