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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추은혜의 페미니즘 책장(6) 벨 훅스「페미니즘:주변에서 중심으로」 
 
<추은혜의 페미니즘 책장>은 폭력의 시대에 평등과 자유의 꿈을 꾸는 여성들의 생각과 삶을 소개하는 페미니즘 책 여행입니다. [편집자 주]
 
언젠가 한 남성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 “여성 정치인이 등장하는 것은 그래도 우리 사회가 성 평등의 측면에서 상당히 진보한 것으로 보아야하지 않은가. 예전에 여성이 정치를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시대에 비하면 지금은 정말 많이 나아진 것 아니냐”고.
 
나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었다. 물론 남성의 전유물이던 정치의 영역에 여성의 비율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는 것은 (현재까지도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우리 사회가 적어도 변화의 과정에 있다는 방증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버틀러의 논의까지 가지는 않더라도, 생물학적 성이 그/녀의 사회적 성과 일치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른 가치 체계에 눈 뜨기 

▲ 벨 훅스 <페미니즘: 주변에서 중심으로> (모티브북 ,2010)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사회, 정치적 영역에서 남성과 동일한 위치에 있는 여성은 상당 부분 남성과 동일한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한다. 어쩌면 ‘유리천장’을 깨고 권력 세계로 진입한 소수의 여성들은 기존의 지배질서를 고수하고 유지한다는 암묵적 동의하에서만 그와 그녀의 ‘평등한 권리’라는 것을 보장받는지도 모른다.
 
소위 성공한 여성들이 수많은 자기계발서에서 외치는 ‘여성들이여, 자신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잊고, 남성만큼 적극적이고 치열하게, 그들과 경쟁하면서 살아라’라는 멘트들이 무척 불편하고 씁쓸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 때문일까. 이에 대한 벨 훅스(bell hooks)의 답은 이렇다.
 
“여성들이 성차별주의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미 정해져 있는 성역할을 당연시한 이유는 그들이 기존 문화의 가치체계를 전부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여성은 남성 지배집단이 행사하는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권력을 다른 개념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중략) 여성들 역시 남성 지배집단이나 남성 대부분이 그러하듯 문화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믿는다. 따라서 여성이 지배하더라도 사회는 기존과 다르게 조직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여성은 다른 가치체계를 가져야만 사회를 다르게 조직할 수 있다.” (벨 훅스,「페미니즘: 주변에서 중심으로」144쪽)
 
페미니스트이자 사회운동가인 벨 훅스(bell hooks)는 젠더, 이종, 계급의 이해에 근거한 페미니즘 관점에서 저술활동, 다큐멘터리 등 다방면에서 활동해 왔다. 사실 ‘벨 훅스’는 그녀의 본명이 아니라 필명인데, 이것과 관련된 개인적인 에피소드가 있다.
 
언젠가 리포트에서 그녀의 문장을 인용하면서 일반적으로 그렇듯이 대문자로 표기했었다. 그 때 교수님께서 대문자로 쓴 그녀의 이름을 소문자로 고쳐 주셨는데, 알고 보니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대문자로 써서 고유명사화하면 그 자체로 특권을 갖게 될 것이라고 염려해서 굳이 소문자로 쓰는 것을 고집했다고 했다. 어쨌든 그녀는 흑인 여성으로 태어나 백인 중심의 미국 사회에서 인종, 성별 등에서 기인한 차별을 겪었고, 이 경험이 ‘주변부’를 그녀 일생의 학문적 화두로 삼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페미니즘을 지지한다’에 담긴 뜻
 
가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여성과 관련한 주제가 나올 때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으로 서두를 떼는 것을 종종 듣곤 한다. 이 사회가 페미니스트에게 부과한 상당히 왜곡된 인식과 비방으로 인해 자신에게 돌아올 피해를 염려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미 ‘~ism/ist'로 명명되는 순간 실재와 더 멀어지고 본연의 의미는 상실된다는 철학적 반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말이다.
 
아무튼 나는 여성주의적인 관점과 이슈들에 많은 부분 동의를 하면서도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지칭하는 것을 왜 꺼려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적어도 이 땅의 성적 불평등과 폭력적인 억압 체제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면 누구든지(성별 등을 비롯한 모든 카테고리와 관계없이) 페미니스트라고 믿고 있었기에 더더욱 그러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벨 훅스는 ‘나는 페미니스트다.’라고 말하기보다 ‘나는 페미니즘을 지지한다.’라고 말하자고 한다. 페미니즘을 성차별적 억압을 종식시키려는 투쟁으로 보는 그녀의 입장에서, 페미니스트라는 언명은 여성들로 하여금 자신의 정체성이나 생활방식에 대한 과도한 강제처럼 여겨져 오히려 페미니즘 투쟁에 동참함에 있어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다. 페미니스트라는 말이 특정 정체성, 가치관, 생활방식을 규정하여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 대다수 여성을 존중하지 않거나 배려할 수 없게 만든다는 말이다.
 
“우리는 정치적 참여로서의 페미니즘에 초점을 맞추며, 개인의 정체성과 생활방식을 강조하기를 거부한다. 그럼으로써 혁명적 실천에 참여하게 된다. (중략) 사람들에게 정치적 참여로서의 페미니즘 투쟁에 동참하도록 하려면, ‘나는 페미니스트다’라는 말을 되도록 사용하지 말고 (이는 정체성과 자기정의라는 개인적인 부분을 칭하려고 조직된 언어구조다) ‘나는 페미니즘을 지지 한다’고 말하는 것이 좋다.

(중략)  ‘나는 페미니즘을 지지 한다’로 바꾼다면 정체성이나 생활방식에 중점을 두지 않게 하는 유용한 전략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여성들이 다른 정치운동과 더불어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졌을 때, 한 집단만 우월하다는 식의 언어구조를 피하면서도 페미니즘에 지지를 표현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또한 페미니즘 이론을 더욱 더 탐구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한다.” (62-64쪽)

 
근본적으로 언명 자체가 문제가 된다면, 그것이 페미니스트이든 페미니즘이든 큰 차이는 없어 보인다. (‘나는 ~ 이다’와 ‘나는 ~을 지지 한다’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얼마만큼의 의미 차이를 함축하고 있을까) 그러나 그녀가 여성 차별의 문제에서 비교적 계급적 측면에 주목했다는 것으로 인해 미국 사회의 주류 페미니스트들로부터 아웃사이더로서 줄곧 비판을 받아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페미니즘을 보다 넓은 스펙트럼으로 보고자 했던 그녀의 의도도 이해할 법 하다.
 
다양성과 차이, 그리고 연대와 결속
 
벨 훅스는 지속적으로 여성들 간의 ‘차이’에 주목한다. 여기서의 차이는 여성과 남성이라는 대립구도에서의 성별 차이를 지칭한다기 보다는 여성들 내부의 다양한 경험, 문화, 생각 등의 차이를 의미한다.
 
여성들은 각기 자신이 선 자리와 상황에서 저마다의 문제인식을 가지고 페미니즘을 이야기 할 수 있고, 행동할 수 있다. 어느 하나의 입장으로 폭력적으로 수렴되는 것이 아닌, 페미니즘 속에서 인종을, 계급을, 참정권을, 포스트모던 시대의 담론을 심지어 젠더를 넘어선 섹스의 붕괴까지도 말이다. 그 모든 것이 페미니즘 안에서 보다 평등한 사회를 위해 우리 모두가 취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인 것이다. 그래서 벨 훅스는 “페미니즘 운동에서 우리가 성장하려 한다면 다양성과 의견불일치와 차이가 필요하다”(115쪽)고 역설한다.
 
나아가 그녀는 다양성과 차이 속에서의 연대와 결속을 도모하며(이것들은 결코 상반된 것들이 아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 굳이 반 남성 정서를 가질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성 차별적 억압 체제, 뿌리 깊은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희생자가 되었던 것은 비단 여성뿐만이 아니다. 그러한 시스템의 본질은 폭력이므로 그 폭력의 대상은 체제 속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역할을 맡아야 했던 모든 개개인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남성 또한 고정된 성역할 속에서 고통을 겪었다고 해서 결코 남성이 여성을 학대하고 억압하는 것의 심각성이 축소되는 것은 아니며 그들의 책임이 무효화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의 고통 자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근본적인 변화의 촉매제가 될 수 있다.
 
“남성은 여성을 억압한다. 인간은 고정된 성역할로 인해 상처를 입는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사실은 공존한다. 고정된 성역할로 인해 남성이 어떤 식으로든 상처 입었다는 점을 인정했다고 해서 남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억압이 용서되지는 않는다. 페미니즘 운동가들은 남성이 입는 상처가 존재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126-127쪽)
 

폭력을 뿌리 뽑으려면
 
벨 훅스는 우리에게 페미니즘 투쟁에 있어서 현재 상황을 그대로 유지하는 데 동조하도록 사회화된다는 것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성차별을 영속시키는 가장 근본적인 메커니즘은 바로 체제에 저항해야 할 주체들이 체제에 순응하고 그 틀 안에서 제한적인 자유를 누리는 데 만족하는 것이다. 성차별주의 이데올로기는 끊임없이 여성에게 너의 존재는 희생자라고 가르친다.
 
그러한 주입은 여성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경험 일체를 균일화시켜 모든 어려움을 여성성 자체에 내재한 것으로 환원시키고, 희생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여성성 자체를 버려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결국 수동적인 태도로 일관하든, 적극적이기 위해 남성성으로 대표되는 가치들을 체화하든 간에, 어떤 섹슈얼리티라고 고정되는 하나의 성적 정체성에 매몰되는 것이다. 이 결과 성 차별 억압의 종식이란 바람이자 목표는 요원한 것이 되고 만다.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을 종식시키기 위한 페미니즘 투쟁을 지속하려면 반드시 폭력의 종식을 위한 총체적 운동으로 간주해야 한다. 이제껏 페미니즘 운동은 남성이 가하는 폭력에 초점을 맞춰왔고 그 결과 남성은 폭력적이고 여성은 그렇지 않으며 남성은 학대자이고 여성은 희생자라는 성차별적 고정관념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었다.

이런 고정관념은 지배집단이 피지배자를 계속 지배하도록 용인해도 된다는 생각을 이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이 얼마나 받아들이고 영속시키는지 사람들이 신경 쓰지 않도록 한다. 또한 타인에게 얼마나 강제적 권위를 행사하거나 폭력적 행동을 하는지 간과하거나 모르는 체 하도록 한다. 여성이 남성만큼 자주 폭력적 행위에 가담하지 않는다고 해서 여성폭력의 현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폭력을 뿌리 뽑으려면, 남성과 여성이 모두 폭력 사용을 지원하는 집단이라고 여겨야 한다.” (187쪽)

 
결국 그녀의 주장은 “우리가 바꾸어야 하는 것은 이 세상에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의 성별이 아니라 물리적 관계(203쪽)”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우리가 저항해야 할 대상은 누군가가 아니라 그 누군가를 폭력적으로 만드는 바로 그 시스템이다.  (추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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