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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한계를 넘어 스스로 증거가 된 만화
만화 <체르노빌: 금지 구역> 
 
<필자 이기진 님은 인문만화교양지 싱크(SYNC) 편집장입니다. 이 기사는 싱크 8호에도 공동 게재되었습니다. -편집자 주>
 
최근 유럽만화에서는 특정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진실’을 조명하고 진지하게 ‘기록’한 만화들이 서서히 하나의 줄기를 형성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작품만 해도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다룬 작품으로 이미 너무도 유명한 아트 슈피겔만의 <쥐>, 이슬람 혁명기를 어린 소녀의 눈으로 증언한 <페르세폴리스>, 이와 비슷한 감성으로 공산 폴란드 시대를 보여주는 <마르지>,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기록하고 고발한 <메즈 예게른> 등을 떠올릴 수 있다.

▲ 만화 <체르노빌: 금지구역> 표지 
 
그리고 지금부터 소개할 <체르노빌: 금지 구역>도비교적 최근의 사건(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을 ‘기록’한 만화로 이 대열에 합류한 서구의 작품이다.
 
이 만화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모두 인류사에서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역사적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 필연적이겠지만 그런 사건은 대부분이 눈을 감아버리고 싶은 참담한 비극이고, 그와 비슷한 일이 반복되는 불행을 막기 위해 강렬하고 오래가는 교훈이 필요한 사안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 특징이야말로 만화라는 표현 장르가 ‘기록’매체로 암약(?)하게 된 사정을 드러내는 것이다.
 
비극적인 역사의 반대쪽 면은 외면하고 싶은 기억, 들추고 싶지 않은 과오,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추한 진실이다. 심지어 그 사건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지 않거나 몇 세대를 건너뛴 다른 시대의 사람들에게조차도 아픈 역사의 한 장면과 대면하는 일은 불편하고 쉽지 않은 일이지 않은가.
 
만화는 사진이 아니고, 영상이 아니고, 실사 스케치도 아니기 때문에 걸쩍지근한 현실감을 어느 정도는 제거해 준다. 우리가 징그러운 동물의 시체를 실제로나 사진으로는 보기 힘들어도 만화로는 웬만큼 거부감 없이 볼 수 있는 이치와 같다.
 
만화가 된 ‘기록’은 자기만의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간다. 가공된 이미지와 기호, 만화스러운 시각언어들이 순간적으로 경계심을 허물고, 그 틈을 비집고 번쩍이는 진실의 날을 세운 이야기가 파고든다. 방심한 후에 절절이 아파도 어쩔 수 없다.
 
자, 이제 <체르노빌: 금지구역>의 이야기를 하자. 다시 밝히지만 이 글의 목적은 만화 <체르노빌: 금지구역>이라는 ‘기록물’을 최대한 정중하고 설득력 있게 소개하는 것이다. 먼저 짧게 정리하자면, 이 책은 1986년 4월 26일에 구소련(지금의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일어난 폭발 사고를 기록한 만화다.
 
체르노빌 원전사고는 현재까지 일어난 원전 사고 중에서 가장 최악의 사고이며 지금까지도 방사능 오염에 의한 피해가 지속되고 있는 비극의 무대이다. 지난해의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로 인한 후쿠시마 원전 사고 또한 체르노빌 원전 사고에 필적하는 규모(7등급. 7등급이 최대)로 발표되었는데, 이는 사람들에게 거의 망각되어 가던 체르노빌의 비극을 상기시킨 또 하나의 거대 비극인 셈이다(얼마나 더 반복할 셈인가!).
 
체르노빌 원전 사고는 그 지역 사람들의 삶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의 인간들과 식물, 동물을 포함해서 넓게는 지구 생태계 자체를 파괴한 그야말로 우주 역사상의 비극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지구인의 인식은 아직도 턱없이 낮다. 아직 사건이 일어난 지 30년도 안 되었기 때문인가!?

▲ 스페인 작가이자 영화감독 프란시스코 산체스 글. 일러스트레이터 나타차 부스토스 그림 <체르노빌: 금지구역>   

<체르노빌: 금지구역>은 스페인 작가이자 영화감독인 프란시스코 산체스가 글을 쓰고 일러스트레이터인 나타차 부스토스가 그림을 그렸다. 산체스는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체르노빌 20주년 기념 전시회를 계기로 이 작품을 기획하게 되었다. 그가 알게 된 체르노빌 사고의 전말과 그 피해의 결과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무수한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삶의 터전을 잃었고 자연은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당했다. ‘모든 것이 너무도 비극적이었기에, 이 이야기를 매우 선정적으로 다룰 수도 있었다’ 라고 작가는 밝힌다.
 
그러나 작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우리는 직접 보여주기보다 넌지시 암시하는 편을 택했다. …비극 속에 들어갈 수 있는 방편으로, 우리는 허구의 인물이긴 하지만 충분히 실제로 전재했을 법한 3대에 걸친 한 가족을 선택해 구체적인 이름과 얼굴을 부여했다.”
 
영화감독이기도 한 작가가 왜 영화가 아닌 만화를 통해 체르노빌을 이야기하려 했을까? 물론 작가 자신이 만화광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이 작품을 통해 단지 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단면을 짚거나 디테일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퍽 ‘종합적’인 이야기를 해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3대에 걸쳐 진행되는 체르노빌의 비극을 전해야만 했고 원전 폭발 당시의 모습과 느낌을 전해야 했고, 폭발 당시와 그 직후에 있었던 구소련 정부의 부적절한 대응을 고발하고 문제제기를 해야 했다. 그리고 물밑의 의도로 현대인들에게 ‘망각’에 대한 경고를 힘껏 날리고도 싶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이 작품을 하나의 의미심장한 ‘기록’으로 남기기 위한 요소이다. 그러나 이 일이 길어야 3시간인 영화 속에서 과연 가능할까? 만약 가능하다면 대체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할까(아, 물론 이것은 부수적인 의문임).
 
하여튼, 모든 의도는 만화를 통해 가능했고 만화였기 때문에 월등히 손쉬웠다. 엄청난 디테일을 추구하지는 않았더라도 논리적 맥락과 이미지, 증언 그리고 철학을 갖춘 훌륭한 기록이 되었다. 

▲ 만화 <체르노빌: 금지구역> 중에서 
 
그런데 이 책 <체르노빌>은 이제까지의 기록 만화보다 조금 더 ‘객관적’이라는 점에 눈길이 간다. 기록적 성격을 갖는 만화의 대부분이 디테일의 많은 부분을 ‘증언’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비하면 말이다. 만화를 포함해 문학적 요소를 갖는 창작물은 스토리텔링이 중요하기 때문에 인물의 감정이입 구조를 만들고 그 맥락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책은 등장인물을 통한 감정이입 구조가 거의 없고 상징화되어있다. 3대의 가족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들은 실제 존재했던 사람들의 상징일 뿐이다. 그림 속에 표현된 굴러다니는 러시아 전통인형이 지역민의 삶이 파괴되었음을 은유하듯, 가족 3대의 불행과 비극은 그 때 그곳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의 불행이자 비극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직접 사건에 연관된 개인들의 경험을 취합한 증언집이 아니라, 제3자(타자)가 의욕적으로 벌인 조사 연구 보고서에 가깝다.
 
자극적인 표현이나 이야기 전개가 없다는 점은 아쉬울 지도 모르겠지만, 그림 작가의 손맛이 잔뜩 묻어있는 거친 붓선과 강렬한 흑백의 대비(이 책은 뭐랄까, 엄밀히 말해 회색이 없다)를 보며 서정적인 감흥을 느낄 수 있으리라. 그림이 ‘말’을 많이 품고 있는 만화다. 이보다 세련된 그림이었다면 아마도 이미지가 표출하는 ‘말’이 많이 삭았을 것이다.
 
필자는 <체르노빌>이 기억의 한계를 넘어 스스로 증거가 되려 한 만화들의 한계를 한 걸음 극복한 만화라고 평하고 싶다. 그리고 앞으로 기록 만화가 점점 더 진화할 것이며 더 다양한 형태로 자신의 여러 한계를 시험하고 극복할 것이라는 전망을 보여준 만화다. 그런 의미에서도 이 만화는 한 번 읽어볼 가치가 있지만, 그에 앞서 인류 역사상 최악의 원전 사고를 너무 쉽게 망각하는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 당신에게 이 책을 권한다.   <이기진 / 싱크(SYNC)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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