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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이경신의 도서관 나들이(37) 늙음에 대하여 ② 
  
도대체 노인은 누구인가? 우리는 어떤 사람을 노인이라고 부르는가? 몇 살부터 노인일까? 2,30대를 넘기기 어려웠던 시절에는 40대도 노년으로 여겨졌을지 모르겠다. 어떤 책에서는 50대를 ‘초로’라 부른다. 환갑잔치와 더불어 노인의 삶이 시작되는 것일까? 요즘은 환갑을 건너뛰고 칠순잔치를 한다고도 하니, 70대부터 노인으로 보는가?
 
65세 이상이면, 노인?
 

비록 백발, 주름, 굽은 등과 같은 외모를 기준삼아 흔히들 노인을 구분한다 하더라도, 우리 사회가 정한 노년의 나이 기준들이 분명 존재한다. 환갑, 칠순 잔치와 같은 문화적 기준뿐만 아니라 직업에 따른 은퇴 시기나 노령연금을 수령할 수 있는 나이와 같은 사회경제적 기준이 그것이다. 아무리 외모를 젊게 가꾸고 건강을 유지해도 소용없다. 사회가 정한 나이가 되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노인으로 분류된다.
 
선사시대 사람들 대부분이 30세를 넘기지 못했고, 3세기의 로마인들만 해도 60세를 넘긴 이들이 소수에 불과했으며, 산업혁명 전까지 65세 이상의 인구가 2,3%를 넘지 못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렇다면, 시대와 사회에 따라 기대수명이 다를 테고, 노인의 나이기준도 당연히 차이가 날 것이다. ‘65세부터’ 노인이라는 유엔의 기준은 지극히 현시대적 산물임을 금방 알 수 있다. 평균수명이 그 어느 때보다 늘어난 오늘날에는 사회적으로 노인이라고 인정받으려면 과거 노인들에 비해 더 나이를 먹어야 하는 셈이다.
 
유엔은 만 65세를 노령인구의 기준으로 잡고, 고령화사회(ageing society), 고령사회(aged society), 초고령사회(post-aged society)를 정의한다. 65세 이상인 인구가 전체 인구의 7%이상이면 ‘고령화 사회’, 14% 이상이면 ‘고령사회’, 20%를 넘으면 ‘초고령사회’라고 말한다.
 
이런 식이라면, 우리사회는 벌써 10여 년 전에 ‘고령화사회’에 진입했고, 전남, 경남, 충남, 전북 지역은 수 년 전에 ‘고령사회’로 들어섰다. 현재 우리나라는 65세 이상의 인구가 전체 인구의 10%를 넘어선 상태이다. 2026년이 되면 ‘초고령사회’로 진입할 것으로 예상한다. 만약 노령인구의 기준을 5,60세로 낮춰 잡는다면, 어떨까? 오래전에 우리 사회는 노인들로 붐비는 초고령사회라고 판정받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비록 노인의 기준이 65세라고 하지만, 우리 사회의 노인 인구는 빠른 속도로 증가하는 추세다. 이대로라면 노인의 사회적 기준이 70세, 아니 그 이상의 나이로 밀려날 수도 있을 듯하다.
 
보살핌이 필요한 노인
 
▲ 피터 G. 피터슨의 책 <노인들의 사회, 그 불안한 미래> (에코 리브르, 2002)      

 
이번 여행에서 만난 65세 이상인 친척 어른들 가운데 병이 없는 분은 없었지만, 모두 신체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자식들에게 의존하지 않는, 자립적인 생활을 하고 계셨다. 게다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 노년의 생활이 상당히 안정되어 보였다. 누구나 그렇지만, 지금 당장 경제적인 어려움도 없고, 지적, 신체적으로 자립이 가능하다고 해도, 끝까지 아무에게도 기대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노인들의 사회, 그 불안한 미래(에코 리브르, 2002)>의 저자인 피터 G. 피터슨은 후기 노인의 증가가 초고령사회의 문제라고 지적한다. 65세 이상의 노인들을 다시 삼등분해서, 65세 이상에서 74세 이하인 전기 노인, 75세 이상에서 84세 이하인 중기 노인, 85세 이상인 후기 노인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전기 노인에서 후기 노인으로 갈수록, 일상생활 유지를 위한 도움이 필요할 가능성은 점점 더 높아진다.
 
몇 살 이상부터 보살핌이 필요한 나이라고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나이가 들면 적어도 죽기 전 일정기간 가족이 아니더라도 타인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보살핌을 받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경제적 뒷받침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 나이가 몇이건, 다른 사람에게 의존해야만 생활이 가능한 비자립적 노인은 가족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으로 충분히 부담이 될 수 있다. 게다가 오늘날처럼 의존적 노년이 의학발달로 인해 연장되고 있는 상황이라면, 도대체 누가 쇠약한 노인을 돌보고, 그 비용을 감당해야 할 것인가?
 
역사를 들여다보면, 그리스, 로마 시대나 중세 시대에도 자식 없는, 가족 없는 노인은 거리로 내몰려 구걸하며 살았다. 노인을 보살피는 것은 가족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설사 가족이 있다하더라도 형편이 어려운, 늙은 농부는 죽기 직전까지 힘든 육체노동을 계속해야 했다. 그러나 부유한 늙은 상인의 노년은 달랐다. 종교단체에 돈을 기부해 은둔한 채 내세의 삶을 준비하며 편안하고 경건한 여생을 보낼 수 있었다.
 
이처럼 돌봐줄 가족이 있느냐, 경제적 여유가 있느냐에 따라 생의 마지막 순간의 편안함과 비참함이 결정되기 마련이었다.
 
오늘날도 노인들의 처지가 과거와 그리 다르지 않다. 하지만, 현대의 사회복지적 관점, 인권의식이 노인 부양에 차이를 가져온 것이 사실이다. 즉, 노인 돌보기가 전적으로 가족의 책임만은 아니라는 생각, 또 자식이나 가족이 없더라도, 또 가난하더라도 노인을 거리로 내몰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2010년 통계청의 사회조사에 따르면, 노후생계는 가족, 정부, 국가가 공동 책임져야 한다는 견해가 무려 47.4%에 이르고, 가족이 책임져야 한다는 견해는 36%에 그쳤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가족이 노인을 부양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는데, 최근 10여년 사이 사회여론은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그런데 평균수명이 늘어나 노인 인구가 증가하는 추세인데, 노인을 사회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국가재정을 동원하는 것은 국가재정에 부담이 될 것이 분명하다.
 
젊은 세대와 노인 세대의 갈등
 

노인이 늘어나는 데 반해 출산율 감소로 젊은이는 줄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당연히 경제활동인구인 젊은 세대가 감당해야 할 노인 부양의 부담은 늘어날 것이다. 노인을 돌봄에 있어, 효 사상을 내세워 자식의 의무를 강조하는 가족 책임을 거론하건, 경제활동인구의 조세에 의존하는 사회적 보호를 주장하건, 모두 젊은이에겐 부담이다. 이대로라면 가까운 미래에는 노인 세대와 젊은 세대 간의 대립과 반목이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유럽국가에서는 이미 연금으로 인한 세대 간 갈등이 밖으로 표출된 상태다.
 
이러한 세대 간 갈등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세대 간의 갈등은 계속적으로 되풀이되어 왔다.
 
노년을 경멸하고 젊음을 예찬했던 고대 그리스 때는 자식들이 부모를 공경하기는커녕, 부모 재산을 탕진하거나 제 부모를 미쳤다고 고발하기도 하고, 심지어 유기, 살인하는 자식들까지 생겨나 부모공경을 법으로 제정해야 할 정도였다는 기록이 있다.
 
심지어 노인들이 권위, 권력, 부를 지니고 있고 노년이 이상화되었을 때에도 젊은 세대는 노인들을 질투하고 증오했다. 가부장의 권위가 대단했던 로마시대가 바로 그 대표적인 사례다. 그런데 로마시대의 세대 간의 갈등은 노인의 수명이 늘어나고 흑사병으로 젊은이의 수가 감소하면서 권력과 부가 노인에게 집중되는 중세 말에 와서 다시 재현된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그 갈등의 역사의 또 다른 판을 다시 쓰려는 중이다.
 
초고령사회의 해법은 어디에?
 
▲ 2009년 말 방영된 공익광고협의회의 출산장려 캠페인 CF 중.

 
그런데 초고령사회에 대한 대비책들 가운데 출산장려정책을 살펴보자. 무엇보다도 젊은 세대에 의존해 노인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니, 세대 간 갈등 소지가 다분해 보인다. 더불어, 출산율 저하의 원인을 여성의 활발한 경제활동, 늦은 결혼, 피임과 낙태 등에 있다고 분석하면서 여성의 사회경제활동에 제동을 걸까 염려된다.
 
비록 여성이 사회경제 활동과 출산을 병행할 수 있는 바람직한 사회 환경을 조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해도, 인구를 증가시켜 노인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발상 자체는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 인구 증가가 자연환경에 미칠 악영향을 고려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 지금껏 지구 생태계를 훼손하고 파괴해 온 것만 해도 이미 지나치다. 지구는 지금 존재하는 인간들만으로도 힘이 부친다는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노인들의 사회> 저자가 제시하는, 노인의 경제안정을 도모하면서도 정부의 부담을 줄여주는 방안은 이렇다. 개개인이 스스로 젊을 때부터 미리미리 저축해서 노년을 대비하고, 나이가 들어서도 될 수록이면 일을 놓지 말자는 것이다. 그리고 노년을 위한 저축은 개인에게 일임하지 말고, 모든 사람들이 의무 가입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즉, 각자가 개인계좌를 보유하는 적립식 민간연금형태로 꾸리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주장이다.
 
결국 개개인이 자신의 노후를 책임짐으로써 가족과 국가의 경제적 부담을 줄여줄 뿐만 아니라, 세대 간 갈등, 젊은 세대의 부담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 같은 개인에 기초한 경제적 해결책이 현실적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노인 문제를 모두 개인에게 맡겨버릴 수는 없다. 저소득 근로자층의 최저 적정연금만 해도 개인적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정녕 노인 문제를 경제적 측면만 주목한다고 해서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을까? 왜 이토록 노인이 많아졌으며, 왜 노인을 돌보는 것이 부담스러운지 깊이 숙고해 본다면, 이 문제는 노년에 대한 인식과 밀접히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모든 사회는 기본적으로 생명력 넘치는 젊음을 예찬하고 죽음을 향하는 노년을 불편해한다고 역사학자가 결론짓듯, 우리 사회도 예외는 아니다. 다들 젊음을 가장하고 나이를 감추느라 분주하다. 정신적 노년에 대한 예찬도 찾아보기 어렵다. 과거 어느 때보다 늙음을 경시하는 분위기가 팽배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노인의 수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을 뿐만 아니라, 줄어들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늙음을 회피하는 태도가 노인을 짐, 폐기물 취급하면서도 무조건적인 수명 연장에 열광하도록 만들어 노인을 대량으로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늙고 죽는 과정이 삶을 성숙케 하는 배움의 과정이며, 노인을 돌보는 일이 젊은이에게는 자신이 장차 맞을 미래를 준비하고 자기성장의 소중한 기회가 된다는 자각이 무엇보다도 절실하다. 초고령사회의 문제는 이 자각에서 출발할 때 진정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피터슨이 지적하듯이, ‘노인들의 사회’는 그 어떤 사회보다 평화와 비폭력을 지지하고, 성숙한 죽음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사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해결의 씨앗은 변화하는 사회 속에 이미 숨겨져 있으며, 우리에게는 그 씨앗을 어떻게 키울 것인지를 골똘히 고민하는 일이 남아 있다. * 일다 즐겨찾기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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