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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자야, 귀촌을 이야기하다: 더 촘촘하고 깊은 상상력을 위하여
경운기 시동 거는 소리에 눈이 떠진다. 흡사 날카로운 쇳조각 같은 것이 빠르게 회전하면서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듯한 이 소리는, 이른 아침에 듣기엔 확실히 부담스러운 면이 있다.
하지만 긴긴 밤이 지나고 더디게 아침이 왔는데도 골목길에서 경운기는커녕 작은 인기척 하나 느낄 수 없는 겨울을 막 보내고 난 요 무렵엔, 이 소리가 그다지 싫지만은 않다. 이른 시각에 경운기들이 움직인다는 건, 마침내 동네 전체가 방구들에 붙여 놓았던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는 증거니까. 그 기운에 힘입어 나도 활짝 깨어날 수 있어서 오히려 고맙고 신난다고 할까.
텃밭 농사 밑그림 그리기
▲ 작년에 콩을 심었던 언덕 위 텃밭 주변 풍경.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멧돼지가 자주 나타나곤 한다. © 자야
그러고 보니 어느새 춘분이다. 더 이상 봄앓이니 뭐니 하며 방구석에 박혀 있거나 집 밖을 마냥 헤매고 다닐 수만은 없는 때가 오고 만 것이다.
갑자기 흙을 만지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힌 나는 밖으로 나가 마늘과 양파와 시금치가 자라는 곳을 제외하고 오래도록 비어 있던 두둑들을 호미로 뒤집어엎는다. 그런 다음 울퉁불퉁해진 표면을 새로 산 삽괭이로 평평하게 고른 후 다시 방에 들어와 올봄에 해야 할 농사 계획을 짜 본다.
다 합쳐 열다섯 평이 될까 말까 한 밭에 무슨 계획이 필요하냐고 묻고도 싶겠지만 천만의 말씀. 좁은 땅을 이리저리 구획하여 다양한 작물을 심으려면, 언제 어디에 무엇을 심을 것인지 미리 그림을 그려 놔야 헛갈리지 않는다.
우리 집 텃밭은 대문 바깥과 마당 안, 이렇게 두 곳으로 나뉘는데, 바깥에는 주로 보관해서 먹을 수 있는 것들, 이를테면 감자와 마늘과 양파, 그리고 당근과 무 배추 생강 등을 심는다. 그 외 고추, 피망, 호박, 들깨 등속은 주요 작물들 사이에 몇 그루씩 심어 놓으면 한 철 먹을 만큼은 충분히 나고 자라니 크게 신경 쓸 일이 없다.
반면 마당 안 텃밭은 필요할 때 쉽게 뜯어 먹을 수 있는 잎채소 차지가 되는데, 해마다 봄이면 심는 상추와 쑥갓과 케일과 치커리 등은 네다섯 포기씩 두 줄 정도면 실컷 먹고도 남기에 그 이상 욕심을 부리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날로도 먹지만 기름에 달달 볶으면 더 맛있는 청경채는 조금 넉넉히 심어도 좋으니 반 두둑 정도를 할애한다. 그리고 엊그제 사온 겨자채와 비트는 그 옆에 조금씩. 종묘상 주인이 얘들은 너무 잘 자라서 많이 심으면 버리게 된다고 특별히 조언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마당 안 텃밭에는 이미 부추 있는 자리가 파랗다. 봄이면 저렇게 새 순이 올라와 여름이 다 가도록 내내 무성하기에, 그저 먹어 주는 것 말고는 손 댈 일이 없다. 또 지금이 한창 제 철인 시금치는 천천히 뽑아 먹다가 5월초에 방울토마토와 가지, 그리고 오이 모종으로 교체하면 된다.
전에 살던 사람이 고맙게도 오이를 심어놓고 나간 덕분에, 나는 이 집에 이사 온 첫 해에 키는 작지만 옆으로 통통한 조선오이를 맛볼 수 있었다. 마트에서 파는 길쭉한 오이와는 비교할 수 없이 물 많고 아삭한 그 맛에 완전히 반해 버린 나는, 이듬해에 옆집 아주머니에게서 두 그루를 얻어 심었으나 벌레가 많이 꼬이는 바람에 따먹는 재미를 누리지 못했다.
내 생각엔 올해도 재작년 상황과 크게 달라질 것 같진 않다. 그럼에도 내가 오이를 또 한 번 심어보려는 이유는 작은 별 모양의 노란 꽃이 너무 예쁘기 때문이랄까. 비록 손에 쥐는 열매는 몇 개 안 될지언정 눈만은 실컷 호사를 누릴 수 있으니, 그도 나쁘진 않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언덕 위 그곳엔 멧돼지가 산다
종이 위에 텃밭을 그려놓고 쓱쓱 줄을 그어 각각의 구역에 재배할 작물의 이름을 써 놓으니, 왠지 모르게 뿌듯해지는 것이 마음만은 진짜 농부가 된 듯하다. 헌데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동네 아주머니 한 분이 당신네 밭 일부를 맘대로 쓰라고 허락해 주신 덕분이다.
아주머니가 처음 그런 말씀을 꺼낸 것은 재작년 일로, 그때 우리는 고구마를 심었었다. 일부라고는 하지만 우리 집 텃밭을 다 합친 것보다 넓은 면적인데다, 위치도 집에서 좀 떨어진 언덕 위여서 K와 둘이 그 밭에 다녀온 날 밤이면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래도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어보는 게 난생 처음이고 더욱이 내가 좋아하는 고구마를 재배하는 거라서 흥에 겨웠는데, 이게 웬일인가. 고구마 순 한 번 끊어 먹기도 전에 멧돼지가 먼저 이랑을 파헤쳐 버린 게 아닌가.
같은 피해를 본 아주머니가 망할 놈의 멧돼지라고 욕을 해대는 곁에서 나도 맞장구를 쳤는지 어쩐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아깝고 아쉽기는 했다. 고구마가 채 여물기도 전에 생긴 일이어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우리는 물론이거니와 멧돼지 역시나 최상급의 고구마는 입에 대지도 못하고 밭만 망친 꼴이니 말이다.
그다음 해, 나와 K는 멧돼지가 먹지 않는 작물을 골라 다시 한 번 도전해 보기로 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겉은 까맣고 속은 푸른 콩 청태다. 다행히 고랑에 멧돼지 발자국만 몇 개 찍혔을 뿐 큰 피해는 없었으나, 우리의 정성이 부족했던 탓인지 작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올해 나는 그 밭에 땅콩을 해볼까 한다. 몇 날을 고심한 끝에 땅콩을 선택한 첫째 이유는 물론 멧돼지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내가 평소에 잘 먹고 좋아하는 감자, 고구마, 옥수수 등은 결과가 불 보듯 훤하니 시도할 엄두조차 낼 수가 없는 것이다.
이는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 동네, 나아가 대부분의 시골 사람들이 겪는 문제로, 더러는 전선을 치고 또 더러는 엽사들의 도움을 받기도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멧돼지가 갈수록 느는 이유는 상위 포식자가 없기 때문이고, 또 그들이 먹을 게 없어 밭을 넘보는 것 역시나 그만큼 생태계의 먹이사슬이 뭔가 불균형하다는 증거인데, 이를 단지 멧돼지를 죽이는 걸로 해결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다르게 상상하면 보이는 것도 달라
멧돼지가 출몰하는 그 밭에 무슨 작물을 심을까 한창 고민하던 중에, 나는 마침 읽고 있던 책 속에서 저자가 멧돼지에 관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상상력을 발휘하며 쓴 글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비문명』이라는 책의 저자인 마사키 다카시는 농부이자 철학가로, 일본헌법 9조와 평화를 지키기 위한 '워크 나인Walk 9' 순례를 통해 한국에까지 이름을 알린 평화운동가이기도 하다. 그가 쓴 글의 일부를 아래에 옮겨 본다.
"한 번은 새끼를 데리고 온 멧돼지 때문에 논이 완전히 엉망이 된 적이 있습니다. 추석 무렵 달 밝은 밤이었습니다.
멧돼지 새끼는 작은 수박만 해서 몸을 쭉 뻗어도 벼 이삭에는 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비는 논바닥에 몸을 굴려 새끼를 위해 벼를 옆으로 쓰러뜨려 줍니다. 그것을 본 새끼들도 신이 나 논바닥을 데굴데굴 굴렀습니다. 물기 있는 논바닥은 멧돼지가 특별히 좋아하는 곳이라 합니다. 온몸에 진흙을 묻히면 벼룩이 떨어져 나간다고도 들었습니다.
논은 엉망진창이 되었지만, 맑은 벌레 울음소리에 가을바람은 신선하고, 푸른 달빛 아래서, 이삭은 그야말로 마음껏!
멧돼지들은 넘어진 벼 이삭을 우걱우걱 씹고 가스를 푸푸 토해냈습니다. 단단해지기 전의 벼 이삭은 우유처럼 부드럽고 맛있나 봅니다. 그날 밤 멧돼지 가족은 아주 멋진 달맞이를 즐겼겠지요."
이 글을 쓴 저자도 그다음 해에는 논 가장자리에 전선을 둘러쳤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전선이 결국은 인간이 자연에 대해 친 울타리였다고, 그런 울타리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인간은 애초에 자연이라는 너른 그물 속에 안겨 있는 일부'임을 잊게 된다고 말한다. 이는 어쩔 수 없이 전선을 치는 상황에서도 그 본질만은 잊으면 안 된다는 경고 같은 게 아닐는지.
재미있는 사실은, 위의 글을 읽기 시작하자 내 머릿속에 한없이 흉포하고 탐욕스러운 이미지로 고정돼 있던 멧돼지가 일시적이나마 귀엽고 우스꽝스럽고 유쾌한 상으로 바뀌더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멧돼지를 배려해 일부러 옥수수나 고구마를 밭에 심을 리는 없다. 하지만 어떤 대상을 조금만 다른 각도에서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 그에 대해 여유로운 마음과 유머러스한 태도를 지닐 수 있음을 안 자체가, 앞으로 내 삶에 중요한 지표로 남으리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 바다와 땅이, 땅과 하늘이, 그리고 그 속에 깃들어 사는 모든 생명이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상상할 수 없다면, 또한 온전한 삶을 꿈꿀 수 없으리라. © 자야
빈곤한 상상력 앞에 온전함은 없어
그러고 보면 인간이 자연을 너무 쉽게 망가뜨리고 파괴하는 이유도 상상력이 너무 빈곤하기 때문은 아닌가 싶다. 어느 유명한 스님처럼 종이 한 장에서 삼라만상을 다 볼 수는 없다 해도 최소한 지리산에 깃든 다양한 생명들, 서로 연결되어 순환하고 있는 그 생명들을 조금이라도 상상할 수 있다면, 지금처럼 지자체마다 나서서 케이블카를 유치하려고 경쟁하는 일 따윈 하지 않을 테니까.
구럼비는 또 어떤가. 불어오는 바람, 밀려드는 파도를 다 품고 뭇 바다 생명들의 쉼터가 되어 주면서 스스로 전설이 되고 신화가 된 구럼비의 속내를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이들에 의해, 바위는 지금 저토록 무지막지하게 깨부수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텃밭 농사 계획을 짜다가 뜬금없이 구럼비라니, 너무 멀리 온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내가 귀농을 했건 귀촌을 했건, 농사 규모가 크건 작건, 함양군 지리산 아래에 살건 제주 섬 바닷가 작은 마을에 살건, 애초에 시골에 온 이유를 떠올리면 그 모든 게 무관하지 않음이 명확해진다. 온전한 삶이란 자연이라는 그물 속에 있을 때만 가능하고, 그 촘촘한 그물망의 연결고리들을 상상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온전한 삶을 향해 한 걸음 내딛을 수 있으므로. 온전하다는 것은 결국 분리가 아닌 하나임을 아는 것이므로.
그러므로 바라기는 내가 발 딛고 선 곳에서 가능하면 많은 것을 볼 수 있기를, 최소한 그런 상상력을 놓치지 않기를. 오늘은 집 앞 작은 텃밭에 쪼그려 앉아 이렇게라도 기도하고 싶어진다. (자야)
* 여성저널리스트들의 유쾌한 실험! 인터넷 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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