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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땅의 여자> 리뷰] 포기하지 않는 세여자의 한결같은 걸음 
                                                                                                     <여성주의 저널 일다> 안미선 
 
 
<땅의 여자>는 우리 삶의 변두리로 밀려난 ‘땅’을 다루고, 소수자인 ‘여성 농민’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 영화가 꼭 보고 싶었던 이유가 있다. 팍팍한 도시에 살면서 귀농에 곁눈질하게 되는 데다, ‘땅의 여자’는 어떻게 살까 궁금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는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농촌이라는 한 주제를 파고든 권우정 감독의 역량이 한껏 발휘된 작품이다. 여자가, 여자의 이야기를 같은 땅에 함께 살고 농사지으며 기록한 소통과 연대의 영화다.
 
폐쇄적 지역공동체에 뿌리 내린 ‘땅의 여자’들
 
‘순도 100% 유기농 다큐’라는 문구가 붙은 영화인데, 이 영화는 유기농이나 생태적 삶에 대해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소희주, 변은주, 강선희. 영화는 대학 동창인 이들이 농민운동을 하기로 마음먹고 경남 지역의 농촌에 와서 결혼하고 농사짓고 활동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여자들은 땅을 선택한 여자들이고, 낯선 땅에서 자신의 몸을 새로 만들고 함께 살아가려고 고군분투하는 이들이다.
 
보수적인 농촌에서 여성의 삶을 산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스스로 선택한 삶’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몸에 익지 않은 삽질을 정신없이 하다가 밭고랑에 쓰러져 잠든 변은주 씨를 보는 동네 어른들의 눈길은 곱지 않다.
 
 

▲ 신념을 위해 농촌의 삶을 선택한 세 여자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 <땅의 여자> 포스터 
 
다부지게 그을린 얼굴에, 입가에 항상 웃음을 머금고 있는 소희주 씨에게는 엄마 나가지 말라고 떼굴떼굴 구르는 서너 살짜리 아이들이 있다. 밤에 여성농민들을 만나러 차를 몰고 나가던 그는 “저렇게 떼어놓고 가면 애들한테 안 좋겠지?” 혼잣말하듯 묻는다.
 
이들은 완고한 시집살이를 겪고, 가부장적인 남편의 편견에 부딪히기도 하며, 다른 여성들처럼 육아와 가사의 부담에 시달린다. 여성농민은 농사일에 대한 결정권이나 재산권에서 소외되기도 한다.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고 아이들은 자라고 돈 들어갈 데는 많다. 생활에 눌릴 때 혼자 밭에서 일하며 내뱉는 한숨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땅의 여자’들은 자신의 길을 꿋꿋이 걸어간다. 폐쇄적인 지역 공동체-항상 이방인 취급을 하는 낯선 곳에서, 이들은 눈치를 받건 말건 위축되지 않고 씩씩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변은주 씨는 시댁의 반대를 무릅쓰고 분가해 저녁시간에 새로운 지역사업을 꿈꾸며 사회복지사 공부를 한다. 소희주씨는 살림을 못한다는 타박에도 자책하지 않고, 일이 생기면 하우스에서 휭 빠져나가 지역의 어른들을 만나고 조직한다. 그는 서울상경투쟁을 망설이는 어른들에게 “농촌은 할매들이 다 지켰다, 남자들이 싸우겠냐, 우리 할매들이 앞장서야 한다”고 질기게 설득한다. 그렇게 할매들과 노래를 하고 길에서 집회를 해낸다.
 
강선희 씨의 이야기는 개인적으로 가장 크게 마음에 와 닿았다. 그는 밤마다 공부방을 하면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자식을 키우고, 농사를 짓고, 소를 기르며, 지역의 정치활동을 한다. 농촌에 대한 꿈, 사람다움에 대한 꿈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성과가 없는 듯 보이는 길을 ‘한발 한발 나아간다’고 믿으면서 싸워나간다.
 
나는 팔당의 농민들과 같이 이 영화를 보았다. 이제 공탁이 떨어져 농지를 빼앗길 위기가 임박한 조안면 송촌리에서였다. 어렵고 힘겹지만 땅을 지키고 희망의 끈을 끝끝내 놓지 않는 ‘땅의 여자’들의 삶이, 팔당 농민들의 싸움과 맞닿아 있다.
 
<땅의 여자>에는 허덕거리는 숨소리와 땀, 눈물과 웃음, 바람이 함께 담겨 있다. 희망과 즐거움을 섣불리 말하지 않지만,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의 아주 느리고 한결같은 걸음을 보여주는 영화다. 우리의 땅을 지켜온 것은 그런 걸음들이었다.
 
신뢰 속에 스며든 카메라의 시선
 
<땅의 여자>는 카메라의 시선이 인상적인 영화다. 마치 극영화를 보는 듯 카메라의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남편과 부부싸움을 하고 속의 응어리를 내뱉으며 울거나, 서먹한 시어머니와 대화를 하다 손만 만지작거릴 때 카메라는 그것을 바로 곁에서 담아낸다. 서로 입장이 반대되는 이들조차 방안에 들어온 타인의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일어나는 일 너머의 관계를 읽고 그것을 차분히 기록하며,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강선희 씨가 남편을 잃고 시집과도 소원해진 채 홀로 마루에서 아들을 끌어안고 나간 다음, 그 아들이 다시 방에 들어왔을 때 방안에 있던 시어머니는 손주를 말없이 끌어안는다. 카메라는 그들이 서로 보지 못하고 떠난 자리에서 그 마음을 모두 기록한다.
 
경운기를 타고 가는 시어머니의 얼굴 속에서 한 여성으로서, 농민으로서의 의지가 담긴 표정을 읽어낸 것도 카메라의 시선이었다. 이 영화는 찍는 사람과 찍히는 사람의 관계가 대상화의 위험을 넘어, 서로 위로를 주고받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다큐다. 대상에 대한 정직하고 성실한 태도와 신뢰가 빚어낸 눈부신 성취다. 9월 9일 개봉. (일다/ 안미선)
 
<땅의 여자> 블로그 http://farmwomen.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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