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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거기, 당신에게”
뛰다의 시골마을 예술텃밭 1. 눈이 내리는 이유 
 
※ 공연창작집단 뛰다의 “시골마을 예술텃밭”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뛰다는 2001년 ‘열린 연극’, ‘자연친화적인 연극’, ‘움직이는 연극’을 표방하며 창단한 극단입니다. <하륵이야기> <노래하듯이 햄릿> <할머니의 그림자 상자> <앨리스 프로젝트> <내가 그랬다고 너는 말하지 못한다> 등 많은 창작 레퍼토리를 무대에 올렸습니다.
 
배우의 몸과 소리를 연구하고 관객과 소통하기 위한 다양한 연극형식을 실험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길을 떠나는 뛰다의 무대는 싱가폴, 호주, 러시아, 일본, 아일랜드, 인도 등 해외로도 확장되었고, 외국 극단과의 공동워크숍 및 교류가 활발히 진행 중입니다.
 
작년 뛰다는 강원도 화천으로 이주해 20여 명 단원들이 폐교를 재활 공사하여 “시골마을 예술텃밭”이라 이름 짓고, 예술가들의 창작공간이자 지역의 문화예술공간으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연극이 소수 관객의 문화소비 대상이 아니라, 일상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문화환경’이 되길 꿈꾸는 뛰다의 “시골마을 예술텃밭”으로 독자들을 초대합니다. 그 시작을 여는 이야기는 뛰다의 배우이자 대표인 황혜란씨의 글입니다. [편집자 주]
 
눈 내리는 “시골마을 예술텃밭”의 하루
 
여기, “시골마을 예술텃밭”엔 오늘 눈이 내렸습니다. 눈부시게 하얀 눈이 푹푹 내렸지요. 그런데 눈이 내리는 이유를 거기, 당신은 알고 계신가요? 

▲ 뛰다의 "시골마을 예술텃밭" 하루는 일찍 시작된다.  단원들은 9시에 모여 각자 맡은 소임대로 아침 울력을 마친다. 사진은 남은 음식물을 아랫집 오리들에게 주는 모습.  이곳에선 음식물쓰레기를 분리 수거할 필요가 없다.   © 뛰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야만 한다는 건, 죽었다 깨어도 아침형 인간으로 변신할 수 없는 제게 차라리 고문입니다. 도시에 있을 땐 오전 10시쯤 연습실에 모여 후딱 청소를 하고 신체훈련을 하면 되었는데, 여기 시골은 그렇지가 않아요.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먼저 해야 할 일들이 만만치 않거든요. 결국 출근 시간이 아침 9시로 당겨졌죠.

 
전 거의 매일 조금씩 지각을 해요. 미안한 마음으로 연습실에 들어서면 승준이가 로켓 스토브에 불을 피우고 있죠. 승준이는 뛰다에 합류한 지 이제 꼭 1년이 되었어요. 여리여리한 외모에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때부터 서울에서 살아 온 진짜 토박이 도시인이지만, 승준이는 이곳에서 대자연의 아들로서의 제 모습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나무를 베고, 불을 피우고,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고, 산을 오르고, 제 몸 바삐 움직여 뚝딱뚝딱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걸 참 좋아합니다. 요즈음엔 빵 굽는 재미에 푹 빠져 주변 사람들이 호사를 누리고 있지요. 그 중에서도 승준이의 빵을 가장 좋아하는 건 모은이.
 
모은이는 지금 뛰다의 밥상을 책임지는 ‘밥짱’이랍니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여럿이 함께 모여 북적북적하는 걸 참 힘들어했던 모은이는 혹독한 봄과 여름을 지내며 그 무섭다는 잡초보다 더 빨리 성장했습니다. 그리고는 이런 글을 토해 내더군요.
 
“늘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해야만 하는 일에 급급하게 쫓기며 살았던 내가 28살이 되어서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도 괜찮다고 말해본다. 그것에 따른 책임도 실패도 두려워하지 말자고 되뇌며. 좋은 공기에 감사하며, 기본에 충실한 인간이 되고 싶다고 바라는 나를 만난다. 힘들어서 울다가 별을 보고 아픔을 삼키는 낯선 나를 만난다. 그러다가도 금방 지치고 짜증이 나기도 하지만 그래도 다시 웃고자 노력하는, 조금 자란 내가 신기하다. 나는 실패하고 후회하였지만 지금 여기에 이렇게 살고 있다.”
 
모은이가 모두를 위해 준비해 준 음식은 참 맛나고 감사합니다.
  

▲ 신체훈련 모습. 중앙에 있는 이가 황혜란 대표  ©뛰다 
 
난로에 불 피우기, 쓰레기 정리, 점심 준비, 연출실, 기획실, 화장실 청소 등 각자 맡은 소임대로 아침 울력을 끝내고 나면, 배우들은 두 시간 반 동안 신체훈련을 하고, 연출과 기획 등 스텝들은 그때그때 해야 할 일들을 진행합니다.
 
뛰다는 배우의 몸을 농사짓는 땅에 비유합니다. 연극하기를 농사짓기에 비유합니다. 농부가 오래 묵힌 거름을 땅에 섞어 한 해를 준비하듯, 좋은 종자 골라 그 땅에 뿌리듯,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하듯, 그렇게 뛰다들은 제 몸에 농사를 짓고, 그 몸으로 연극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면 점심시간. 오늘 점심은 부녀회장님께서 마을식당에 와서 먹으라 하시네요. 어제 비가 오는데 배추를 절이느라 힘들어 하신다기에 뛰다들이 마을식당으로 내려가 비를 맞으며 텐트를 치고 몇 백 포기나 되는 배추를 날라드렸거든요. 고맙다 인사차 점심을 차려주셨어요.
 
밖에선 이장님이 불판에 넉넉하게 고기를 구워, 마을 사무장 일을 겸하고 있는 기획팀 민후와 다른 팀원들과 함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시고, 안에선 대여섯 가지가 넘는 김장김치들과 채식인의 비율이 절반 가까이 되는 뛰다들을 위해 부녀회장님께서 쌀뜨물로 구수한 맛을 살려 끓여주신 소미역국이 한 상 가득 차려졌지요.
 
참, 김치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올해 뛰다는 김장을 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답니다. 지난 여름, 마을 어르신들을 위해 “영정사진 찍어 드리기”라는 행사를 열었어요. 마을잔치 말고 어르신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궁리하던 중, 영정사진을 미리 찍어놓으면 건강하게 오래 산다는 얘기를 듣고 기획하게 되었죠.
 
몇 십 년 동안 농 한 구석에 넣어두었던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오셔서 환하게 웃으시던 모습이 아직도 선하네요. 그런데, 그게 참 고마웠다 하시며 동네 어르신들이 집집마다 열 포기씩 김장을 더 해서 뛰다에 주기로 하셨다는 거에요. 이곳 화천 신읍리에 정착한 지 일 년 반이 된 뛰다는 그 소식을 전해들은 날, 이제 정말 마을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구나 하는 기분에 조금 울컥했습니다. 하하.
 

▲ 2001년 여름, 신읍리 마을 어른들을 위해 “영정사진 찍기” 행사를 열었는데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 뛰다 

 
점심을 먹고 나서는 일과가 끝나는 오후 여섯 시까지 공연연습을 했지요. 지금 연습중인 작품은 <노래하듯이, 햄릿>이에요. 셰잌스피어의 <햄릿>을 뛰다식으로 해석해 광대들이 진혼굿 형식으로 풀어가죠. 공연은 뛰다의 존재이유의 커다란 한 축입니다. 공연을 통해 뛰다들은 자신의 예술가로서의 상상력과 몸에 새겨 넣은 삶과 훈련의 흔적들을 드러내 보입니다.
 
도시를 떠나 시골로 내려오겠다는 결정은, 그렇게 만들어지는 우리의 연극의 가치를 돈의 잣대로 재지 않겠다는 결정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연극의 본질에 더 가까이 가 보겠다는, 우리 삶과 예술을 분리시키지 않겠다는 결정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에 걸맞게 ‘유목 연극’을 선택했습니다. 후배 배우 지연이가 쓴 시처럼, 말 그대로 “비바람 치는 자연 속에서, 길 위에서 연극하며 1년 반을 살았”지요. “그 시간만큼 들풀처럼 강인해진 우리의 피부를 뚫고 어떤 새로운 녀석들이 피어날까” 요즈음 공연연습을 하며 참으로 궁금해집니다.
 
이제, 대답을 해야 할 때가 되었나 봅니다. 여기, 뛰다들이 삶과 연극을 일구고 있는 “시골마을 예술텃밭”에 이토록 흰 눈이 나리는 이유를 말입니다. 뛰다의 까까머리 연출, 배요섭의 글을 당신께 전하고, 오늘은 이만 안녕을 고합니다.
 
“첫눈이 내린다. 시인 백석이 말한 것처럼.
가난한 내가 연극을 사랑해서 눈이 푹푹 나리는 것이다.”
 
※ 뛰다의 “시골마을 예술텃밭” 카페 cafe.naver.com/tuida

황혜란 (배우, 뛰다 대표) / 미디어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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