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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당신의 이름은 ‘평화’입니다 
<일다> 1000번째 수요시위를 맞이하며 
 
1992년 1월 8일 수요일, 당시 일본총리였던 미야자와 기이치의 방한을 앞두고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군‘위안부’ 범죄를 인정할 것과 일본정부가 이에 대해 공식 사과할 것을 요구하는 시위가 열렸다. 그로부터 20년간 거의 매주 쉬지 않고 이어온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가 오늘 12월 14일로 천회를 맞았다.
 
세계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수요시위 20년의 역사와 그 의미를 짚어본다.
 
20년간 지속되고 있는 수요시위의 힘
 

▲ 1992년 1월 8일, 미야자와 기이치 일본 총리의 방한을 앞두고 열린 1회 수요시위.    ©정대협  

 
수요시위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약칭 정대협)이 주최하고, 여성단체와 시민사회단체, 학생들, 풀뿌리 모임, 평화단체, 종교계 등 시민들이 시위를 기획하여 이끌어왔다. 일본에서 방문한 평화활동가를 포함하여 외국인들의 참여도 많았다.
 
일본대사관에서 열리는 수요시위는 일본정부 측에 ▲일본군 ‘위안부’ 범죄 인정 ▲진상 규명 ▲국회결의사죄 ▲법적 배상 ▲역사교과서 기록 ▲위령탑과 사료관 건립 ▲책임자 처벌 이상 7가지 사항을 요구하고 있다.
 
수요시위는 일본군‘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을 알려내는 데만 그치지 않고, 살아있는 역사교육의 공간이자 국경과 이념을 초월한 연대의 장으로 자리잡아 왔다.
 
1990년 11월 16일, 37개의 여성단체가 모여 창립된 정대협은 1992년 <일본군'위안부'문제해결 아시아연대회의>를 발족하여 “민족”을 넘어 “전쟁과 여성인권”의 문제로 ‘위안부’ 문제를 보는 시선을 확장시켜 나갔다. <아시아연대회의>는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적 연대활동과 함께 남북 간 연대활동을 이끌어내는 뜻 깊은 성과를 이루어내었다. 8차 아시아연대회의에서는 남북이 처음으로 일본군'위안부'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러한 연대활동의 결과로, 유엔인권위원회와 여성차별철폐위원회, ILO전문가위원회 등 국제기구들이 연달아 일본정부에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하는 결의문과 보고서를 채택했다. 미국과 EU, 캐나다, 네덜란드 등 세계 각국 의회에서도 일본정부에게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결의안 채택이 줄을 이었다.
 
특히 2000년 12월 도쿄에서 열린 <여성국제전범법정>에서는 전 일본 국왕 히로히토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며,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이 법정은 여성들의 힘으로 연 민중법정이며, 더욱이 성노예 제도의 ‘가해국’에서 열렸다는 점에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 받았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용기
 

▲ 호주의 '위안부' 결의안 채택을 위한 활동 중, 호주 모네쉬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는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 길원옥씨.   ©정대협 

 
무엇보다 수요시위의 가장 큰 성과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변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위가 시작된 1990년대 초반에는 시위에 참여한 할머니들이 카메라 앞에서 얼굴을 가렸다. 성범죄 피해자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이 두려웠던 것이다.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 있는 공개 증언이 있기 전까지 전쟁터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위안부’피해자들은 반세기 동안 스스로를 ‘버린 몸’이라 생각하며 숨어 살았다. 일본정부와 싸우기에 앞서, 자신의 이야기를 ‘민족적 치부’라 여기며 모른척하고 때론 손가락질 했던 우리 사회의 가부장적 시선과 싸워야 했다.
 
그러나 수요시위가 진행되어감에 따라 할머니들은 점점 당당한 모습이 되었고, 언론과의 인터뷰에도 적극적이었다. 수요시위를 통해 세상과 만나고 일본정부와 맞서 싸운 시간들을 통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회복해갈 수 있었다고, 할머니들은 회고한다.
 
“저는 해방되고서도 아주 긴 세월을 제 과거가 부끄러워서,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피해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용기를 내어 모든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수요시위에서 지금 한창 자라고 있는 아이들을 많이 만났어요. 그 아이들을 보면서 제게는 큰 숙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저 아이들만큼은 내가 겪은 것을 다시 겪게 해서는 안 된다’는 간절한 소망이었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진실을 올바르게 밝혀야 합니다. 힘들지만, 제 경험을 통해서 일본이 어떤 일을 했고, 지금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여러분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럽 의회에 일본군‘위안부’ 결의안을 이끌어내 길원옥 할머니의 연설 중 <20년간의 수요일>(윤미향 저, 웅진주니어, 2010)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은 지난 20년간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운동의 중심에 서서 활동해왔다. 수요시위 천회의 역사도, 불편하고 아픈 몸을 이끌고도 늘 자리를 지켰던 할머니들이 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할머니들은 고통스런 기억들을 일부러 들추어내야 하는 탓에 매번 힘들어하면서도 피해 증언을 멈추지 않았다. 이런 노력은 유엔 등 국제기구와 세계 각국의 결의안을 이끌어내는 큰 성과를 가져왔다.
 
인권과 평화를 배우는 장
 

수요시위는 ‘반일감정’과 ‘원망’을 넘어서 여성인권과 평화를 외치는 장이 되어왔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활동해온 여성들의 성찰은, 전쟁의 본질을 통찰하고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정대협이 그간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으로 주력해온 것 중 하나가 바로 ‘역사교육’이다. 2001년 7월 정대협 병설기구로 발족한 <전쟁과 여성인권센터>는 “지금도 세계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으며, 인권을 유린당하는 여성들이 있다”는 것과 “가장 중요한 것은 ‘평화’를 지키는 것”이라는 점을 교육해왔다.
 
여기에서 말하는 ‘평화’란 단지 전쟁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폭력을 종식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약자에 대한 폭력과 차별에 저항하고 인권을 소중히 하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 바로 평화를 지키는 노력인 것이다. 할머니들이 성매매 피해여성들, 기지촌 피해 여성들에게도 연대의 손길을 내밀었던 것은, 전쟁의 속성과 평화의 참된 의미에 대한 통찰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전쟁과 여성인권센터의 노력과 할머니들의 평화에 대한 소망은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 건립운동으로 확대되었다. 올해 8월 ‘희망의 문 열기’ 행사를 가지고 서울 마포구 성미산 부지에 개관을 준비 중인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은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진실을 기록하고 알리며, 미래 세대에게 평화의 참된 뜻을 가르치는 교육의 장이 될 예정이다.
 
인권과 평화의 소중함을 전하는 일에 누구보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더 적극적이라는 사실은, 우리 사회에 커다란 감동을 전하고 있다.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의 종자돈도 할머니들의 손으로 마련된 것이다.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고 인류역사에 이와 같은 범죄가 재발되지 않도록 교육하고자 박물관 건립에 누구보다 앞장서왔다.
 
“전쟁을 하지 마라”, “우리와 같은 희생자들이 생기지 않도록 하라.”
 
할머니들이 죽음의 순간에서조차 잊지 않는 이 말을 우리 사회는 잊지 않고 되새겨야 할 것이다. 분노에 지지 말라. 포기하지 말라. 진실을 말하고 희망을 가꿔라. 복수가 아닌, 공존의 가치를 회복하라. 할머니들이 전하는 숭고한 메시지야 말로 수요시위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위대한 성과가 아닐까.
 
일본 정부, 어리석은 선택을 끝내야
 

▲ 12월 14일 1000차 수요시위가 열린 일본대사관 앞을 가득 메운 시민들.     © 낭미 

 
수요시위는 국경을 초월해 세계의 시민들이 연대하여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함께 해온 평화적인 집회이다. 이 점을 기리기 위해 수요시위가 열린 일본대사관 앞은 ‘평화로’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리고 수요시위가 열리는 장소에는 일본군 성노예로 희생당해야 했던 소녀의 모습을 형상화한 ‘평화비’가 들어선다.
 
그러나 지난 8일 후지무라 오사무 일본 관방장관이 기자회견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 평화비 설치를 중단시켜 달라고 한국 정부에 요청했다. 후지무라 관방장관은 ‘평화비 설치가 한일간 외교활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줘선 안 된다’는 의중을 표명했다.
 
정대협은 이에 대해 지난 66년 동안 한일외교활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은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국가의 법적 책임 인정도, 사죄도, 배상도 하지 않고 있는 일본정부”라고 응수했다.
 
올해 8월 30일 헌법재판소는 “정부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배상청구권 관련 구체적 해결 노력 하지 않고 있는 것은 피해자의 기본권 침해로 헌법 위배”라고 판결했다. 2006년 당시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 109명이 헌법소원 심판청구를 제기한 날로부터 약 5년에 가까운 시간을 기다린 끝에야 나온 판결이었다. 그 사이 헌법소원을 청구한 피해자 중 48명이 세상을 떠났다.
 
조금 더 빨랐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그래도 우리 정부의 노력을 촉구하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가뭄에 단비 같은 소식이었다. 그만큼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에 있어서 한국정부의 역할에 대한 아쉬움이 컸기 때문이다.
 
헌재 판결 이후, 정부는 일본 정부에게 양자협의를 공식 제안했다. 그러나 일본은 공식답변을 거부하면서 외교 고위 관료들이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배상 책임을 완료했다’는 주장만을 되풀이하고 있다.
 
올 한 해 16분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정대협이 파악하고 있는 234명의 위안부 할머니 중 이제 국내 57분, 해외 6분, 총 63분이 생존해 있다. 언젠가부터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글을 쓸 때면 항상 이런 말로 끝맺음 되는 것이 안타깝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이다. 피해자들에겐 시간이 얼마 없다.
 
이 말은 뒤집어 말하면, 가해자들이 용서받을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미다.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은 진실로 불행한 일이다. 일본정부가 하루빨리 어리석은 선택을 멈추어주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 길원옥 할머니의 말을 덧붙인다.
 
“이제 남은 생이 얼마 없으니 그동안이라도 한이 풀어지기를, 한마디라도 진실한 사과의 말을 듣는 것이 소원이다. 이렇게 저렇게 죽고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이지만 그저 만분지 일 천분지 일이라도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는데 사과하고, 우리들 때문에 이렇게 됐으니까 마음을 푸십시오 라고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 1만인 건립위원 참여하기 www.womenandwar.net

박희정 / 미디어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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