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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혜의 만화 읽기>
리정애 씨를 올바르게 지칭하기 위해서는 여러 겹의 언어가 필요하다. 그녀는 재일동포 3세다. 그냥 재일동포가 아니다. ‘조선’ 국적을 지키려 노력하는 여성이다. 여기에서 조선 국적이란 남북분단 이전의 조선으로 역사 속의 나라, 기호로서 조선이다. 그러니까 현행 국제법상 리정애 씨를 지칭하자면 그녀는 무국적자이며 난민인 셈이다.
분단 현실을 인정하고 남쪽과 북쪽 두 지역 중 하나를 선택해 ‘귀환’하면 국적을 취득할 수도 있다. 실제 리정애 씨는 일본과 한국, 북한을 오갈 때마다 국적 선택을 강요당한다고 한다. 그러나 리정애 씨는 두 나라 중 한 나라를 선택하는 것을, 선택하지 않기로 했다. 잃어버린 조선 국적을 지켜내기로 ‘선택’한 것이다.
▲<재일동포 리정애의 서울체류기>(보리, 2010)
그 이면에는 국제적 권력관계에 의해 강제로 분단된 한반도 상황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있다. 조선 국적 유지는 재일동포 3세로서 살아온 그녀의 존재를, 통일의 당위성을 전 지구에 표출하는 ‘기표’가 된다.
<민족21>이라는 매체에 단편단편 건네졌던 그녀의 이야기가 한 권의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재일동포 리정애의 서울체류기』(리정애 이야기, 임소희 만화, 보리, 2010)다. 때마침 그녀가 남한 남성과 결혼했다는 소식이 인터넷을 통해 전해질 즈음이었다. 힘겨루기 끝에 한국 정부가 그들의 혼인신고를 받아들였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의 국적은 결국 공란으로 남겼다고도 했다. 앞으로 이들 부부가 국경을 넘나들며 어떻게 결혼생활을 이어나갈지 우려된다는 목소리도 들린다. 이 와중에 만화로 그려진 리정애 씨의 사연 많은 이야기가 한국 대중들에게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주목된다.
생존어와 조국어 사이
만화는 리정애 씨가 서울의 K대학 국제어학원에서 겪은 일화부터 시작한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한껏 떨어뜨리고 애써 눈물을 참고 있는 정애 씨. “정애 씨는 ‘북한’ 억양부터 고쳐야겠네. 발음이 너무 세잖아요.”
‘고치라고?’ 어학원 선생님은 정애 씨의 어투를 ‘북한’억양이라 규정한다. 그런데 정애 씨의 어투에는 재일동포들이 겪은 식민지 역사가 배어 있다. 남한의 어학당 선생님은 그런 정애 씨의 어투를 아무런 이해와 배려 없이 무심하게 ‘고치라’고 말하는 것이다. 더구나 어학당 선생님은 일본과 중국 사람을 구분해 인정하면서도 ‘제 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입니다. 저는 어느 쪽에서 발음해야합니까?’라는 리정애 씨의 질문에 ‘어머~ 그건 할 수 없잖아요.’라며 몰이해적 태도를 보인다. 정애 씨는 이런 몰이해가 마냥 서럽다. 상처가 된다. 이런 상처는 서울에 체류하는 동안 되풀이 된다. 하숙집 아줌마로부터 ‘창피하니까 그렇게 서툰 한국말로 어디 가서 한국 사람이라고 하지 마라!’라는 소리를 듣고 길고 붉은 화살이 가슴에 꽂히는 것 같은 아픔을 느끼기도 했다.
▲ '북한' 억양을 고칠 것을 요구하는 국제어학원 선생님.
리정애 씨는 이야기의 마지막 장 <오사카 체류기>에서 강한 어조로 말한다. “제발! 재일동포에게 그렇게 쉽게 ‘우리말 서툴다’고 하지 마세요. 우리의 서툰 우리말 한 마디에 어떤 역사가 노력이 있는지, 동포라면 알아주었으면 좋겠어요.”라고.
재일동포 3세 리정애 씨의 ‘서툰 우리말’은 그녀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내용물이다. 그녀는 서툰 우리말을 사용하면서 일본을 부정하고, 동시에 생존어가 된 일본어를 모어로 사용해야 하는 양가적 상황에 놓여 있다. 그녀는 고등학교 시절까지 일본 이름을 공식적으로 사용해야 했던 과거를 억울해 하고 후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가족들과 친척들은 그녀의 일본 이름을 부르고 있다. 이런 상황을 묵인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정애 씨는 ‘나는 평생 두 가지 이름으로 살아가야 하는가.’라고 시시 때때로 고뇌한다.
한편으로 그녀의 ‘서툰 우리말’은 분단 상황에 의해 이질화된 북한어와 남한어, 그 틈새에 끼여 있다. 재일동포 3세대들이 구사하는 우리말은 재일동포 1세대나 2세대를 거쳐 오면서 소멸 위기에 처했다. 가까스로 전수받은 우리말은 일본 억양과 과거의 조선 억양이 혼종된 실정이다. 그런 가운데 일본 땅에서 조선인라는 이유만으로 온갖 차별과 불이익을 당하면서도 우리말을 사용하고 지키는 것은 그들의 민족성을 유지하고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 된다. 리정애 씨가 스스로를 ‘참된 조선인’이라고 인정한 것은 조대에 와서 우리말을 배우고 익힌 뒤이다.
이렇게 이들의 ‘서툰 우리말’에는 재일동포 공동체의 역사와 문화, 정서가 담겨 있다. 이들이 쓰는 독특한 우리말 어투는 북한어나 남한어 어느 한쪽에 편입되어 고쳐져야 할 잘못된 언어나 유령 언어(死語)가 아니라 동시대에 실존하고 있는 이종(異種) 언어이다.
리정애 씨는 한국의 임시여권에 ‘이정애’라고 찍힌 것을 보고 ‘제 이름 대신 낯선 이름이 적혀 있었어요’라고 토로한다. 성씨에 쓰이는 ‘ㄹ’이 한글맞춤법에 따라 두음법칙 적용을 받아 ‘이’가 된 것이다. 일본에서 어렵게 되찾은 그녀의 이름 ‘리정애’는 한국 사회에서 아직 공식적으로 온전히 호명되지 못한다.
식민지적 일상을 비추는 간절한 통일염원
“통일이 되면··· 내 이름도 제대로 불리우고
통일이 되면 고향땅에 살 수도 있고
통일이 되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도 하고···
통일이 되면 일본놈들이 제멋대로 만들어낸 국적이 아닌 내 조국을 당당히 찾을 수 있을까요?”
만화는 리정애 씨가 일본-한국-북한을 넘나들며 곳곳에서 ‘통일’을 위해 활약한 활동들을 담는다. 동시에 그녀가 얼마나 통일을 간절히 바라는지 보여준다. 2005년 8.15 축전 참가를 위해 처음 한국 땅을 밟은 기억. 이후로 지속된 한국과 북한 여행. 그 과정에서 겪은 까다로운 출입국 절차. 또 그 과정에 만난 따뜻한 한국 사람들(장기수 아저씨 등). 민주노동당과 재일동포 사회와의 교류. 통일을 노래하고 재일동포를 위해 정기적으로 해외 공연을 펼치는 노래패 ‘우리나라’와 ‘큰들’과의 만남.
▲ 재일조선인에게 식민지 현실은 여전히 일상을 뒤덮고 있다.
리정애 씨에게 통일은 꿈이 아닌 현실이다. 먼 미래의 의제가 아니라 당면 과제이다. 통일이 되면 그녀의 이름이 온전히 불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다. 통일이 되면 고향땅(남한)에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 그래서 그녀는 일상의 곳곳에서 ‘통일’을 염원한다. 남한과 북한을 분주히 오가며 남과 북을 잇는데 어떤 역할을 하길 바란다. 그러나 그녀의 이런 행보는 현실 정치 상황에 따라 분절된다.
정애 씨는 최근에 한국의 출입국 허가를 받는 것이 어려워졌다고 호소한다. 또 국가보안법 때문에 ‘간첩’으로 오해를 받을까 스스로 인터뷰 수위를 조절하고 만화 내용을 검열했다고도 털어놓는다. 그러나 정치상황이 악화되면 악화될수록, 남한도 북한도 자유롭게 횡단하지 못하면 못할수록, 정애 씨는 통일의 당위성을 역설한다.
그녀에 따르면, 일본에 남겨진 120만 재일동포들은 아직도 식민지 현실에 놓여있다. 식민지 시대 강제징용의 장소이자 현재 한인이 거주하고 있는 우토로를 둘러싼 피해보상과 권리 분쟁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고, 우리학교를 지키려는 재일동포와 이를 인정하지 않는 일본 정부 간의 싸움도 현재진행형이다. 그 와중에 조국의 분단 현실이 이들 사회에도 투영되어 총련과 민단, 재일조선인, 재일한국인 등으로 나뉘어 재일동포 사회가 한데로 뭉치지 못하고 있다. 자신들을 지배하고 있는 식민지적 일상에서 벗어나려면 모두가 똘똘 뭉쳐야 하는데 말이다. 리정애 씨가 통일을 염원하는 밑바탕에서는 바로 재일동포 권리문제가 놓여 있다.
만화의 맨 뒷장에서 리정애씨는 이렇게 자문자답한다. ‘왜, 나는, 우리 땅에서 태어나지 못했을까’ ‘나는, 사명을 가지고 재일조선인으로 태어난 것이 아닐까.’ 리정애 씨에게 통일로 가는 길은 재일조선인을, 국제 사회에서 부정당하고 거부당하는 난민이나 무국적자 신세에서 통일의 매개체, 씨앗이 되는 긍정적 존재로 격상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다.
결혼이라는 꿈, 그리고 현실
▲ 조선적 재일조선인들은 한국 입국시 여행증명서를 발급 받아 '일시적' 체류만이 가능하다. 최근 들어 한국정부가 조선적 재일조선인에 대해 입국허가를 내주지 않는 일이 빈번해졌다.
재일동포들은 어려서부터 꿈을 포기하는 법을 배워 왔다고 정애 씨는 밝힌다. 노력하면 원하는 직업을 가질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결혼도 생각하는 지극히 상식적인 일들이 재일동포 사회에서는 ‘부러운’ 일이 된다고 했다. 특히 정애 씨에게 결혼은 불가능한 꿈이었다. 조선 국적을 끝까지 유지할 생각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런 그녀가 남쪽의 한 남자 김익 씨와 사랑에 빠졌다. 둘은 국적 때문에 싸우기도 했지만 결국 김익 씨가 그녀의 입장을 이해해 주었다. 그런데 정애 씨의 한국 건너오기는 통일정세와 맞물릴 수밖에 없다. 통일정세가 안 좋아지면 정애 씨가 남쪽에 오는 것이 점점 더 어렵게 된다. 만화는 상견례를 하러오는 정애 씨가 국적을 바꾸라고 종용하는 한국 영사관 직원 앞에서 국적을 안 바꾸겠다고 호통을 치고, 이어 통일에 대한 열망을 드러내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그녀의 이야기는 재일조선인으로서 살 것을 다짐하고 여행의 권리와 통일로 귀결된다. 이미 없어진 고향을 더듬고 다시 꿈을 꾼다. 결혼은 한쪽으로 포기했던 꿈을 향한 일보 전진이다.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지만, 당사자도 독자도 모두 예감한다. 그녀의 결혼생활이 험난한 여정이 될 것임을 말이다.
아무도 들려주지 않았던 재일동포들의 역사와 현재가 딱딱하지 않은 그림 위에 포개지면서 씨줄과 날줄처럼 이성과 감성을 동시에 움직이게 한다. 명랑체로 그려진 주인공 리정애 씨는 만화에서 자신이 살아온, 혹은 현재 겪고 있는 이야기를 쏟아낸 뒤 웃거나 혹은 분노한다. 깊게 슬퍼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 쌓였던 감정을 가감 없이 표출하면서, 다시 자기긍정의 힘을 얻는 듯하다. 각 장의 만화 뒤편에 배치된 리정애 씨의 실제 목소리는 만화보다 더 강한 어조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한편으로 그녀의 이야기를 읽는 동안 독자로서 나는 내내 불편했다. 분단 3세대이자 남한의 소시민인 나에게 ‘통일’은 무엇이란 말인가. 재일조선인의 역사에 대해 어떤 것을 알고 있었던가. 혹시 나도 모르게 이들에게 상처를 줬던 일은 없을까. 조국은 이미 그 옛날의 조국이 아니다. 고향(남한)도 이미 그 옛날의 고향이 아니다. 그 사이에서 그녀는 상처(언어적, 정치적)를 입고 다시 일어섰다. 그녀는 아주 치열하게 생애를 걸고 분투하고 있다. 한반도 분단 현실을 자꾸 망각하는 우리는 그녀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 사이사이에 자꾸만 나를, 우리 사회를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만화는 그녀의 자화상을 통해 우리사회를 되비추는 반사경이 된다. 그녀와 동세대로서 남쪽에 살고 있는 분단 3세대에게 한반도 상황을 일깨우는 각성제가 된다. (김은혜) 일다 www.ildaro.com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언론진흥기금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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