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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딸을 만나러 가는 길 45.  그곳에 가고 싶었다

[연재] 이혼을 하면서 두고 온 딸은 그녀에게는 늘 어떤 이유였다. 떠나야 할 이유, 돌아와야 할 이유, 살아야 할 이유……. 그녀는 늘 말한다. 딸에게 하지 못한 말이 너무 많다고. "딸을 만나러 가는 길"은 딸에게 뿐만 아니라 이 땅의 여성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윤하의 고백이 될 것이다.  <일다> www.ildaro.com

 
옛날 결혼생활을 했던 곳에 가보고 싶다는 마음이 든 건 몇 달 전의 일이다. 떠나온 뒤 단 한번도 가고 싶지 않았던 장소였기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랐다.
 
지난해 가을, 프랑스에서 아이와 관련된 추억의 장소들을 돌아보다가 불현듯 이 동네가 궁금해졌다. 그리고 이제는 그곳을 돌아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마음 깊숙이서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춥다는 핑계를 대면서 겨울이 지났고, 어영부영하는 사이 봄도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요 며칠 전부터는 얼른 그곳을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마음을 재촉했다.
 
그러다 기어이 오늘은 서울 변두리에 위치한 그곳을 가기 위해, 일찍 일어나 차비를 하고 길을 나섰다. 지하철이 있기는 하지만 동네까지 닿지 않아서 마을버스를 더 타야 한다. 지하철을 타고 얼마나 왔는지 모르겠다 싶을 만큼 한참이 걸려 근처에 다다랐다. 역을 알리는 방송이 나오자 창 밖으로 절로 시선이 옮겨졌다. 떠나온 지 오래되었건만, 크게 변하지 않은 도시의 풍경이 낯익어 반가운 마음이다.
 
오늘은 마을버스 대신 걸을 거라고, 내리기 전부터 마음먹고 있었다. 내가 다녔던 길들을 꼭꼭 디뎌가며 살피리라, 굳은 결심을 하고 나선 길이었다.

▲ 20년전 이혼을 하고 떠난 뒤 한 번도 가지 않았던 동네를 찾아갔다.  © 윤하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는 느낌은 전체적인 도시 외관이었을 뿐, 막상 열차에서 내렸을 때 역 주변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변해 있었다. 그럼에도 별로 주저하는 기색 없이 몸이 움직여졌다. 지하철 역에서 나와 좀 걷다가 좌회전해 곧장 걸으면, 내가 살았던 아파트가 나올 것이다. 그저 내 오래된 기억의 물살에 몸을 맡기며 차박차박 걸었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대로 멀리 내가 살았던 아파트 단지가 나타났다. 눈이 가늘게 떨린다. 나는 점점 낯익은 풍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우두커니 서있는 아파트건물을 향해 전신주의 전깃줄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오르막길을 따라 한참을 올랐다.
 
드디어 돌아왔다. 이곳을 떠난 지 꼭 20년 만이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달려 갈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어, 수십 번이고 와볼 수 있는 곳이었다. 사실 이렇게 오랫동안 그곳을 외면하고 있었던 건 상처 때문이다. 나는 그 동네를 입 밖으로 소리 내는 것조차 상처를 느꼈고, 그곳에 가본다는 건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생각에 따라서는 어떤 곳보다 추억이 많은 중요한 장소일만도 한데, 이곳을 돌아보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30년이 다 되어가는 아파트 단지는 많이 낡았지만 변함없는 모습이었다. 아파트 입구의 상가도 상점들만 변했을 뿐 그때 그대로였다. 나는 망설임 없이 내가 살았던 아파트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집 앞에 섰다. 그 집의 현관문을 바라보는데, 가슴 저 속에서 파도가 일렁거린다.
 
복도는 반갑기까지 했다. 바로 이 복도에서였다. 까르르 거리는 아이들의 웃음 소리와 뛰어다니며 내는 발소리들로 복도가 한바탕 소란스러워지면, 우리 아이는 현관으로 내 손을 잡아 끌었다. 이웃의 친구들이 나온 것이다. 그러면 나는 못이기는 척, 아이에게 끌려 현관문을 연다. 옆집의 지윤이와 복도 끝에 사는 한울이가 문이 열리기 무섭게 딸아이를 반긴다.
 
다섯 가구가 위치한 복도에 맞벌이를 하는 한 집과 남자 혼자 사는 또 다른 집을 제외한 나머지 집들은 모두 당시에는 아이가 하나뿐이었다. 게다가 아이들은 모두 한동갑이었고 엄마들까지 나이가 같아 서로 친하게 지냈다. 햇볕 좋은 낮에는 현관 문들을 활짝 열어놓을 때가 많았다. 남들에게 방해될 것도 없으니, 아이들은 이 집 저 집 자유롭게 뛰어다녔고 아예 복도에 목욕통을 내놓고 물놀이를 할 때도 있었다.

▲ 복도에서 아이들 웃음소리와 발소리가  복작거리면 내 아이는 나의 손을 잡아끌어 현관으로 데려갔다  ©윤하 
 
그렇게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과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떠나온 건 순전히 이혼 때문이었다. 나는 그저 이혼을 하게 되어 다시 못 볼 것 같다는 짧은 인사를 각자에게 하고 그 동네를 떠났다. 그렇게 떠나와 한번도 다시 가보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복도는 텅 비어 있었고, 문들도 굳게 닫혀 있었다.
 
나는 잠시 내가 살았던 집 현관 앞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발길을 돌려, 아이를 업고 또 유모차에 싣고 무수히 왔다갔다했던 마을 길을 따라 걸었다. 우리 아이가 다녔던 소아과는 건물벽에 붙어있는 간판이 그대로라 너무 반가웠다. 모두 변한 상점들 중 유일하게 바뀌지 않은 곳을 발견해 흥분한 마음도 잠시, 건물 입구에는 다른 이름이 걸려 있었다. 미처 건물벽의 간판을 떼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내버려진 간판이나마 내게 익숙한 풍경을 보여주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바뀌지 않은 게 하나도 없었다. 병원 맞은 편에 있던 넓은 공터에는 대형 마트가 자리를 잡았고, 수없이 왔다 갔다 했지만 돈이 없어서 결국 동요테이프만 하나 사가지고 돌아왔던 병원 앞 쇼핑센터는 비좁고 촌스럽다는 인상을 거둘 수가 없었다. 바뀌지 않은 건 동사무소뿐이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마을 앞 초등학교조차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마을의 인상이나 건물들이 바뀐 건 아니어서 익숙한 느낌이다. 다만, 전체적으로 낡고 퇴색된 분위기 속에서 세월의 흐름이 느껴질 뿐이었다.
 
긴 세월 속에서 퇴색된 당시의 기억들과 그곳이 너무 닮았다는 걸 깨달은 건 다시 집으로 향하는 열차에 몸을 실었을 때였다. 이렇게 뒤돌아볼 있었던 건 그곳을 기억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곳을 잊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생각해냈다. 상처가 발목을 척척 휘감고 있었을 때는 돌아볼 수조차 없었던 곳이었다. 그런 곳을 가봐야겠다고 마음 먹을 수 있었던 건, 그만큼 당시의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증거였다.
 
진정으로 그곳을 떠나고 있었다. 꼭 움켜쥐고 있었던 그곳을, 그 기억을, 이제야 손을 놓고 있었다. 이제는 정말 그곳을 돌아보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더 자주 마음 편하게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음에는 야트마한 담장들이 줄지어 있는 마을 앞 골목길을 걸어야겠다고, 한번도 가보지 못한 뒷산 약수터도 꼭 가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뒤돌아서고 있었다.  (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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