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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자야, 귀촌을 이야기하다: 내 생에 충분한 두 가지 가르침 
 
붉고 노란 잎들의 향연이 아랫녘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11월 초 어느 날. 나는 K와 함께 뱀사골을 찾았다.
 
며칠 전 뱀사골 인근 마을에서 단풍 축제가 열렸다더니, 아닌 게 아니라 산은 온갖 색깔로 염색한 천을 휘감은 채 우리를 맞았다. 하염없이 눈부신 그 자태 앞에서, 그런데 나는 왜 약간의 쑥스러움을 느꼈던 것일까. 품은 넉넉하고 속정은 깊을지언정 겉으로는 무뚝뚝하기만 한 사람이, 갑자기 고운 옷을 입고 나타나 다정하게 팔짱을 끼는 것 같아서였을까.
 
18년 전, 내 등을 떠민 욕망 

▲ 뱀사골 길을 걸으며 지리산이 내게 준 가르침을 떠올려 본다. 나 자신으로 존재한다는 것과 세상 속에서 산다는 것에 대하여.  ©자야  

 
그러고 보면 내가 지리산에 대해 갖고 있는 편견은 어지간히 뿌리가 깊지 싶다. 하긴, 내게 지리산은 오래도록 반란의 고향 아니면 순결한 전사의 넋이 떠도는 혁명의 성지로만 인식되어 왔으니까. 빨치산의 최후 격전지인 지리산이 수많은 소설과 시와 노랫말에 의해 비장하고 엄숙하고 서글픈 이미지로 반복 재생되는 사이, 나도 모르게 그 이미지들과 지리산을 동일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으니까.
 
지리산을 동경하는 이상으로, 한편엔 늘 묵직한 부담감이 따라다닌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봄이든 가을이든 일찍이 내 발로 직접 올랐더라면, 붉은 철쭉과 노란 단풍에 반해 그 품에 와락 안길 수도 있었을 텐데. 혹시 그랬더라면 혁명과 반란이라는 기호와 상징 너머, 있는 그대로의 지리산을 더 많이 알아갈 수도 있었을 텐데.
 
1993년 여름인가. 다행히 내게도 그런 기회는 찾아왔다. 손가락을 꼽아 보니 지금으로부터 꼭 18년 전의 일이다. 당시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에 다니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런 나를 가리켜 위장취업자라며 비판했지만, 그런 단어를 갖다 붙이기엔 나의 뜻과 목적의식이 너무 희박했다. 절박한 무언가를 위해서 선택했다기보다는, 그저 제 길을 따라 흘러가는 삶의 뒤꽁무니에 붙어 숨 헐떡이며 쫓아가는 형국이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이왕 다니는 거 사람들하고나 잘 지내고 싶은 마음에, 나는 몇몇 동생들과 친목모임 비슷한 것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공장에서 같이 밥 먹고, 간혹 퇴근길에 술 한 잔 기울이고, 월급 탄 지 얼마 안 되는 휴일이면 이따금 가까운 산으로 바다로 놀러 다니는 게 전부였지만, 당시엔 그것이 내가 맺은 유일한 관계였으므로 위안이 되었다.
 
여름 휴가 때 함께 놀러 가자는 말이 나온 건 그 모임에서였다. 누가 그 말을 꺼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한 건 내가 그 자리에서 지리산 종주를 제안했다는 것, 그리고 그와 동시에 경박한 내 입방정을 후회하며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는 점이다.
 
‘아니, 우리가 무슨 죽고 못 사는 사이라고 휴가까지 같이 간담? 더군다나 지리산이라니. 극기 훈련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대체 그 부담스러운 곳에 가서 생고생을 해야 하는 이유가 뭐지? 그것도 산행 경험이 전혀 없는, 나보다도 어린 아이들과 함께 3박4일씩이나?’
 
그날 저녁, 방에 돌아온 나는 벽에 머리를 찧으며 너 미쳤구나, 미친 게 틀림없어, 하고 나 자신을 거듭 책망했다. 그러면서도 끝내 말을 엎지 못했던 건, 당시의 내가 지금보다 훨씬 원칙적이고 완고했기 때문이리라. 결국 나는 휴가를 포기하는 셈 치자고, 기왕이면 즐겁게 다녀오자고 스스로를 달래며 지리산 종주에 필요한 것들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노선을 짜고 예산을 계획하고 또 준비물을 챙기는 과정에서 시간을 두고 곰곰 생각해 보니, 내가 왜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아주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내 객기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심리를 아주 조금 엿보았다고 하면 되려나. 그건 바로 오래 전부터 품어온, 생애에 한번은 지리산 종주를 해봐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해방되고 싶다는 바람과, 의지도 열정도 없이 다만 관성에 의해 살아가는 나 자신을 전혀 새로운 경험을 통해 극한까지 밀어붙이고 싶은 욕망, 그것이었다.
 
산 그대로의 산을 만나다
 
그 해 7월말, 지리산을 찾은 네 명의 여자는 3박4일 종주의 첫걸음을 뱀사골에서 내디뎠다. 산행을 시작한 첫날 새벽, 택시를 타고 뱀사골 입구에 당도했을 때 우리를 맞은 건 쏟아지는 빗줄기였다. 사방이 얼마나 어둡던지, 굵고 촘촘한 빗줄기가 희게 보일 정도였다.
 
서울역에서 밤기차를 타고 남원역에 이르도록 끊이지 않던 여자들의 재잘거림은 언제부턴가 사라진 지 오래고, 어색한 침묵 속에서 몇 분인가 걷자니 안내소가 나타났다. 안내소를 기준으로 이편이 포장된 길이라면 저편은 흙길이었다. 게다가 좁고 거칠어 보이는 흙길 너머로는, 마치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어두운 동굴과도 같은 산이 있었다.
 
그 거대한 산 앞에서 여덟 개의 눈동자는 얼마나 불안하게 흔들렸던가. 차마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지 못하고 공중에서 빠르게 엇갈리는 그 시선들을 보면서 나는 무엇을 예감했던가.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이 후회스럽다고, 이 산행이 두렵기만 하다고 누구 하나 소리 내어 말하진 않아도 모두가 이미 그런 마음이라는 것을 눈치 채지 않았던가.
 
우리 일행은 마침내 산 속으로 들어섰다. 한 발자국씩 걸어 들어갈 때마다 모든 것의 음영이 더 짙어졌다. 비옷을 파고들며 옷을 흠뻑 적시는 빗방울도, 머리를 쪼개듯 울리는 계곡 물소리도, 미끈거리는 흙길에 드리운 무성한 나뭇잎도. 결정적으로는 텐트와 쌀과 부식거리를 나눠진 배낭의 무게를 견딜 수 없었다. 혹시 누군가가 이 침묵을 깨고 곧 불만을 터뜨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괴로움은 배가 됐다.
 
그 후로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비는 계속해서 퍼붓다 그치길 반복했고 산행 초보인 우리의 걸음은 점점 더 느려졌다. 텐트를 치고 밥을 해먹는 일에도 능숙하지 못해서 주변 사람들보다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야 했다. 게다가 화장실과 세면장은 왜 그리 엉망인지. 20대의 예민한 여자 네 명은, 그리하여 배변의 고통과 씻지 못하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에 똑같이 시달려야 했다.
 
그런데 참 신기한 일이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들 사이에 드리운 팽팽한 줄이 조금씩 느슨해지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처음엔 미세하기만 하던 그 변화가 확연해진 건 산을 오른 지 이틀째 되는 날 오후부터였다. 처지는 동료를 기다리느라 멈춰선 발걸음, 힘든 중에도 간간이 터져 나오는 웃음과 콧노래, 스쳐가는 다른 일행과 나누는 짧은 인사, 다 같이 앉아 쉬는 시간에 주변 풍광을 돌아보는 맑은 눈빛들….
 
첫날의 침묵이 단지 내면의 불만을 꽉꽉 눌러 억지로 봉합한 것에 불과했다면, 시간이 지나면서는 무언의 소통으로 바뀌어 갔다고 할까. 우리 중 누구도 더 이상 말이 없어서 불편하거나 불안해하는 사람이 없었던 이유는, 아마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당시의 지리산 종주를 통해 그 산에 덧씌워진 의미와 상징으로부터 조금은 벗어날 수 있었던 게 기억에 남는다. 누군가에게 그 산은 아직 마르지 않은 빨치산의 피눈물이 얼룩진 곳이고, 또 누구에게는 의식화 교육을 위한 최적의 장소이며, 또 다른 이에게는 도(道)의 한 소식을 듣고자 정진하는 수련처이기도 할 테지만, 그리고 그 모든 이름표들이 잘못된 것은 아니겠으나, 적어도 그때 나에게 지리산은 그냥 산이었다.
 
그 어떤 멋진 수사(修辭)도 군더더기로 전락할 만큼 담백하고 과묵하고 웅숭깊은 산. 그 산을 걸으며 최초로 나 또한 그냥 나로 살고 싶다는 본래의 욕망과 접촉하게 된 건, 그러므로 무척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세상 속에서, 그러나 나 자신으로
 
돌아보면 그 후 십 몇 년간은 이름표와 꼬리표 다 떼고 나 자신으로 살기 위해 고군분투해 온 과정이 아니었나 싶다. 나 자신으로 산다는 것은 내면의 조화와 통합이 바깥으로까지 확장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기에, 사실 고군분투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는 내 안의 분열된 자아상들을 내려놓고 그들 간의 싸움을 멈추게 하면 자연스럽게 그리 된다는 것을 몰랐기에, 나는 한참을 더 방황하고 갈등하며 전쟁을 치러야 했다.
 
인도에서 돌아와 그 의미를 겨우겨우 알아갈 즈음, 지리산 안 해발 600미터 고지에 거처가 생긴 것은 물론 우연이었다. 하지만 필연이었을 수도 있다. 물리적인 시공간으로부터 약간 비껴나 있는 듯한 그곳에서, 나는 나로 존재하는 것이 결코 세상과 거리를 두거나 저잣거리를 떠나 사는 것이 아님을, 지리산을 통해 또 한번 배울 수 있었으니까.
 
겉으로 보기엔 평온하고 고요하지만 한 겹 꺼풀을 벗겨보면 흔히 ‘세상 문제’라고 불리는 것들이 전부 그 안에 들어 있는 평범한 시골마을에 정착하면서, 나는 이제 본격적으로 세상 속에서, 그러나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법을 훈련하고 있는 중이다. 아직은 내 안에 분열이 여전하고, 그 반영으로 외적인 갈등 또한 끊이지 않지만, 이 모든 게 조화와 통합으로 가기 위한 과정이라 생각하기에 전처럼 화가 나거나 두렵지만은 않다.
 
다만 언젠가, 나로 존재하든 그렇지 않든 세상 속에 있든 바깥에 머물든 결국 나인 것도 나 아닌 것도 없음을 깨닫게 될 때, 그때는 지리산 언저리가 아닌 좀더 깊은 품 안으로 기어 들어가 살아보고도 싶다. 신과의 합일을 꿈꾸는 아쉬람의 수행자처럼, 생의 몇 날 며칠 정도는 그렇게.
 
그 전까지는 1993년 여름 장대비 쏟아지던 날을 시작으로 2011년 청명한 어느 가을날까지 그러했듯, 이따금 산에 올라 철철이 바뀌는 산의 다양한 면모와 자태에 감탄할 수 있다면 족하리라. 혹 모르겠다. 산의 정령이 바람 속에 흩뿌려 놓은 가르침 하나 마음에 담아 하산할 수 있다면 더욱 행복할지도. 이미 받은 두 가지 가르침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자야 / 미디어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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