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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추은혜의 페미니즘 책장(7) 엘리자베스 바댕테르「만들어진 모성」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에는 ‘일생이 희생으로 점철되다 실종당한’ 엄마가 등장한다. 소설의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주인공 화자인 ‘너’에게 엄마는 처음부터 엄마였다. 엄마도 자신과 같이 첫걸음을 뗄 때가 있었다거나 열두 살 혹은 스무 살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조차 해 보지 않았던 ‘너’는 온전히 자신을 위해 헌신한 엄마를 영영 잃어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엄마도 ‘내 엄마’가 아닌 한 여자일 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뒤늦게 그 사실을 통감하고 오열하는 주인공과 함께 나도 책장을 부여잡고 엉엉 울었다. 한참 울다 문득 생각났다. 마음 한 구석에서 해결되지 않고 불편하게 남아있는 무언가가. 그것은 바로 은연중에 고착된 ‘엄마’의 이미지라는 것이었다. 고두심씨가 한국의 어머니상을 대표하는 배우로 자리매김한 것은 그녀가 연기해 온 눈물 마를 날 없는 희생의 상징인 어머니들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어머니는 언제부터 어머니가 되는가.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어머니’라는 식상한 문구가 주는 엄청난 부담감. 아직까지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루어 본 것도 없고, 여전히 하고 싶은 것들도 많은 내가 어느 날 아이를 낳게 된다고 해서 그 모든 것들을 단념할 수 있는 희생과 자애와 자녀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샘솟는 ‘어머니’가 될 수 있을까. 심지어 정부에서 국책 과제로 여성들에게 어머니가 될 것을 강요하고 있는 이 시대에 말이다.
 
계보학적으로 분석한 모성애의 근대사

▲엘리자베스 바댕테르의 <만들어진 모성> 
 
“모성애는 오랫동안 본능이라는 말로 정의되어 왔기 때문에 시공을 초월한 여성의 본능에서 비롯된 것이라 쉽게 확신했다. 우리는 여성들이 어머니가 되면서 '어머니'라는 자신의 새로운 조건에 대한 모든 해답들을 자기 내부에서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마치 미리 준비된 자동적이며 필연적인 기능이 발휘될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출산은 자연적인 것이므로 임신이라는 생물학적, 생리학적 현상에도 당연히 일정한 모성적 태도가 상응한다고 상상했다.” 
 <엘리자베스 바댕테르 ,「만들어진 모성」(동녘, 2009) 17쪽>
 
엘리자베스 바댕테르는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페미니스트이자 철학자이다. <만들어진 모성>은 프랑스의 여권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1970년대 말을 배경으로 출간되었다. 당시는 68혁명 이후 등장한 피임법의 보급, 낙태 등을 둘러싸고 사회적 논란이 일고 있던 때였는데 이러한 상황 속에서 모성성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바댕테르의 책은 논란을 한층 더 가속화시켰다.
 
그녀는 이 책에서 단호하게 모성애는 인간적 감정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마치 우리가 느끼는 여타 감정들과 마찬가지로 모성애 또한 불확실하고 불안정하며, 불완전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모성애의 존재 자체를 의심했다기보다는, 우리의 믿음과는 달리 모성애가 인류 보편의 모든 여성들에게 반드시 존재하지는 않으며, 모성애를 발현시키는 것은 여성에 내재한 본능적 차원보다는 윤리, 사회 및 종교적 가치들에 의해서 촉발된 측면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는 <만들어진 모성>에서 프랑스의 17세기부터 20세기에 걸쳐 모성애의 근대사를 계보학적으로 분석함으로써 ‘만들어진’ 모성에 대해 매우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아이를 방관하는 엄마’를 비난하지 않았던 사회
 
어머니의 지위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녀는 우선 당대 아동의 사회적 지위를 고찰한다. 부권사회에서 여성은 상대적으로, 또 절대적으로 약자의 위치에 있었고, 아동은 여성들보다도 더 낮은 계급에 속해 있었다. 아이의 영양과 관련하여 모유 수유 이외의 실질적인 다른 대안이 부재했던 그 시대에 어머니의 모유 수유 거부는 아이의 죽음과 직결되었다.
 
하층민의 경우 경제적인 이유로 아이에게 모유를 먹일 충분한 시간적, 상황적 여유가 허락지 않았고, 중·상층민의 경우 어머니 본인의 건강, 미용 상의 이유와 더불어 사회적 활동 시간을 빼앗긴다는 이유로 유모에게 위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유모에게 위탁한 아이도 제대로 관리되지 못해 죽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따라서 도시의 빈민층부터 가장 부유한 이들까지 아이의 생명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제반의 현상에 대해 사회 전체가 별로 특별하게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았다는데 있다. 오히려 16-17세기 신학자들의 경우 어머니들의 자식들에 대한 자애는 온당치 못하다고까지 비판하였다. 결국 아이에 대해서 방관하는 어머니들에 대해 어떠한 도덕적, 사회적 이데올로기의 비난도 가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약 모성애라는 것이 여성의 자연적인 본성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문화와 사회 환경의 변화에 의해 달라질 수 있는 것인가.
 
“1760년 이후, 어머니들에게 자식들을 직접 돌보라고 권고하면서 모유 수유를 하고 '명령하는' 출판물들이 늘어났다. 이 출판물들은 무엇보다 여성들에게 어머니로서의 의무를 쥐어 주었고, 이후 2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뿌리 깊게 살아 있는 신화를 탄생시켰다. 어머니들은 모두 자기 자식에 대해 모성본능, 혹은 자연발생적 애정을 지니고 있다는 신화가 그것이었다. (중략)

이전의 200년에 비해 새로운 점이 있다면, 이제 모성애를 인류와 사회에 이익이 되는 본성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가치로서 찬미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46쪽)
 
하지만 단 200년 만에 모성애는 여성의 본성으로 주창되기에 이르렀고, 그 배경에는 인구통계학의 발전과 더불어 아동을 잠재적인 경제적 자원으로 인식하게 됨에 따라(‘교육인적자원부’라는 말도 안 되는 이름의 기원은 여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영아사망률을 낮추어야 하는 사회적, 정치적 필요가 자리하고 있었다. 여성으로 하여금 자애롭고 희생적인 어머니가 되도록 하는 메커니즘에는 가정이라는 최소 공동체에서 시작되는 행복에 관한 담론, 여성에게 부여되는 ‘성스러운’ 명예와 같은 모성애의 위대함에 대한 찬양이 작동하였다.
 
“이제 여성은 창세기의 뱀이나 순종해야 하는 교활하고 악마 같은 존재로 비유되지 않았다. 여성은 이성적이며 관대해질 수도 있는 온화하고 교양 있는 사람으로 변모되었다. 그리고 서서히 성모 마리아가 이브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호기심 많고 주제넘으며 뻔뻔스러웠던 여성이 절제와 분별 있는 존재, 즉 야망이라고 해봤자 가정이라는 한계를 넘지 않는 여성으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중략)

이러한 시각에서 사람들은 온화한 모성에 대해 끝없이 찬미하게 되었으며, 모성은 더 이상 강요된 의무가 아니라 한 여성이 희망할 수 있는 가장 즐겁고 부러운 일이 되었다.” (175-178쪽)
 

‘나쁜 어머니’ 도덕적 비난에 갇히다
 
이제 18세기의 어머니들에게는 자식에 대해 느껴야만 하는 사랑이라는 감정은 ‘바람직한 본성으로의 회귀’와도 같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성애를 느낄 수 없었던 여성들에게는 신체적, 정신적 협박이라는 무기가 동원되었다.
 
병에 대한 수사가 그 대표적인 예인데, 만약 어머니가 수유를 거부한다면 본성이 복수를 해서 그녀의 육체에 벌을 내리게 된다는 식이었다. 당시 전혀 인과관계가 없는 경우에도 수많은 의사들이 과학이라는 권위를 내세워 여성들에게 공포심을 조장하였다. 그리고 좋은 어머니와 나쁜 어머니를 구분지어 후자에게는 도덕적, 신학적 비난을 가했다.
 
“나쁜 어머니들이 처하게 될 위험에 대한 극적인 묘사는 본능이 이에 불복종한 여성에게 복수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런데 그녀가 치러야 할 유일한 대가는 본능만이 아니었다. 모든 사람들이 어머니가 모유 수유를 포기하게 된 것은 잘못된 생활 태도일 뿐 아니라, 특히 신에 대한 원죄, 즉 부도덕한 행위라고 묘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략)

어머니의 모유 수유 포기는 자식에게 부당한 짓을 저지르는 것으로 여겨졌고, (중략) 모유 수유를 거부한 여자들은 타락을 상징하며 결정적으로 비난을 받아 마땅하게 된 것이다.” 197쪽
 

결과적으로 18세기에 이르러 ‘새로운 어머니’상이 탄생한 것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어머니의 모습과도 유사하다. 아이가 태어남과 동시에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아이를 위해 사용하고 (결코 산전후 휴가에 해당하는 몇 달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정신분석학 덕분에 자식의 행복에 대한 ‘중요한 책임자’로서의 역할까지 떠맡게 되었다.
 
어머니가 된 모든 여성들은 막대한 책임 앞에 서게 되었다. 일탈적인 행동을 보이는 아이의 깊은 무의식중에는 어머니의 부재 혹은 ‘나쁜 어머니’로 인한 트라우마가 반드시 존재한다고 누구나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에게 부여되는 과도한 책임에는 모성애의 가치를 드높임과 동시에 여성들로 하여금 개인을 상실하고 어머니라는 역할에 갇히게 하는 이중적인 함정이 감추어져 있다.
 
“어머니의 역할에 갇히게 된 여성은 도덕적 비난을 받지 않고는 이제 그 역할에서 빠져나갈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 오랫동안 여성의 노동을 어렵게 만들었던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또 이는 자식 없는 여성들이 무시와 동정을 받고, 자식을 원하지 않는 여성들이 모욕을 받아야만 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중략)

사람들은 이러한 임무의 숭고함과 고귀함을 찬미하는 동시에, 이를 완벽하게 완수할 줄 모르거나 완수할 수 없었던 여성들을 모두 비난했다. 책임감과 죄책감 사이는 종이 한 장 정도의 차이밖에 없었으며, 자식이 아주 작은 곤란을 겪기라도 하면 그 책임감은 곧장 죄책감으로 변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어머니에게 이러저러한 책임을 묻게 되었다.” (236-237쪽)
 
맹목적인 희생은 사랑이 아니다
 
여성이 어머니가 될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여성들 스스로의 욕구나 자기결정권과 별개로 정치 사회적 필요에 의해, 이데올로기의 압력에 의해 강요된 측면이 분명히 존재한다. 모든 여성이 아이를 낳음으로써 본능적으로 자기 자식에 대한 애정과 헌신이 생기게 된다는, 너무나 당연히 여겨져 왔던 가정은, 동시에 그렇지 못한 또 다른 여성들을 병적인 예외로 규정하게 된다.

또한 모성 이외의 그녀들의 욕망을 도덕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무엇으로 여기게 하는 또 하나의 폭력이 될 수 있다. 더 나아가 모성의 조건에 관한 결정적이고 권위적인 이야기들은 잠재적 어머니의 지위를 가지게 될 여성들에게 일종의 무의식적 불안을 느끼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언젠가 읽은 목수정씨의 글에서 당시만 해도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구절이 있었다. 배고프다고 울며 보채는 아기에게 ‘엄마가 먼저 먹어야 너한테 밥을 줄 수 있어’하면서 자신이 먼저 밥을 먹었다는 이야기였다. 엄마의 욕망도 아기의 그것만큼 중요하다. 엄마도 아이와 별개로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어야 하고 ‘~의 엄마’가 아닌 자신의 이름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맹목적인 희생은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땅의 엄마들이 당당하게 ‘너만 짜장면 좋아하니? 나도 짜장면을 좋아해’하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추은혜 / 미디어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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