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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윤하의 딸을 만나러 가는 길 (38)  우연한 만남 1. 
 
[연재 칼럼] 이혼을 하면서 두고 온 딸은 그녀에게는 늘 어떤 이유였다. 떠나야 할 이유, 돌아와야 할 이유, 살아야 할 이유……. 그녀는 늘 말한다. 딸에게 하지 못한 말이 너무 많다고. "딸을 만나러 가는 길"은 딸에게 뿐만 아니라 이 땅의 여성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윤하의 고백이 될 것이다.  <일다> www.ildaro.com

딸을 보낸 뒤 시간이 지나면서는 우연히 라도 딸을 만났을 때, 그녀를 알아보지 못할까봐 밤잠을 설쳐야 했다. 혹시, 내가 아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스쳐지나갔기라도 했으면 어쩌나 하며, 혼자 애를 끓였다. 그래서 아이의 근황을 물으며 사진을 보내달라고 전남편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늘 묵묵부답이었다.

 
실제로 이혼을 할 때, 그는 요구하지도 않는 내게 ‘가끔 아이의 사진을 보내주겠다고, 아이가 유치원에 가면 비디오테이프도 보내주겠다’고 약속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비디오테이프는커녕, 소식조차 전해주지 않았다. 사진만이라도 몇 장 보내달라는 내 간절한 요구에 그는 어떤 대답도 주지 않았다. 나는 몇 차례 부탁을 했지만, 그 이후에는 아예 더 조르지도 않았다. 결과는 없고 마음만 더 부대낄 뿐이었다. 아니,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어서였다.
 
나는 그의 도움 없이도 운명처럼 딸을 만날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물론, 이런 어이없는 내 속내를 누구에게도 말한 적은 없다. 이런 말을 하면, 아마 듣는 사람은 아이가 보고 싶어, 정신이 좀 나갔거나 너무 감상적이어서 얼토당치 않은 꿈을 꾼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믿음이 없었다면, 그 긴 세월을 결코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한없이 비참한 마음에 젖어있다가도 이 생각을 하면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딸을 보내고 그녀를 다시 만난 건 꼭 17년만이다. 그러나 그때가 처음이 아니다.
 
이혼소송이 진행되고 있던 해 4월에 아이를 보냈고, 8월 말쯤 법원에서 판결을 받았다. 소송이 벌어지자 남편은 부산의 시댁으로 들어가면서 내 주민등록까지 그곳으로 옮겨 놓았다. 이혼확정판결이 나자마자, 인내심이 부족한 나는 한시라도 빨리 서류를 정리하고 싶은 마음에 전남편이 처리할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직접 퇴거 신청을 하기 위해 부산행 버스를 탔다. 당시는 주민등록 이전이 다소 복잡해, 현재 주소지의 동장한테 도장을 받아야 했고, 그곳 동사무소에서 퇴거신청도 해야 했다. 아이를 보낸 지 6개월이 지나고 있던 때였다.
 
시댁은 관할 동사무소에서 그리 멀지는 않지만, 그 근처를 왔다 갔다 할 일은 드문 위치에 자리해 있었다. 산책삼아 동네를 거닐어도, 동사무소 근처를 간 적은 없었다. 그래서 혹시라도 아이를 볼 수 있을까 하는 기대는 생각도 못했다. 그냥, ‘얼른 동사무소만 들렀다 와야지’ 했다. 그런데 퇴거신청을 마치고 동사무소를 나오는데, 어린이 세 명이 내 근처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 아이들 사이에 바로, 내 딸이었다. 예닐곱 살 되었던, 시댁의 아래 층 가겟집 꼬마가 우리 딸과 시누이의 아이를 데리고 동사무소 옆에 있는 학교 운동장으로 놀러나온 것이다.
 
나는 달려가 딸을 버럭 안으며, “00아! 엄마야!” 했다.
 
아이는 선선히 안기며, 환하게 웃었다. 이건 결코 꿈이 아니었다. 나는 그들과 학교 운동장으로 갔다. 거기서 한 시간 남짓 있었다. 딸을 안아주기도 했고, 얼굴을 쓰다듬어주기도 했다. 처음에는 기억이 안나는 듯 서먹하게 있던 아이는 조금 지나자, 철봉에 매달려 흔들거리는 자기 모습을 보라고 ”엄마! 엄마!” 하면서 소리쳤다. 아이들은 종종 이곳에 왔던 모양이다. 놀이기구를 다루는 모양이 제법 익숙한 모습이었다. 이제 딸은 자기가 잘 하는 것을 내게 보여주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네를 조금 타다가 미끄럼틀로 뛰어가서는 자기가 얼마나 씽씽 잘 내려오는지를 보여주며 으쓱해했다. 나는 그저 “그래, 그래!” 하며, 아이의 모습을 보고 웃었다.
 
그러나 이제 더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너무 늦으면 걱정할 어른들이 생각났다. 나는 가겟집 아이에게 ‘동생들 잘 데리고 그만 집으로 가라’고 했다. 그리고 딸에게도 인사를 했다.
 
“ㅇㅇ아, 잘 있어! 엄마가 꼭 다시 올게! 그때까지 아빠랑 잘 있어!”
 
아이는 그 말에 웃으며,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이 한 발짝 한 발짝 내 눈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한 20미터 정도 갔을까? 갑자기 우리 딸이 걸음을 멈춘 채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나를 향해 짧게 손을 흔들어보이고는, 다시 뒤돌아 총총 걸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이 눈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그것이 진짜 마지막이었다. 그렇게 다시, 아이를 보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날 돌아서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는데, 마음이 예전보다 훨씬 차분해지는 것이었다.
 
‘하늘은 무심하지 않구나! 내가 살아만 있다면, 딸을 다시 이렇게 만나겠구나!’
 
버스를 타고 오는 내내 생각했다. 이 사건은 ‘괜찮다고, 이렇게 좀 더 살라’고 등을 토닥여주었던, 하늘이 내게 보낸 첫 번째 위로였다. 그 덕분에 살 수 있었던 것 같다. 항상,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이를 만나야 했다. 살아서, 아이가 자라 세상을 이해할 나이가 되면, 꼭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마음속으로 믿고, 또 믿었다. 그렇게 뭉텅뭉텅 세월이 지나고 있었다.   (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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