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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추은혜의 페미니즘 책장(5) 주디스 버틀러「젠더 트러블」 
 
언젠가부터 가장 어려워하는 글쓰기 중에 하나가 바로 ‘자기소개서’가 되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실로 엄청난 질문에 때로는 500자로, 때로는 A4용지 5매 이상으로 답해야 하는 것이다.
 
좋아하는 것들, 지금까지 해왔던 것들을 쭉 나열해 놓고 종합하면 그것이 ‘나’가 될까. 그래서 어떤 곳은 친절하게도 몇 가지 범주를 제시해 주기도 한다. 그 항목들에 대한 답을 성실히 채워 가면 그가 ‘알고 싶어 하는 나’에 대해 알 수 있겠다,고 말하듯이.
 
어쩌면 내가 알고 있는 나의 정체성이라는 것도 실제의 나와는 또 별개로 사실상 여러 범주들을 모아 놓은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범주들 중에는 단 한 번도 질문을 제기해 본 적 없는, 나의 정체성을 담지 하는 요소로서 아주 당연하게 여겼던 섹스/젠더 항목도 포함될 것이다.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의 「젠더 트러블(Gender Trouble)」은 출간된 직후 엄청난 페미니즘 논쟁의 불을 지폈던 책이자, 현재까지도 수많은 논의거리를 끊임없이 생산해 내고 있다. 그녀가 그 책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들이 그간 여성 해방이라는 기치 아래 수렴되었던 페미니즘의 목소리와는 다소 상반된 내용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젠더는 없다’ 

▲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2008, 문학동네)      
 
주디스 버틀러는 페미니즘이 반드시 ‘여성’이라는 집단적 범주를 가정해야 하는가에 대해 본질적인 물음을 던지며, 범주로서의 여성 주체에 전제된 보편성과 통일성은 강제적 이성애 체계라는 또 다른 폭력을 발생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실상 모든 정체성이란 허구적으로 구성된 것이고 사회가 이상화하고 내재화한 규범이 반복적으로 수행되어서 몸에 (재)각인되는 행위에 불과하다면, 섹스나 섹슈얼리티도 그런 의미에서 결국에는 젠더라고 말한다.
 
보통 섹스와 젠더를 구분할 때 섹스는 생물학적인 성이고 젠더는 사회학적인 성으로 이해된다. 보부아르가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고 말했을 때 사람은 어떤 성을 가지고, 어떤 성으로서 성별화되어(섹스화) 태어나는 것이며, 성별화되는 것과 인간이 되는 것은 동시 발생하는 것으로서 보았다. 섹스란 일종의 실재로서 변할 수 없는 것인 반면 젠더는 획득된 문화적 구성으로 여긴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를 뒤집어 생각해서 구성된 젠더의 위상이 섹스와 완전히 별개라고 이론화되면 젠더 자체는 단지 부유하는 인공물에 지나지 않게 된다. 즉 이분법적 젠더 체계가 전제하고 있는, 젠더가 섹스를 모방하는 관계라든지 젠더는 섹스를 반영하거나 섹스의 규제를 받는다는 생각이 거부될 수 있는 것이다. 생물학적 남자의 몸은 여자, 이른바 여성적인 것의 의미와 동일할 수도 있다.
 
“섹스가 불변의 특성을 지녔다는 것이 논쟁선상에 있다면, 아마도 '섹스'라 불리는 이 문화적인 구성물은 젠더만큼이나 문화적으로 구성된 것이 될 것이다. 어쩌면 섹스는 언제나 이미 젠더였는지도 모른다. 그 결과 섹스와 젠더는 전혀 구별될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된다. (중략)

젠더는 섹스 자체가 설정되는 바로 그 생산장치를 지칭하기도 한다. (중략) 젠더는, '성적으로 구분된 자연'이나 '자연적 섹스'가 '담론 이전에', 문화에 앞서서, 그 위에서 문화가 행해지는 정치적으로 중립된 표면으로 생산되고 설정되게 하는 담론적/문화적 수단이기도 하다.” (「젠더 트러블」(Gender Trouble)97쪽)

 

무엇이 개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가
 
그녀의 주장이 페미니즘 논쟁의 중심에서 부딪혔던 것은 바로 그녀가 젠더뿐만 아니라 섹스마저 구성된 문화적 산물이며 그것을 당연하게 주어진 것으로 여김으로써 이분법적 성적 체계를 공고히 해 왔다고 선언함에 있었다.
 
그녀는 묻는다. 여성적인 것으로 상징되거나 사회에서 흔히 그렇게 통용되는 모든 규범, 관습, 가치 등등을 다 제하고서 순전한 ‘섹스’로서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보통 생물학적인 성을 결정하는 근거로 지목되는 외부 성기나 몸의 형태, XX/XY염색체 등도 더 이상 독자성이나 순수성을 주장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생의학적 연구 결과를 통해서 잘 알려져 있다. ‘여성/남성’의 분리과정을 거쳐 그 중 하나에 포함되어야만 인간으로 인정받는 현실 속에서, XX나 XY라는 성 염색체 범주에 들지 못하는 현대인의 10%는 과연 어디에 설 수 있을까.
 
배제당한 삶은 ‘삶’이라는 이름을 갖지 못한다. 나의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이 내가 ‘있다’는 자체로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범주에 속함으로써 사회적으로 ‘인정’받아야만 가능하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철학적 설명에서 무엇이 '개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지는 거의 언제나 개인의 어떤 내적 자질이 내내 통용되는 자기 동일성이나 연속성을 확립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핵심으로 한다. (중략) 즉, 젠더를 형성하고 구분하는 규제적 관행은 어느 정도까지 정체성, 주체의 내적 일관성, 실로 그 사람의 자기 동일적 상태를 구성하게 되는가? (중략)
 
'사람'의 '일관성'과 '연속성'은 그 사람됨의 논리적이거나 분석적인 특질이 아니다. 그보다는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유지되는 인식 가능성의 규범들이다. '정체성'이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라는 견고한 개념을 통해 확보되는 한 '비일관적' '불연속적'인 젠더 존재의 문화적 등장은 '사람'이라는 개념 자체에 의심을 품게 만든다. 이런 젠더 존재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결국 '사람'으로 정의되는 문화적 인식 가능성이 있는 젠더 규범을 따르는데 실패한 존재이다.” (115쪽)

 
만일 어떤 사람이 '여성이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니며, 따라서 그 용어는 그에 대한 완전한 의미가 될 수 없다. 이미 젠더화된 '사람'이 젠더의 특정한 고유장치를 초월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젠더는 다른 역사적 맥락 속에서 늘 가변적이고 모순적으로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푸코의 계보학적 연구가 보여주듯이, 성의 범주라는 것은 마치 우리가 여성적인 것, 혹은 남성적인 것이라고 부르는 담론적 설명들의 원인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 자체가 그 모든 것들에 의해 생산되고 구축된 결과물일 수 있는 것이다.
 
‘배제되는 존재’ 드러내기
 
젠더뿐만 아니라 섹스의 구분까지도 강제적인 이성애 담론 체계의 결과로 거부하는 버틀러에게 주로 제기되었던 반박은, 그렇다면 과연 여성 없는 페미니즘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구분 없는 정치적 구호가 공허한 외침들에 그치지 않는가하는 우려도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녀가 강조하고 싶었던 부분이 성차가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유효하지 않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녀가 문제시하는 것은 우리가 물질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치 인식적으로 의미화 되는 것과 전혀 별개의 영역으로서 ‘담론 이전의’ 필연적인 것으로 여기는 경계 바로 그 자체이다.
 
그녀는 단순히 ‘몸’이 구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런 구성이 또 하나의 규범적 범주로 자리 잡아 오직 그 기준에 부합하는 이들에 한하여 인간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또한 포함되지 못하는 다른 이들은 실제 삶의 영역에서도 배제시키며 그 존재 자체가 부정된다는 사실 그 자체를 드러내고자 했다.
 
페미니즘에 여러 목소리들이 있지만 반드시 그것들을 하나로 수렴시켜 한 목소리를 내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즘은 굉장히 넓은 영역에서 각각의 문제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여겨진다.
 
단지 바라는 것은, 페미니즘이 특정한 그 각 상황에서 충분히 역할을 하되 누군가에게 또 다른 폭력으로서 작용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이고 노력하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기존에 전혀 당연시되지 않았던 것들에 의문을 제기하고 새로운 삶의 가능성들과 방향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근본적으로 급진적인 시각이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말할 수 있고, 모든 것을 꿈꿀 수 있을 것이다.  (추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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