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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소수자 집단의 ‘피해의식’ 어떻게 볼 것인가
조이여울의 記錄 (2) 진단은 낙인이 되고, 원인은 답이 된다 

 
차별과 폭력, 사회적 소외라는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언론활동을 하다 보면 종종 ‘피해의식’이라는 용어를 접하게 되거나 떠올리게 된다.
 
개인차를 감안하고, 사회적 소외와 차별을 겪어 온 사람들이 그 결과로 피해의식을 갖게 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의 탓도 아니다.
 
문제는 피해의식이 사람들 간의 소통을 방해하고 상황을 쉽게 왜곡시킨다는 점이다. 어떤 사안에 대해 지나치게 과민하게 반응하여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거나, 자신과 처지가 다른 이들에 대해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 등을 예로 들어보자. 이런 경우 피해의식이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과 해당 주제에 관해 대화하는 건 불편한 일이 되고, 아예 ‘만남’ 자체를 꺼리게 되는 상황으로까지 갈 수도 있다.
 
때로 피해의식 혹은 그로 인한 배타성이 ‘집단적인 성격’을 띠고 나타나기도 한다. 내가 보아온 바로는, 소수자 집단의 배타적인 성격이 그렇지 않아도 사회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인 이들에게 또 하나의 낙인이 되어 차별을 지탱해주는데 한 몫을 하고 있다.
 
들여다보기 전엔 이해할 수 없는
 
작년 10월 재일조선인 선진유씨를 인터뷰하면서,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기회를 가졌다. (“재일동포, 당신이 이야기할 시간입니다” <일다> 2010년 10월 20일) 도쿄로 떠나기 전 나는, 재일조선인 사회가 너무 “폐쇄적”이라 일본사회와 소통하며 상황을 개선해나갈 통로를 찾기 어렵다는 얘기를 들은 터였다.
 
재일조선인 사회에 대한 나의 관심은 몇 년 전 내 또래인 림혜영, 조경희씨와 인연을 맺게 되면서 커졌는데, 일본사회에서 재일조선인들이 얼마나 형편없는 대우를 받는지 듣고 깜짝 놀랐다. 그 정도일 줄이야. 천민집단 중에서도 천한 취급을 받아왔다면 설명이 될까?
 
한 번은 혜영씨가 지나는 말로 “재일조선인들이 일본사람들 보라고 일부러 집을 깨끗하게 해놓는 경향이 있대요” 했다. 일본사회가 재일조선인들을 바라보는 시선-조선 사람들은 지저분하다-을 반영한 얘기였다. 어디 그것뿐이겠는가.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 재일조선인의 삶은 사회의 편견과 낙인의 잣대에서 결코 자유로워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코-카운셀러인 32세의 여성 선진유씨를 만나러 갔을 때, 나는 또 깜박하고 말았다. 일본에서 재일조선인의 삶이 어떠한지를 말이다. 나보다 좀 더 어린 세대라고 생각해서, 그새 일본사회도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었는지 모르겠다. 또는 마음수련을 해온 그녀의 맑은 표정을 보며, 공포에 시달렸던 지난 시절의 그림자를 읽어내기 어려웠던 탓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어김없었다. 정리되지 않은 가해-피해의 역사, 전후에도 계속된 조선인학살, 규명되지 않은 폭력, 뿌리 깊은 인종차별, 국가로부터 보호받지 못한다는 불안감. 개인이 특유의 성격이나 의지로 극복할 수 있는 환경은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진유씨는 어릴 적부터 자주 망상에 시달렸고 성인이 되어서도 조울증, 과민성대장증후군 등의 질환을 앓았다고 했다.
 
선진유씨의 고통스런 경험은 ‘개인의 문제’에 기인한 것이 아니었기에 그 해결책도 ‘개인적인 수준’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이었지만, 자신을 둘러싼 사회는 문제 해결은커녕 이야기할 수 있는 여지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그 경험은 고스란히 개인의 몫이 되어 정신과 질환의 목록으로 나열될 뿐이었다.
 
진유씨는 학창시절 친구가 칼로 자신을 찌르는 꿈을 종종 꾸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런 공포에 대해 대화할 친구는 한 명도 없었다고 했다. 대학 사물놀이 동아리활동을 하며 무대에 올랐을 때, 관중 중에 누가 “너희는 조선인이냐?”라고 묻자 공포감에 그만 몸이 굳어버린 경험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다른 멤버들은 자기 태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고 했다.
 
일본인 친구들의 입장에서, 진유씨의 태도는 ‘피해의식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것으로 보이지 않았을까? 진유씨의 악몽에 대해 만약 그 친구가 알았더라면, 내가 왜 너를 죽이려 하겠냐며 불쾌감에 말도 섞기 싫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무대에 오른 사물놀이패 멤버들도 대체 조선인이냐고 묻는 게 뭐가 대수라고 공연을 망치는지 답답해했을 것이다.
 
피해의식이란 이렇게 악순환 된다. 자신의 감정과 태도가 이해를 받지 못하니 더더욱 주위 사람들에 대해 신뢰를 잃게 되고, 그럴수록 사회와의 벽은 두터워지는 것이다.
 
‘비주류’라는 꼬리표를 단 사람들
 
한 사회에서 통용되는 개념으로 ‘결핍된’ ‘열등한’ 위치에 놓인 사람들의 경우에, 개인은 쉽게 ‘집단’으로 평가를 받는다. ‘비주류’라는 정체성이 꼬리표가 되어, 더 이상 개인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이 꼬리표는 개인적으론 긍정적인 평가를 하려 노력한다 해도,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불명예스러운 이름이므로 개인의 일상에서도 크고 작은 갈등상황을 빚어낸다.
 
“미혼모”라고 불리는 집단, 혹은 “아줌마”라고 불리는 집단, 외국인노동자 집단, 가난한 나라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 동성애자 집단, 고아로 자란 사람들, 범죄자의 가족들, 특정한 장애를 가진 사람들, 고교 졸업장이 없는 사람들, 천대받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 소수 종교를 믿는 사람들…
 
그 중 어떤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결핍되어 있다고 평가되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꼬리표 떼기에 열중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거나, ‘나는 내가 속한 집단의 사람들과는 달라’ 이런 식으로 평가 받으려 노력하면서 말이다. 그 결과는 집단을 향한 사회적 차별에 동조하는 꼴이 되어버린다.
 
이를 테면 상당수 재일조선인들이 일본이름을 쓰면서, 조선인이란 걸 들킬까 전전긍긍하며 일본사람인 척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 그러하다. 도쿄 신주쿠에 있는 한국-조선도서관 <문화센터 아리랑>의 부이사장인 송부자씨(72세, 여성)는 인터뷰에서, 자녀들이 괴롭힘 당하지 않게 하려고 매일 기모노를 입고 모피도 두른 채 학부모위원회 활동을 했었다고 회고했다. (“역사를 바로 가르칠 때 정의가 생겨난다” <일다> 2010년 7월 27일 박희정 기자)
 
또 어떤 사람들은 그와 반대로, 자기 정체성의 꼬리표를 지탱하느라 힘겹다. 화살을 안으로 돌려 ‘더 뛰어난 사람이 되어야 해’, 혹은 ‘우린 이래서 안돼’, ‘저 사람은 우리 모두에게 망신이야’ 하고 자기 자신과 내부집단에 대해 검열과 가혹한 평가를 내리기를 마다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다수집단의 사람들은 고려조차 해보지 않았을 규정을 무수히 만들어, ‘평균에 못 미치는 존재’에게 사회가 부과하는 무게를 버텨내려 하는 것이다.
 
특히 사회적 소외의 문제가 민족성이나 종교성과 관련이 있을 경우엔, 해당 집단의 여성들에게 부과되는 짐이 훨씬 커진다. 이 시대에 왜, 그것도 일본사회에서 공격 대상이 될 게 뻔한 상황에서 조선학교 여학생들은 ‘치마저고리’를 입고 다녀야 하는가. 소수민족들은 여자들이 관습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지 더 엄격하게 감시한다. 소수집단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여성들의 몸은 쉽게 통제 대상이 된다. 더 민족적이고 더 종교적이어야 한다.
 
흑인남성들은 흑인여성이 백인과 연애하거나 결혼하는 것에 대해 공공연히 분개한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연애에 왈가왈부할 일이 뭐 있으며 자존심 상할 이유가 무엇인가? (아이러니하게도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밝힌 바, 실상은 흑인남성이 백인여성과 결혼하는 경우가 2배가량 높다고 한다.) 이런 시선이 있는 한, 흑인여성들은 알게 모르게 자신의 결정에 대해 검열을 하게 마련이다. 우리 집단에 대해 ‘배신’ 행위를 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그런데 왜 개인이 이런 터무니없는 짐을 이고지고 가야 걸까. 왜 하루하루를 평화가 아닌 분쟁의 현장으로 삼으면서 살아야 하는 걸까.
 
다가가기 한 뼘이 아쉽다
 
나는 소수자 집단의 피해의식이나 폐쇄성, 혹은 배타성이 주제로 등장할 때마다, 그리고 내 마음 속에서 이 말이 떠오를 때에도 ‘한 뼘이 아쉽다’는 생각을 해본다. 한 번 더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과 같이, 다가가는 한 뼘의 거리 말이다.
 
때로 어떤 이의 피해의식이 특정한 개인을 향한 원망으로 표출되어 보일지라도, 사실 그 원인은 사회적 기반과 지지의 문제에서 출발한다. 그러니 우리가 개인으로서 그 사람에게 잘못한 일은 없다 하더라도, 사회구성원인 개인으로서는 ‘해야 할 역할이 있다’는 점에서 책임을 느낄 수는 있다는 이야기다.
 
만약 일본사회가 재일조선인 집단에 대해 “피해의식”에 절어 “폐쇄적(혹은 공격적)”이라고 평하고 있다면, 그러한 진단에 앞서 원인인 무엇인지를 확인해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원인을 찾아내 교정할 생각은 하지 않고 간편하게 진단만 내린다면, 그것은 낙인의 또 다른 양상일 뿐이다.
 
소수자 집단의 폐쇄성과 피해의식의 정도가 바로 그 집단이 속한 ‘사회가 그들을 어떻게 대우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척도라는 것을 간과해선 안 된다. 일본사회가 소수민족에 대해 너그럽고 관대한 문화였다면, 또 역사를 지배가 아닌 평화를 바라는 관점에서 교육했더라면 재일조선인 집단의 폐쇄적인 성격은 결코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선진유씨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정체성과 경험에 대해 “말할 기회”를 가져야 하고, 그것은 “절대적 안심감”을 느낄 수 있는 공간에서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녀의 인터뷰 기사 제목에 “당신이 이야기할 시간입니다” 라는 문구가 들어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일본사회와 한국사회, ‘우리’가 들어야 할 시간이다. 재일조선인들의 권리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반일감정을 드러내는 것 외에, 우리와 역사를 공유하고 있는 재일조선인의 현실에 대해 무엇을 얼마나 알고 이해하고 있었는가. 또 우리 사회의 소수자 집단에 대해서는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간혹 피해의식이나 배타성과 같은 소수자 집단 내부의 부정적인 일면을 발견하게 된다면, ‘이래서 안 돼, 저래서 안 돼’ 하며 상대적 우월감을 확인하는데 사용하는 대신, 그 원인이 되는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를 들여다보는 자세가 절실히 요청된다. 그 방법은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는 데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말이지, 한 번 듣게 되면 두 번 듣기는 훨씬 쉽다. 배경지식이 생겨 내 마음에 상대방을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되었으니까. (조이여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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