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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자연재해로 소중한 사람을 잃은 슬픔에 대하여
이경신의 도서관 나들이(40) <상실수업>이 보내는 메시지
얼마 전 일본 동북지역을 강타한 지진과 쓰나미로 인해 목숨을 잃거나 행방을 확인할 수 없는 사람들이 2만 7천명을 넘었다고 한다. 끔찍한 자연재해를 피해 용케 살아남았지만, 가족, 친구, 이웃, 동료 등 가까운 사람들을 잃어 상심하고 낙담해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마음이 아프다.
충분히 슬퍼하라
우리는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지 않고 살 수는 없다. 하지만 이렇게 한꺼번에, 또 갑작스럽게 사랑하는 사람들을, 아니 사랑하는 사람 모두를 잃게 된다면 그 충격이 얼마나 클까? 이처럼 큰 슬픔을 치유하는 데는 분명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 데이비드 케슬러 <상실 수업> (이레)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와 데이비드 케슬러라면, 아픔과 슬픔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하리라. 충분히 슬퍼하라. 울고 싶으면 마음껏 울라. 강한 척, 자신을 통제하지 말고 슬픔을 숨기지 말라.
슬픔의 끝은 없지만, “치유의 선물을 받기 위해서는 슬픔을 완전히 겪어야 한다”고 <상실수업>(이레, 2007)에 적고 있다. 소중한 이를 잃은 사람들에게는 이제 살아가면서 자신의 내면과 외적인 삶, 그리고 상실의 슬픔을 융화시켜나가는 삶의 과제가 남아 있는 것이다.
슬픔을 겪는 사람도 자신의 슬픔을 막아서는 안 되겠지만, 슬픔을 지켜보는 사람도 슬픔을 겪은 사람을 통제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우리가 이 중요한 조언을 종종 잊어버리고, 타인의 상처를 억지로 끄집어내려 하거나 상처를 억누르는 일은 흔하다.
때로는 밖에서 간섭하는 것이 적절할 때도 있다. 두 저자는 우리에게 ‘스스로의 직관에 따라’ 개입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결정하라고 조언한다. 슬퍼하는 사람을 지켜보는 자로서의 역할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니다.
모든 상실은 고통스럽다
각자가 겪는 상실감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 밖에서 판단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가슴에 와 닿는다. 겉으로 보기에 비슷해 보이는 상실도 겪는 개개인에 따라 충분히 다를 수 있다. 또 타인의 상실이 나의 상실보다 더 나아보이거나 더 안 좋아 보일 수도 있지만, 상실을 비교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였다. 할머니는 세상을 먼저 떠난 아들 생각으로 밤잠을 설치며, 우울하고 수척해지셨다. 아버지를 잃은 내 눈에도 밤마다 사진첩을 뒤적이며 눈물짓는 할머니의 모습이 영 딱해 보이기만 했다. 하지만 슬픔에 휘청거리는 할머니를 놓고, 어머니는 남편을 잃은 당신의 슬픔에 비할 바가 아니라며 냉정히 말씀하셨다.
그때만 해도 나는 자식을 잃은 부모의 상실감이 배우자를 잃은 상실감보다 더 크다고 생각하며, 어머니의 비교가 부당하다고 속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의 비교 역시도 정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당신의 병도 깊었는데 당장 남겨진 자녀들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그 짐이 버거웠던 어머니는 당신의 슬픔이 더 깊이 느껴졌을 것이고, 고령인 할머니에게는 삶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아들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삶이 끝나는 암담함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할머니는 아들이 죽은 지 1년 되던 이듬해 이 세상을 떠나셨다. 그리고 어머니는 병이 더 깊어져 시력을 잃은 채 수 년을 더 어둠 속에서 슬픔을 삭혀내야 하셨다.
그렇다. 모든 상실은 고통스럽다. 뿐만 아니라 상실을 겪은 사람만이 그 경험이 주는 슬픔의 깊이를 알 수 있는 만큼 상실감의 비교도 당연히 불가능하다.
위로라면 무엇이든
“녀석이 마지막 순간들을 보낸 그 방에 대해 쓰면서 나는 가족 중의 누군가가 죽음을 맞은 방은 다시 사용하지 않는다는 어느 고장의 관습에 대해 생각한다. 그곳에선 방 안의 모든 것들이 죽는 당시의 상태 그대로 보존되고 아무도 그 방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아마도 한 세대 정도가 지나가면, 그 집이 아무리 넓어도 살아남은 사람들이 사용할 방이 남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관습이 왠지 마음에 든다.”(장 그르니에 <어느 개의 죽음>(1957) 중에서)
내 남동생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한동안 어머니의 방을 생전 모습 그대로 보존하기를 고집했다. 동생은 어머니의 방을 지키면서 어머니를 곁에 두는 것처럼 자신을 위로한 것이 분명하다. 상실로 인한 슬픔과 고통이 개개인마다 다르듯이, 위로 또한 다를 것이다. 따라서 가까운 존재의 죽음에 직면해 마음을 정리하고 치유하는 방법들도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자신의 경험을 말, 또는 글로 자세하게 풀어내며 타인과 슬픔을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죽은 사람에게 편지를 쓰고, 나 스스로가 죽은 사람인 듯 답장을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죽은 자와 나눈 과거를 이상화하면서, 차근차근 유품을 정돈하면서 마음도 함께 정리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곁에 살아 있는 소중한 사람과의 섹스를 통해서, 또는 이사를 가거나 새로운 파트너, 새로운 친구, 이웃을 만나 위로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귀담아 둬야 할 것은 슬픔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꿈도, 천사의 존재도, 죽은 자의 환영도, 죽은 자와의 대화도, 무엇이든 수용할 수 있다. 진위를 확인할 수 없는 윤회, 천국이나 다른 행성의 존재 등 사후세계에 대한 여러 믿음들도 그냥 위로로 삼으면 된다.
한 밤중, 벽에 가만히 세워둔 기타가 ‘퉁’하고 소리를 내는 걸 듣고 죽은 조카의 존재를 느끼며 위로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죽은 자가 산 자에게 메시지를 보내왔다는 것을 남들이 믿지 않아도 상관없다. 내가 위로를 받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만 해도 꿈으로 위로 받은 적이 많았다. 할머니의 장례식 날 장지에서 돌아온 오후, 울다 지쳐 쓰러져 마루바닥에서 깜빡 잠이 들었는데, 할머니가 꿈에 등장했다. 할머니는 아무 말씀 없이 환하게 미소 지으며 나를 품에 꼭 껴안아주셨고 난 바로 잠에서 깨어났다. 그 순간 내 마음 속 슬픔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때 이후 난 할머니의 죽음이 더는 고통스럽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1년 정도 자책감으로 고통스러워하던 어느 날, 난 돌아가신 아버지가 나를 보러 집으로 잠시 돌아온 꿈을 꾸었다. 다른 세상에서 잘 살고 있다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꿈을 깨고도 너무나 생생해서 꼭 현실 같았다. 다른 세상의 존재를 믿지 않는 내게도 그 꿈은 큰 위안이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어느덧 나는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서 빠져 나오고 있었다.
비록 삶 속에서 죽은 자의 환영을 만나거나 천사를 만난 적은 없지만, 내 경우 꿈이 여러 차례 상실감을 극복하고 마음의 평화를 되찾는 데 도움을 준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렇게 각자가 스스로를 위한 위로를 찾는 것은 상처 입은 마음을 치유하는 데 있어 절대 필요한, 꼭 거쳐야 할 단계다.
상실, 삶과 죽음을 알아가는 과정
그런데 우리는 상실의 경험을 놓고, 죽음과 신의 처벌을 연결짓곤 한다. ‘내가 뭘 잘못해서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야 하지?’, ‘무얼 그렇게 잘못했기에 젊은 나이에 죽어야 했을까?’ 등.
고등학교 시절 어머니를 잃은 뒤, 성실하게 성당을 다니면서 봉사활동에 열심이었던 한 여성이 남동생마저 잃게 되었을 때, 더는 성당에 발길도 주지 않기로 했다는 이야기가 기억난다. 바르고 잘 살려고 항상 애써왔는데도 신이 소중한 사람들을 데려가 버렸으니, 억울하고 부당하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마치 잘못을 저질러 큰 벌을 받는 느낌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을 앞에 놓고 신과의 거래도 시도한다. ‘앞으로 더 착하게 살 테니, 이 사람을 살려 달라’면서 말이다.
이번 일본 대지진을 놓고도 ‘천벌’을 입에 올리는 자들도 있었지만, 두 저자가 지적하듯이, 상실은 벌이 아니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상실의 경험들은 우리가 삶과 죽음을 알아가는 과정일 뿐이다. 우리가 아무리 자연재해를 대비한다고 한들 완벽하게 막아낼 수는 없고, 어느 누군가는 또 자연재해에 희생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간의 현실이다.
저자들은 우리에게 현실감각을 잃지 말라고 충고한다. 자연재해로, 사고로, 질병으로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것도, 어린 아이가 죽는 것도 결코 새로운 일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어 온 현실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어떤 식으로든 죽음에 노출되어 있어 우리는 상실의 경험들과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
저자들의 말대로,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살아야 할 이유를 아무도 알지 못한다. 아무리 열심히 운동하고 좋은 식습관을 가졌다고 해도, 선량하고 성실한 삶을 살아왔거나 영적 성장을 도모해 왔다고 한들, 반드시 생명을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무엇도 우리의 생명을 절대적으로 보장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인생 속에서 여러 상실을 겪는다. 그리고 이미 겪은 상실에 대한 고통은 반복해서 삶의 수면으로 드러난다. 저자들은 우리가 이러한 반복적 슬픔을 맛보는 과정에서 자기치유의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낙관한다. 이들이 죽음이 끝이 아니라 다른 삶으로의 이동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굳이 다음 생에 대한 믿음을 갖지 않더라도, 지금껏 인간이 이뤄낸 역사를 통해 볼 때 ‘상실에 맞설 힘이 우리 인간에게 있고’, ‘상실이 성장을 위한 기회’라는 것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이경신의 도서관 나들이(40) <상실수업>이 보내는 메시지
얼마 전 일본 동북지역을 강타한 지진과 쓰나미로 인해 목숨을 잃거나 행방을 확인할 수 없는 사람들이 2만 7천명을 넘었다고 한다. 끔찍한 자연재해를 피해 용케 살아남았지만, 가족, 친구, 이웃, 동료 등 가까운 사람들을 잃어 상심하고 낙담해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마음이 아프다.
충분히 슬퍼하라
우리는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지 않고 살 수는 없다. 하지만 이렇게 한꺼번에, 또 갑작스럽게 사랑하는 사람들을, 아니 사랑하는 사람 모두를 잃게 된다면 그 충격이 얼마나 클까? 이처럼 큰 슬픔을 치유하는 데는 분명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 데이비드 케슬러 <상실 수업> (이레)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와 데이비드 케슬러라면, 아픔과 슬픔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하리라. 충분히 슬퍼하라. 울고 싶으면 마음껏 울라. 강한 척, 자신을 통제하지 말고 슬픔을 숨기지 말라.
슬픔의 끝은 없지만, “치유의 선물을 받기 위해서는 슬픔을 완전히 겪어야 한다”고 <상실수업>(이레, 2007)에 적고 있다. 소중한 이를 잃은 사람들에게는 이제 살아가면서 자신의 내면과 외적인 삶, 그리고 상실의 슬픔을 융화시켜나가는 삶의 과제가 남아 있는 것이다.
슬픔을 겪는 사람도 자신의 슬픔을 막아서는 안 되겠지만, 슬픔을 지켜보는 사람도 슬픔을 겪은 사람을 통제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우리가 이 중요한 조언을 종종 잊어버리고, 타인의 상처를 억지로 끄집어내려 하거나 상처를 억누르는 일은 흔하다.
때로는 밖에서 간섭하는 것이 적절할 때도 있다. 두 저자는 우리에게 ‘스스로의 직관에 따라’ 개입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결정하라고 조언한다. 슬퍼하는 사람을 지켜보는 자로서의 역할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니다.
모든 상실은 고통스럽다
각자가 겪는 상실감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 밖에서 판단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가슴에 와 닿는다. 겉으로 보기에 비슷해 보이는 상실도 겪는 개개인에 따라 충분히 다를 수 있다. 또 타인의 상실이 나의 상실보다 더 나아보이거나 더 안 좋아 보일 수도 있지만, 상실을 비교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였다. 할머니는 세상을 먼저 떠난 아들 생각으로 밤잠을 설치며, 우울하고 수척해지셨다. 아버지를 잃은 내 눈에도 밤마다 사진첩을 뒤적이며 눈물짓는 할머니의 모습이 영 딱해 보이기만 했다. 하지만 슬픔에 휘청거리는 할머니를 놓고, 어머니는 남편을 잃은 당신의 슬픔에 비할 바가 아니라며 냉정히 말씀하셨다.
그때만 해도 나는 자식을 잃은 부모의 상실감이 배우자를 잃은 상실감보다 더 크다고 생각하며, 어머니의 비교가 부당하다고 속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의 비교 역시도 정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당신의 병도 깊었는데 당장 남겨진 자녀들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그 짐이 버거웠던 어머니는 당신의 슬픔이 더 깊이 느껴졌을 것이고, 고령인 할머니에게는 삶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아들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삶이 끝나는 암담함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할머니는 아들이 죽은 지 1년 되던 이듬해 이 세상을 떠나셨다. 그리고 어머니는 병이 더 깊어져 시력을 잃은 채 수 년을 더 어둠 속에서 슬픔을 삭혀내야 하셨다.
그렇다. 모든 상실은 고통스럽다. 뿐만 아니라 상실을 겪은 사람만이 그 경험이 주는 슬픔의 깊이를 알 수 있는 만큼 상실감의 비교도 당연히 불가능하다.
위로라면 무엇이든
“녀석이 마지막 순간들을 보낸 그 방에 대해 쓰면서 나는 가족 중의 누군가가 죽음을 맞은 방은 다시 사용하지 않는다는 어느 고장의 관습에 대해 생각한다. 그곳에선 방 안의 모든 것들이 죽는 당시의 상태 그대로 보존되고 아무도 그 방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아마도 한 세대 정도가 지나가면, 그 집이 아무리 넓어도 살아남은 사람들이 사용할 방이 남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관습이 왠지 마음에 든다.”(장 그르니에 <어느 개의 죽음>(1957) 중에서)
내 남동생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한동안 어머니의 방을 생전 모습 그대로 보존하기를 고집했다. 동생은 어머니의 방을 지키면서 어머니를 곁에 두는 것처럼 자신을 위로한 것이 분명하다. 상실로 인한 슬픔과 고통이 개개인마다 다르듯이, 위로 또한 다를 것이다. 따라서 가까운 존재의 죽음에 직면해 마음을 정리하고 치유하는 방법들도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자신의 경험을 말, 또는 글로 자세하게 풀어내며 타인과 슬픔을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죽은 사람에게 편지를 쓰고, 나 스스로가 죽은 사람인 듯 답장을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죽은 자와 나눈 과거를 이상화하면서, 차근차근 유품을 정돈하면서 마음도 함께 정리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곁에 살아 있는 소중한 사람과의 섹스를 통해서, 또는 이사를 가거나 새로운 파트너, 새로운 친구, 이웃을 만나 위로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귀담아 둬야 할 것은 슬픔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꿈도, 천사의 존재도, 죽은 자의 환영도, 죽은 자와의 대화도, 무엇이든 수용할 수 있다. 진위를 확인할 수 없는 윤회, 천국이나 다른 행성의 존재 등 사후세계에 대한 여러 믿음들도 그냥 위로로 삼으면 된다.
한 밤중, 벽에 가만히 세워둔 기타가 ‘퉁’하고 소리를 내는 걸 듣고 죽은 조카의 존재를 느끼며 위로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죽은 자가 산 자에게 메시지를 보내왔다는 것을 남들이 믿지 않아도 상관없다. 내가 위로를 받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만 해도 꿈으로 위로 받은 적이 많았다. 할머니의 장례식 날 장지에서 돌아온 오후, 울다 지쳐 쓰러져 마루바닥에서 깜빡 잠이 들었는데, 할머니가 꿈에 등장했다. 할머니는 아무 말씀 없이 환하게 미소 지으며 나를 품에 꼭 껴안아주셨고 난 바로 잠에서 깨어났다. 그 순간 내 마음 속 슬픔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때 이후 난 할머니의 죽음이 더는 고통스럽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1년 정도 자책감으로 고통스러워하던 어느 날, 난 돌아가신 아버지가 나를 보러 집으로 잠시 돌아온 꿈을 꾸었다. 다른 세상에서 잘 살고 있다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꿈을 깨고도 너무나 생생해서 꼭 현실 같았다. 다른 세상의 존재를 믿지 않는 내게도 그 꿈은 큰 위안이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어느덧 나는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서 빠져 나오고 있었다.
비록 삶 속에서 죽은 자의 환영을 만나거나 천사를 만난 적은 없지만, 내 경우 꿈이 여러 차례 상실감을 극복하고 마음의 평화를 되찾는 데 도움을 준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렇게 각자가 스스로를 위한 위로를 찾는 것은 상처 입은 마음을 치유하는 데 있어 절대 필요한, 꼭 거쳐야 할 단계다.
상실, 삶과 죽음을 알아가는 과정
그런데 우리는 상실의 경험을 놓고, 죽음과 신의 처벌을 연결짓곤 한다. ‘내가 뭘 잘못해서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야 하지?’, ‘무얼 그렇게 잘못했기에 젊은 나이에 죽어야 했을까?’ 등.
고등학교 시절 어머니를 잃은 뒤, 성실하게 성당을 다니면서 봉사활동에 열심이었던 한 여성이 남동생마저 잃게 되었을 때, 더는 성당에 발길도 주지 않기로 했다는 이야기가 기억난다. 바르고 잘 살려고 항상 애써왔는데도 신이 소중한 사람들을 데려가 버렸으니, 억울하고 부당하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마치 잘못을 저질러 큰 벌을 받는 느낌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을 앞에 놓고 신과의 거래도 시도한다. ‘앞으로 더 착하게 살 테니, 이 사람을 살려 달라’면서 말이다.
이번 일본 대지진을 놓고도 ‘천벌’을 입에 올리는 자들도 있었지만, 두 저자가 지적하듯이, 상실은 벌이 아니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상실의 경험들은 우리가 삶과 죽음을 알아가는 과정일 뿐이다. 우리가 아무리 자연재해를 대비한다고 한들 완벽하게 막아낼 수는 없고, 어느 누군가는 또 자연재해에 희생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간의 현실이다.
저자들은 우리에게 현실감각을 잃지 말라고 충고한다. 자연재해로, 사고로, 질병으로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것도, 어린 아이가 죽는 것도 결코 새로운 일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어 온 현실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어떤 식으로든 죽음에 노출되어 있어 우리는 상실의 경험들과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
저자들의 말대로,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살아야 할 이유를 아무도 알지 못한다. 아무리 열심히 운동하고 좋은 식습관을 가졌다고 해도, 선량하고 성실한 삶을 살아왔거나 영적 성장을 도모해 왔다고 한들, 반드시 생명을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무엇도 우리의 생명을 절대적으로 보장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인생 속에서 여러 상실을 겪는다. 그리고 이미 겪은 상실에 대한 고통은 반복해서 삶의 수면으로 드러난다. 저자들은 우리가 이러한 반복적 슬픔을 맛보는 과정에서 자기치유의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낙관한다. 이들이 죽음이 끝이 아니라 다른 삶으로의 이동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굳이 다음 생에 대한 믿음을 갖지 않더라도, 지금껏 인간이 이뤄낸 역사를 통해 볼 때 ‘상실에 맞설 힘이 우리 인간에게 있고’, ‘상실이 성장을 위한 기회’라는 것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쉽지는 않겠지만, 이번 자연 재해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일본인들도, 미얀마인들도 깊은 슬픔을 흐르는 시간과 함께 조금씩 치유해나가리라 믿는다. 이들에게 진심으로 위로와 격려를 보내고 싶다. (이경신) *일다 즐겨찾기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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