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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무지개 걸개를 찢는가
대학 레즈비언문화제 매년 기독교도들에 테러  

[여성주의 저널 일다] 시로

이화여대에서는 매년 레즈비언 문화제가 열린다. 이화레즈비언인권운동모임 ‘변태소녀 하늘을 날다’(이하 ‘변날’)에서 주최하는 이 문화제는 2001년 첫 개최 이후 올해 벌써 6회를 맞았다. 변날은 대학에서 동아리지원금과 동아리방 등을 제공받고 있는 ‘공식적인’ 모임이다. 동성애자로 커밍아웃하기 쉽지 않은 현실 속에서, 대부분 대학의 동성애자모임들은 학교에서 정식기구로 인가받아 활동하는 경우가 드물다. 때문에 변날의 ‘공식적인’ 지위와, 정기적으로 개최되는 레즈비언 문화제에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자료집 훔치고, 전시물 찢고, 성유 뿌려
 
레즈비언 문화제는 기획에서 실행까지 변날 회원들이 직접 참여하는데, 회원들의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문화제를 준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들은 전시물을 게시하기 위해 모두 함께 밤을 새워 아무도 없는 새벽에 움직이곤 한다. 바닥에 떨어진 전시물을 보수하기 위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곰돌이 탈을 뒤집어쓰고 돌아다니는 것을 고안해내기도 했다. 동성애자라는 정체성에 왜곡된 이미지를 입혀 무거운 사회적 낙인을 찍어버리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문화제를 만드는 사람들이 가장 신경을 쓰는 것은 따로 있다. 누군가로 인해 전시물이 훼손당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매년 문화제 기간에 빠짐없이 전시물이 도난당하거나 훼손됐다. 레즈비언 문화제의 전시물 훼손은 몇몇 개인에 의해 충동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특정종교를 믿는 집단에 의해 계획적으로, 한 해도 빠짐없이 계속되고 있다.
 
2001년 첫번째 문화제 때는 학내 기독교도들에 의해 자료집 수백 권을 도난당했고, 무지개 걸개와 자보 역시 도난당했다. 변날 동아리방과 전시물 등에는 기독교도들이 사용하는 ‘성유’가 뿌려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동아리방에 몰래 잠입한 이들은 사진을 찍어 각 교회와 학교기관에 공문을 발송하고 ‘레즈비언을 위한 기도회’를 하자고 요청하기까지 했다. 동성애를 ‘죄’로 몰아가는 기도회와 예배는 지금까지도 몇몇 교회에서 열리고 있다.
 
올해 레즈비언 문화제에서도 역시 누군가 전시물을 찢어 놓고 문화제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무지개 걸개를 훔쳐가 버렸다. 다행히 이번엔 범인이 잡혔는데, 모 기독교 동아리 소속 3인이었다. 변날은 이들에게 자신들이 한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고 공식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들은 ‘종교적 신념’에 따라 한 행동이었다며, 마치 자신들이 순교자라도 된 듯 ‘도둑질’을 정당화했다. ‘하나님이 무지개 걸개를 떼라고 시키셨다’는 말까지 나왔다고 한다. 심지어 자신들의 신원이 공개되었으니, 변날 회원들의 신원 또한 공개하겠다며 협박해오고 있는 상황이다.
 
동성애자 혐오.차별행위가 ‘정당한 권리’ 행사인가
 
▲ 기독교인이라고 밝힌 학생이 쓴 자보 내용.
중요한 것은, 동성애자 권리향상을 위해 누군가 위험을 감수하며 정성껏 준비한 문화제를 도난하고 훼손하며 공격하는 행위에 대해, 그 폭력의 심각성이 부각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타인의 권리를 무시하고 침해하는 것, 레즈비언 문화제 전시물을 훔치고 찢고 훼손하는 것은 소수자에 대한 혐오범죄에 해당된다. 그러나 성소수자 운동에 가해지는 폭력은 시민의 ‘정당한 권리’라도 되는 양 묵인되곤 한다.

 
2003년 이화여대는 변날 측의 장소사용 허가요청을 불허해서 ‘성적지향에 의한 차별’로 국가인권위에 제소된 바 있다. 당시 대학 측은 레즈비언 활동을 저지하기 위한 기독교도들의 집회를 불허했으므로, 변날의 활동 또한 허가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학교는 중립적 입장이라는 것이다. 무지개 걸개 도난사건이 발생한 현재에도 대학은 유사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태도가 중립적인 것일까?

 
학교 측의 반응은 동성애자에 대한 기독교학생들의 차별과 혐오범죄행위를 레즈비언 학생들의 인권활동과 동일하게 취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다. 동성애자 권리를 찾기 위한 활동에 테러를 가하는 것이 어떻게 ‘정당한 권리’가 될 수 있는가.

 
‘무지개 걸개 도난 사건’은 비단 특정장소에서 일어나는, 오늘만의 일이 아니다. ‘종교적 신념’을 운운하며 성소수자에 대해 차별과 폭력이 가해지는 일은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다. 청소년보호법 시행령에서 ‘성적지향’ 목록이 삭제될 당시에도, 기독교집단들은 동성애자로부터 마땅히 청소년을 보호해야 한다며 강력 반대했다. 또 지난 해 법무부 차별금지법안에서 ‘성적지향’ 조항이 누락된 배경에도 기독교집단의 로비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성소수자의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행위다. 이들은 신앙을 들먹이며 곳곳에서 끊임없이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유포시키고 정당화하고 있다.

 
현재까지도 레즈비언 문화제를 훼손한 이들은 자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제 총학생회와 자치단위들, 개인들이 연합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어찌 보면 한 대학교 안에서 일어난 작은 사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작은 사건에 주목할 필요는 있다. 왜냐하면 이 싸움은 대상이 ‘폭력’, ‘혐오’ 등의 관념이 아니라, 눈앞에 드러난 폭력행위와 가해 집단이 있기 때문이다.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편견에 대항하여 변화를 가져오는 힘, 그것은 이러한 사건 하나하나를 해결해나가는 데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2008/10/07 ⓒ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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