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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배우들
<일다> 뛰다의 시골마을 예술텃밭 15. 인형연기 
 
※ 뛰다는 2001년 ‘열린 연극’, ‘자연친화적인 연극’, ‘움직이는 연극’을 표방하며 창단한 극단입니다. 작년 강원도 화천으로 이주해 20여 단원들이 폐교를 재활공사하여 “시골마을 예술텃밭”이라 이름짓고, 예술가들 창작공간이자 지역 문화예술공간으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번 기사는 뛰다 연출가 배요섭씨 글입니다. <일다> www.ildaro.com
 
인형이란 무엇일까
 
이번에는 평범하고 뻔한 것처럼 보이는 이 질문에 뭔가 오묘하고 멋진 토를 달아 보려고 합니다. 짐작하셨겠지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그런 인형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주변에는 참 많은 인형들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갖고 노는 봉제인형들, 플라스틱으로 만든 장난감들, 밀랍으로 만든 실제와 너무도 똑같은 인형들, 그리고 쇼윈도의 마네킹들까지 우리는 그것들을 인형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연극적으로 의미 있는” 인형에 대해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 2006 극단 <터>와 물물교환워크숍. 손인형 장면    © 뛰다 
 
아무리 근사하게 만들어진 인형이라 하더라도 그것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합니다. 그것이 무대 위에서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살아 움직일 때 비로소 연극적으로 의미 있는 인형이라고 말합니다. 대게 인형이라고 했을 때, 살아있는 사람이나 동물의 형태를 본떠 만든 것을 지칭합니다. 때로는 현실에는 없지만 상상 속의 어떤 생명체의 모습을 가진 인형도 가능하지요.
 
하지만 무대 위에서 살아 움직일 수만 있다면 형체가 크게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인형이 살아있는 실제의 형태를 모방하여 살아나기도 하지만, 살아있는 것의 어떤 본질적인 것들을 모방함으로써 살아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손수건이, 혹은 그림책이 무대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순간 우리는 그것도 인형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결론 내리기를, 어떠한 것이든 그 물체가 살아있음을 지향할 때 혹은 그런 의도로 사용 될 때 그것은 인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벤스키(B.D. Bensky)는 <인형의 구조와 상징체계>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인형은 조종자가 발명해 낸 어떤 방법으로 극적인 해석아래 움직여지는 물체이다.”
 
어떤 물체가 살아있음을 모방하기 위해서는 조종자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조종자가 발명해낸 어떤 방법이 있어야 하지요. 인형이라는 것이 단순히 형태만으로는 온전한 의미를 가지지 못합니다. 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조종자의 의도만으로도 인형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형의 형태적인 면은 부차적인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배우와 인형과의 거리
 
그러므로 인형에 대해 이야기할 때, 먼저 배우의 몸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배우가 자신의 몸으로 연기를 하는 경우 몸 전체는 인형이 됩니다. 배우라는 존재는 대상(오브제; object)인 동시에 그 오브제를 움직이는 주체, 혹은 조종자이기도 합니다.

▲ 2010 인형극워크숍.  손인형의 시작    © 뛰다 
 
이러한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배우가 자신의 몸을 낯설게 인식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메를로-뽕띠의 말을 빌자면, ‘의식이 몸에서 잠시 떨어져 나와 불편하고 낯선 상태에 머물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그 과정을 그 몸의 일부인 손에서부터 시작해볼까요? 손은 신체의 부분일 뿐이지만 그것이 독립된 무엇이 될 때 매우 강력한 인형이 됩니다. 손은 더 이상 손이 아니고 나와 혹은 내 몸과 떨어져 존재하는 무엇이 되는 것이지요. 그것이 나와는 독립된 무엇으로 살아 움직인다는 것을 경험하는 것은 '인형연기' 세계의 문턱을 넘기 위한 필수조건입니다.
 
팔을 걷고(팔뚝이 다 나오도록) 팔 뒤꿈치가 어깨보다 약간 높이 올라갈 정도로 들어 올려봅니다. 그리고 손을 가지런히 펴고 팔뚝이 수직으로 똑바로 섰는지 관찰해보세요. 어깨 아래 부분은 내가 아니다, 라고 생각하세요. 다만 내가 조종할 수 있는 무엇이다. 팔뚝이 똑바로 서 있을 수 있도록 하여, 어깨 높이로 손을 올렸다 내렸다가를 천천히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그 손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순간을 느끼셨다면 당신은 인형연기의 세계에 멋지게 첫발을 내디딘 것입니다.
 
손은 그 자체로 완벽한 존재, 멋진 인형이 됩니다. 손은 살아 있는 어떤 것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손의 주인이었던 나는 그를 조종하고 있으면서도 그를 개별적인 존재로서 대면합니다. 그와 나 사이의 거리가 유지되는데 그 거리감이 인형연기의 핵심입니다. 이 과정은 배우의 몸과 배우 사이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데, 그때는 내 몸 전체가 인형이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내 의식은 몸으로부터 잠시 빠져 나와 나의 몸을 조망하게 됩니다.
 
어떤 물체, 인형과 만났을 때는 이 흐름이 반대로 일어납니다. 물체가 내 몸의 일부와 만남으로써 그 거리감을 좁히게 됩니다. 손이 나로부터 떨어져 나와 어떤 거리감을 형성했듯이 물체는 나에게로 다가와 또 그와 같은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지요. 대부분은 배우의 손과 만나지만. 때로는 얼굴, 머리, 발, 혹은 엉덩이와 만나기도 합니다. 얼굴, 혹은 머리와 만난 것을 사람들은 ‘가면’이라고 부르는데 넓은 의미에서 다 인형의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인형을 살려내는 방법, 심장-호흡-시선
 
다시 인형을 살려내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와 봅시다. 조종자가 발명해낸 방법대로 움직여질 때 그것을 인형이라고 한다면 그 방법을 무엇인가요? 라고 궁금해 하시겠지요? 그건 조종자 맘입니다. 하지만 그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몇 가지 중요한 원칙들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물론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말입니다.

▲  2006년 극단 <터>와 물물교환 워크숍 중.  머플러가 인형이 되는 순간   © 뛰다

첫 번째는 심장입니다. 내가 만난 인형의 어딘가에 심장이 이식됩니다. 그 인형은 내 몸일 수도 있고, 내 손일 도 있고, 내 손과 만난 어떤 물체일 수도 있습니다. 심장은 생명의 중심이고 움직임의 중심이 됩니다. 충동이 그 심장에서 출발합니다. 배우의 몸에도, 손에도, 물체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미하일 체홉이 말한 "상상의 중심"이 바로 이 심장입니다.
 
심장이 있는 곳에 상상의 '중심'이 있고 이로부터 생생한 '충동'이 팔과 손, 다리, 발로 전해지는 것이지요. 이것이 배우가 자신의 몸을 인식할 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아주 기본적인 개념입니다. 인형의 심장이 어디에 있는지를 탐구하고 발견하는 과정에서 그 인형의 성격, 존재방식 등이 결정됩니다. 같은 몸, 같은 물체, 같은 인형이라고 해도 심장을 어디에 두고 어떻게 움직이게 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존재가 발현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호흡인데, 호흡은 심장에서 출발한 어떤 충동의 흐름이 현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호흡을 통해 인형이 살아있다는 것이 확인됩니다. 인형의 심리적 상태도 호흡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평온한지, 화가 났는지, 기쁜지, 우울한지를 그 사람의 호흡을 보고 알 수 있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말은 호흡에서 나옵니다. 말의 충동은 호흡의 근원지에서 생성되고 반응이 시작됩니다. 성대와 공명기관과 입은 말이 지나가는 통로일 뿐입니다. 인형의 형태가 어떤 것이든 호흡의 방식이 결정되면 말의 근원지를 가지게 되는 것이고, 말하는 양식도 정해지게 됩니다. 어떤 인형은 입이 움직일 수도 있고, 어떤 인형은 호흡주머니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부분이 꿈틀거릴 수도 있고, 어떤 인형은 움직이지 않고도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시선은 외부세계를 인식하는 모든 방식을 대표하는 표현입니다. 모든 인형은 어떤 식으로든 시선을 가집니다. 눈이 없다면 코로, 코가 없다면 입으로, 입이 없다면 다른 신체의 일부분으로 외부세계를 인식합니다.
 
인형을 움직이는 배우는 인형의 시선을 통해 외부세계를 봅니다. 대부분 배우의 몸에는 눈이 있으므로 배우의 눈은 거의 언제나 인형의 시선이 있는 물체의 어딘가를 주시하게 되지요.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배우는 배우의 몸에 있는 눈을 통해, 그 눈은 다시 인형의 시선이 성립하는 물체의 어떤 지점을 통해 외부세계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로서 인형은 다른 존재를 만날 수 있고 극적인 사건이 시작됩니다.

▲  2008년 연극 <노래하듯이 햄릿>에서. 왕을 광대가 발로 조종하고 있다. © 뛰다 
 
배우는 이 세 가지의 원칙아래서 인형 조종하는 방법을 찾아냅니다. 같은 물체라고 하더라도 배우가 발명해낸 조종방법에 따라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 살아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머플러를 풀러 움직여 볼까요. 머플러는 새가 되어 날아와서는, 뱀이 되어 기어가다가, 두발만 있는 괴물이 되어 걷다가는, 해마가 되어 헤엄쳐 떠나갑니다.
 
인형이란 무엇인가? 라는 아주 평범하고 단순한 질문에 토를 달다 보니 조금 어려운 이야기로 흘러가고 말았습니다. 인형연기를 한다는 것도 역시나 참 어려운 여정입니다. 하지만 내 몸 바깥의 어떤 물체에 귀를 기울이고 오랜 시간 애정을 나누다 보면 어느 순간 정말 살아 움직이는 녀석과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정말 경이로운 경험입니다.
 
인형연기 속에는 연극의 아주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요소가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무대 위에서 펄떡펄떡 살아 숨 쉬는 존재로 선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합니다. 그것을 깨달은 자가 바로 배우이고, 그 배우가 서있는 공간이 바로 연극입니다.  (배요섭)   ※ 뛰다의 “시골마을 예술텃밭” 카페 cafe.naver.com/tuida
 
       * 여성저널리스트들의 유쾌한 실험! 인터넷 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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