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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딸과 느릿느릿 아시아여행> 인도③ 아직 맥로드간즈 
 
*풍경보다는 사람을, 사진 찍기보다는 이야기하기를, 많이 돌아다니기보다는 한 곳에 오래 머물기를 선택한 어느 엄마와 세 딸의 아시아 여행기입니다. 11개월 간 이어진 여행, 그 길목 길목에서 만났던 평범하고도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라’는 달라이 라마 
 

▲ 살아있는 성자로 추앙되어지는 티베트 불교의 수장 달라이 라마.    
 
북인도 작은 마을 맥로드간즈(McLeod Ganj)가 요 며칠 갑자기 북적인다. 사흘 간 열리는 달라이라마의 법문을 듣기 위해 멀리서부터 사람들이 몰려든 것이다. 달라이라마는 살아있는 성자로 추앙되어지는 티베트 불교의 수장으로, 중국의 정치적 탄압을 피해 1959년 이곳으로 망명하였다. 우리도 탁아소 오전 일을 마치자마자 법회가 열리는 남겔 사원으로 향했다.
 
놀랍게도 사원 한쪽에 족히 백여 명은 되어 보이는 한국 사람들이 무리지어 앉아있다. 사원 근처에 머물며 공부 중이라는 스님들과 한국에서부터 날짜 맞춰 왔다는 신도들, 그 틈바구니에 우리 같은 뜨내기 여행자들이 간간이 섞여있다. 어린 딸내미들 덕분에 넘치는 환대를 받으며 한국 구역에 자리 잡고 앉으니, 옆자리 사람들이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 한 쪽씩을 내어준다. 한국어 동시통역 서비스라는 걸 알고는 입이 쩍 벌어졌다.
 
달라이라마의 말씀은 간결하고 명쾌하였다. 자신은 노력하는 수행자일 뿐 부처로 받들어지는 것을 경계한다며 시작된 이야기는 인간의 아득한 욕망을 채우는 유일한 길은 그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는 다소 평범한 진언으로 마무리 되었다. 막내가 내 옆구리 쿡쿡 찌르며 “엄마, 재밌어?” 한다. 그건 “나는 재미없어.”라는 얘기다. 그런데 나는 특별할 것 없는 그 말씀들이 마음에 착 와 닿았다. 이 기묘한 설득력은 그 말을 전하는 이의 맑고 곧은 삶에 기대어 있는 듯하다.
 
하지만 침략자 중국마저도 품어 용서하자는 달라이라마의 깊은 자비심이 모든 티베트인들을 감화시킨 것은 아닌가 보다. 티베트의 완전독립을 외치는 젊은 그룹들은 비폭력주의만으로는 엄혹한 정치상황을 헤쳐 나갈 수 없다며 여전히 불만을 터뜨리는 중이다. '피스 티베트(Peace Tibet)'와 '프리 티베트(Free Tibet)', 서로 다른 색깔의 두 구호가 어지럽게 교차하는 맥로드간즈에 어둑어둑 저녁이 내리고 있다.
 
록빠 페스티벌의 이모저모
 
 
▲ 록빠 엄마아빠들이 티베트 전통춤을 추고 있다. 엄마들은 츄빠를 입고 앞치마 빵덴을 두르고 있다.
    

 
록빠 페스티벌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해마다 한 차례씩 록빠 식구들이 뜻 모아 벌이는 마을 잔치라고 했다. 우리도 덩달아 바빠져 탁아소 일 끝난 뒤에도 장터에서 팔 물건들 정리하느라 며칠을 빠듯하게 지내었다. 엄마아빠들은 잔치 때 선보일 티베트 전통춤을 연습하느라 틈을 쪼개 모이는 눈치였고, 안 그래도 꼼꼼한 탁아소 매니저 남겔은 잔치음식부터 놀이마당까지 일일이 챙기며 여러 날을 동분서주하였다.
 
일요일 아침 동네 초등학교 운동장은 록빠 식구들로 왁자하였다. 음식장사 도맡은 쪽에선 티베트 빵 튀기고 짜이 끓이느라 눈코 뜰 새 없고, 또 다른 쪽도 여기저기서 기증받은 물건들 내어 팔 준비에 여념이 없다. 엄마들은 너나없이 티베트 전통 옷 츄빠(chupa)를 곱게 차려입었다. 블라우스 위에 소매 없는 긴 원피스를 받쳐 입은 모양새인데, 치마 위에 덧입는 줄무늬 앞치마 빵덴(pangden)은 결혼한 여자들만 두를 수 있다고 했다. 록빠에는 앞치마 하지 않은 아기엄마들도 여럿 있다.
 
딸아이들과 나는 며칠 전 풍선을 맡아 팔아달라는 부탁을 받고는 그러마 했었다. 풍선 후후 불어서 파는 것쯤 식은 죽 먹기지 했는데, 장사 시작하자마자 온 동네 아이들이 몰려와 서로 먼저 달라고 아우성치는 통에 혼이 쑥 빠졌다. 바람을 넣으면 토끼도 되고, 새도 되고, 방망이도 되는 한국 풍선이 여기선 아주 인기가 좋았다. 결국 두어 시간 만에 가진 풍선이 모두 바닥나서 아쉽게 장사를 마감해야 했다. 그런데 바람 넣는 주사기 모양 펌프가 시원치 않아 입으로 그 많은 풍선들을 불어주었더니, 입술이 기름에 튀긴 티베트 빵처럼 두툼해져 버렸다.
 
번 돈들을 다 쏟아 헤아리는데 우리 한 달 방값보다 더 큰 돈이다. 순식간에 떼돈 벌었다고 딸아이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남겔에게 장사한 돈을 몽땅 넘기고 홀가분하게 돌아서는데, 운동장 뛰어다니는 꼬맹이들 손목마다 색색의 풍선들이 매달려 대롱거린다. 저걸 우리가 다 불어댔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허기가 졌다. 엄마들이 파는 티베트 빵을 사먹으러 뛰어갔더니 잠뻴 엄마가 감자 커리까지 한 국자 얹어준다. 고소한 빵을 찢어 커리에 꾹꾹 찍어 먹었다.  
 
내내 북적대던 장터와 놀이마당을 접고 오후 햇살 아래 다 같이 둘러앉았다. 엄마아빠들의 티베트 전통춤이 막 시작되려는데, 시링(Cyring)이 춤추러 앞에 나간 엄마를 부르며 운다. 눈이 큰 시링은 아가방의 울보 3인방 중 하나이다. 대장울보인 메또는 오늘 하루 종일 엄마 등에 매달려 기분이 좋고, 눈물 반 콧물 반 섞어가며 우는 뻬겔은 감기가 심해 일찌감치 집에 갔다. 얼른 시링을 안고 춤추는 엄마 근처를 왔다 갔다 한다. “시링, 저기 엄마 봐. 지금 티베트 춤을 추시는 거래. 시링도 나중에 크면 엄마처럼 예쁘게 티베트 춤 출거지, 그치?” 저랑 나랑 마음이 통하였는지, 그냥 제 풀에 지쳐버린 건지 시링의 울음이 차츰 잦아들었다.
 
다행스럽게도 여기 난민촌 안에는 티베트 아이들을 위한 학교와 병원과 사원이 건재하다.  그것들은 내일을 기약할 수 있는 토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작 티베트 땅에서 티베트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아 보인다. 달라이라마가 머물던 라싸 포탈라 궁 앞에는 하루 종일 중국 오성기가 휘날리고, 티베트 아이들은 중국 아이들처럼 붉은 스카프 목에 두르고 학교에 가서 중국의 역사와 말을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자치권 보장을 약속했던 중국은 허울 좋은 평화협정을 진작 내동댕이쳤고, 자치구 내에 한족들을 대거 이주시켜 한족의 언어와 관습을 통하지 않고는 어떠한 경제활동도 불가능하도록 강제하는 중이다. 이러한 힘의 논리 앞에 ‘평화로운 저항’이란 얼마나 길고 힘든 싸움일지 나는 아주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겨울의 시작, 그리고.......
 
▲ 록빠 아가방의 시링과 시링엄마 


11월 말이 되자 하루가 다르게 기온이 내려가 옷을 겹겹이 껴입고도 등이 시렸다. 북인도 고산지대에는 겨울이 일찌감치 찾아왔다. 레(Leh)로 올라가는 길목에는 벌써 눈이 내려 버스길이 끊겼다고 했다. 한여름 더위를 피해 북쪽으로 올라왔던 여행자들도 다시 추위를 피해 하나둘 아래쪽으로 떠나고 있었다.

계절 바뀔 때마다 몸살 한 번씩 하고 지나가던 막내가 밤새 열이 올랐다. 머리도 깨질 듯 아프다 하고 숨쉬기도 답답하다며 축 늘어져 겁이 덜컥 났다. 동티모르 떠날 때 말라리아균 잠복기가 6개월이니 나중에라도 고열이 나면 무조건 병원에 가라고 사람들이 충고했었다. 하룻밤이 열흘처럼 길었다.

 
날 새자마자 근방에서 제일 큰 병원을 찾아가 말라리아 검사를 했는데 다행히 음성반응이 나왔다. 혹시나 하여 신종플루 검사도 하려 했더니, 검사 도구가 없어 못한다며 델리에 있는 종합병원으로 내려가란다. 한국에선 신종플루 검사나 처방이 너무 과하여 문제라던데, 여기선 검사 한 번 받으려고 버스로 열 몇 시간을 내달려야 할 판이다. 별 수 없이 해열제만 받아가지고 돌아왔다.
 
열은 좀 떨어졌는데 두통이 여전하다고 해서 걱정을 하니, 주변 사람들이 티베트 의원에 가보라 한다. 중의학이나 한의학처럼 진맥을 하고 약재를 지어주는 티베트 전통의학이라고 했다. 아이의 맥을 잡고 혈색을 살피던 티베트 여의사가 비염이 심해져 두통과 발열이 있는 것 같다고 환약을 처방해준다. 보름치를 지어 꼬박꼬박 먹이고 나니 아이가 말끔해졌다.
 
다시 떠날 준비를 한다. 어디나 처음 찾아갈 때는 낯설고 막막하고 왜 이런 고생을 자처하나 싶은데, 살림 살며 한참 지내다 보면 뒷골목 사소한 표지 하나에까지 살갑고 애틋한 마음이 든다. 그것들과 다시 이별하자니 속이 쓰리다. 이제 얼굴 익어 눈 마주칠 때마다 방실대는 록빠 아가들을 생각하면 서운하여 밥도 안 먹고 싶을 정도다. 한 곳에 오래 머무는 여행을 원하였고 지금껏 그렇게 해왔지만, 정든 뒤 헤어지는 일 앞에서는 번번이 허둥거리게 된다. 미처 생각지 못했던 복병이다.
 
큰 아이가 “나 여기 나중에 또 올 거야.” 한다. 그건 머물던 곳을 떠날 때마다 아이가 주문처럼 외는 말이다. 나는 고개를 여러 번 끄덕여주었다. 곳곳에 그리운 친구들이 있으니 아이는 어디든 다시 갈 수 있을 것이다. 나를 훌쩍 넘어 아이의 여행이 시작되고 있다. (진형민 / 일다) 이전 글 ->  다시 아이를 업고 다독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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