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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교육으로 르완다의 미래를 만든다
日서 '르완다의 교육을 생각하는 모임' 이끄는 마리 루이스 카벰가
100만 명으로 추산되는 희생자를 낸 1994년의 르완다 학살 비극에서 살아남아 일본에서 살고 있는 여성이 있다. 마리 루이스 카벰가(Marie Louise Kabemga) 씨가 그 주인공이다.
“사람들이 교육을 받았다면 그 정도의 학살까지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마리 루이스 씨는 2000년 르완다에 학교를 건설했으며, 현재 일본으로 건너와 후쿠시마현에서 살면서 ‘르완다의 교육을 생각하는 모임’을 이끌어 가고 있다.
식민지 지배의 상흔-르완다 내전
르완다는 인구가 천만 명인 언덕이 많은 아름다운 나라다. 아프리카 중부 지역, 적도 바로 아래지만 고지대여서 기후가 온화하다. 농업국으로 사람들은 마을에서 콩이나 감자를 키우며 살아왔다. 마리 루이스 씨는 교육을 받아 양재 선생님이 되었지만, 많은 어린이들은 글자도 못쓰고 학교도 가지 않고 성장한다.
마리 루이스 씨의 아버지는 투트시족(Tutsi), 어머니는 후투족(Hutu)이다. 투트시든 후투든 마을에서는 사이좋게 살아왔다고 한다. 하지만 1926년 벨기에의 식민지가 되면서, 식민지 지배의 분단정책의 결과 ‘코 높이’나 ‘소의 소유 유무’로 종족이 구분되고, 신분증명서에도 기록되었으며, 독립 후에도 부족 간 대립이 생기게 되었다고 그녀는 이야기한다. 내전 때는 특히 직업이 없는 젊은이가 동원되었는데, 이들은 ‘멋진’ 유니폼과 무료 식사를 배급받으며 학살에 가담하게 됐다.
“산처럼 쌓이는 시체들…” 참혹했던 난민생활
▲ 마리 루이스 씨는 요리가 특기다. 국경에서 만들어서 팔았던 도넛은 밀가루와 달걀, 우유로 만든다. 르완다에 온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대접한다고 ©오치아이 유리코
마리 루이스 씨는 1965년 아버지의 부임지였던 콩고에서 태어났고 86년에 양재 교사가 되었다. 1993년 일본국제협력기구(JICA)의 초청으로 일본에서 양재 연수를 받고 이듬해 94년 2월에 르완다로 귀국했다. 그 직후인 4월, 내전이 격화되자 6살부터 2살까지의 세 아이를 데리고 집을 나왔다. 금세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지만, 고향 땅을 밟기까지는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비참한 피난 생활 속에서 마리 루이스 씨는 몇 차례 ‘기적’을 만났다고 회고했다. 첫 번째 기적은, 가까스로 국경까지 도착했을 때 헤어졌던 남편과 들끓는 인파 속에서 재회했던 것이었다. 남편은 아내와 아이들이 이미 죽었을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고.
죽은 줄 알았던 가족과 재회한 기쁨도 잠시. 그 후 난민생활은 참혹했다. 국경을 넘어 도착한 난민캠프에는 텐트는 고사하고, 몸을 누일 수 있는 무엇도 없었다. 우기에 접어들어 비가 내려도 피할 방법이 없어 그저 서 있기만 했다. 난민캠프에서는 몸이 약한 사람부터 죽어갔다.
“생리가 시작되어도 아무 것도 없으니 그저 몸에서 피가 흐를 뿐이었다. 나에게서 나는 냄새를 견디기가 힘들었다.”
이질이 유행하던 난민캠프에서 쓰러져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 트럭으로 운반되어와 큰 구덩이에 산처럼 쌓이는 시체들…. “봐서는 안 될 것을 너무나도 많이 봤습니다.”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그녀의 아이들도 이질에 걸려 한때 위험했지만, 일본의 NGO인 AMD 의사가 준 약으로 건강을 되찾았다.
AMD 의사와의 만남 역시 기적 같은 일이었다. 양재를 배우러 일본에 갔을 때 친해진 일본인 친구에게 팩스를 보내려고 줄서있을 때, AMDA 의사들을 우연히 만났고 통역을 부탁받은 것이다. 이들의 도움으로 연락이 닿은 일본인 친구들이 발 벗고 나서줘 그해 12월 그녀는 아이들, 남편과 함께 유학생으로 일본에 가게 된다.
르완다의 아이들의 꿈과 미래가 자라는 학교
1994년 내전 종료 후 17년. 르완다는 비극을 극복하고 부흥을 거듭하고 있다. 2003년 르완다는 새 헌법을 만들었다. 모든 의사결정기관에 여성이 30% 이상 있어야 한다는 헌법 하에,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고, 2009년에는 여성 국회의원 비율이 무려 56%를 넘어 세계 1위가 되었다. 여성시장도 속속 탄생하고 있다.
여성 국회의원 중에는 내전 때 강간을 당하고 가족이 학살당한 경험을 가진 여성도 있다고 한다. 남편이 학살당한 여성들을 지원하는 조직이 만들어져 이들은 소쿠리를 만들어 팔고 있다. 이들은 남편이 가해자로 형무소에 있는 여성들과도 협력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형도 폐지되었다.
내전 중 많은 여성이 강간당했다. 에이즈 환자에 의해 강간당해 감염되고 발병한 여성도 많다. 르완다에서 현재 강간은 종신형이다. 살아있지만 그 사람을 몇 번이고 죽이는 중대한 죄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마리 루이스 씨는 2000년에 키가리시의 가난한 지역에 학교를 설립했다. 지금은 약 200명의 어린이들이 그 움초뮈자 학원에서 공부한다. 2007년에는 졸업생도 배출했다.
“나 자신 또한 교육의 힘으로 일본어를 할 수 있었던 것이 생명을 구한 셈이니까요.”
소년병이 되기 직전에 보호를 받게 된 거리의 아이들이 이 학교에 다닌다. 장래의 꿈을 갖지 못했던 그들은 학교에 다니게 되면서 의사나 교사, 변호사가 되고 싶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어릴 때 아이를 낳은 소녀들도 보육원에 아이를 맡기고 공부한다. 어린이들은 대립이 아닌 서로를 격려하는 법을 배워 나간다. 르완다의 새로운 ‘미래’가 자라고 있는 것이다.
“어디서 살고 싶은지 자주 질문을 받는데, 당연히 르완다다. 하지만 나에게는 르완다의 학교를 지탱해야 하는 사명이 있다. 그것을 위해 나는 일본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아카이시 치에코)
※ 이 기사는 <일다>와 제휴 관계를 맺고 있는 일본의 여성언론 <페민>에 실린 2011년 1월 25일자 기사입니다. 고주영님이 번역하였습니다. * 일다 즐겨찾기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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