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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딸과 느릿느릿 아시아여행> 네팔④ 포카라 
 
*풍경보다는 사람을, 사진 찍기보다는 이야기하기를, 많이 돌아다니기보다는 한 곳에 오래 머물기를 선택한 어느 엄마와 세 딸의 아시아 여행기입니다. 11개월 간 이어진 여행, 그 길목 길목에서 만났던 평범하고도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진형민)
  
▲네팔의 대표음식 달밧은 무한리필이 가능하다. ©Renata.T.M / flickr.com      

 
빈이가 달밧 먹어도 되냐고 묻는다. 달밧(dahlbat)은 커다란 쟁반 위에 되직한 콩 스프와 밥 그리고 몇 가지 야채반찬이 곁들여 나오는 네팔식 백반이다. 스프 끓이는 작고 납작한 콩 이름이 ‘달(dahl)’이고 네팔말로 밥이 ‘밧(bat)’이라, 예쁜 이름 달밧이 되었다.

빈이가 좋아하는 야채 달밧은 대략 100루피(우리 돈으로 약 1,600원) 정도, 닭고기나 양고기 들어간 커리를 추가하면 조금 더 비싸진다. 만두나 면을 5~60루피에 사먹을 수 있는 현지 물가를 감안하면 아주 싼 음식은 아니지만, 밥이며 반찬을 원하는 만큼 몇 번이고 더 먹을 수 있어 배고픈 이들에게는 최고의 식사로 손꼽힌다.   

    
먹고 싶은 거 다 먹어, 하니 아이들이 진짜? 한다. 트레킹 내내 지갑 움켜쥐고 자린고비처럼 굴던 엄마가 갑자기 왜 저러나 싶은가 보다. 하지만 닷새 만에 산을 내려와 숙소 앞 익숙한 식당에 둘러앉으니 더 바랄 게 없다. 나도 큰 맘 먹고 ‘에베레스트 맥주’ 한 병을 시켜 내가 디디(didi, 언니)라 부르는 네팔인 주인아주머니랑 같이 건배하였다.
 
풍채 좋은 디디는 여태 여기 살면서 안나푸르나에 올라간 적 한 번도 없다고, 여기서도 다 보이는데 힘들게 뭐 하러 올라가느냐고 호탕하게 웃었다. 나는 킬킬대며 맞장구치면서도 속으로는 아닌데, 한다. 멀리서 한눈에 보는 산과 가까이서 큼큼 냄새 맡아지는 산은 아주 달랐다. 그건 ‘여행 책 읽어 아는 것’과 ‘진짜 여행하며 깨달은 것’만큼의 차이이다.

 
포카라 외곽 '여기, 일하고 싶은 여자들'
 
▲ 네팔 포카라 외곽에 자리잡은 여성작업장 WSDP  

 
포카라(Pokhara) 외곽에 여성작업장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솔깃했다. 여행 다니면서 자꾸 여성작업장 근처를 기웃거리게 된다. 내가 이런 것에 관심이 있구나 하는 것을 길 위에서 무심코 깨달을 때가 있다. 관성적으로 이어가던 삶 속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것들이다.
 
말레이시아에 있을 적에, 아프간 난민 아이들 학교에서 알게 된 내 동갑내기 교사는 아프간 엄마들을 위한 여성작업장을 준비하고 있었다. 난민이라는 불안정한 조건, 가부장적인 아프간 문화 속에서 엄마들은 이중으로 억압당하며 몸도 마음도 일찌감치 늙어가는 중이었다. 아프간 음식을 만들어 팔아보면 어떨까, 아프간 문양을 담아 지갑이며 가방을 만들면 어떨까, 엄마들 속엣 얘기 들을 수 있는 차 마시는 모임부터 꾸려볼까 하는 얘기를 같이 나누다가 떠날 날이 되어 아쉽게 헤어졌었다.
 
동티모르 딜리에서는 호주에서 지원하는 여성작업장에 들렀었다. 역시 지갑이나 앞치마 같은 소품들과 재활용지로 만든 공책과 상자, 천연비누 등을 만들어 팔고 있었다. 동티모르 아이들을 빼닮은 헝겊인형도 있었는데, 아이들이 저희들 막내 동생으로 입양하고 싶다 해서 눈이 별처럼 생긴 녀석을 데려와 ‘미달’이라 이름 지어주었다. 미달(midar)은 달콤하다는 뜻의 동티모르 말이다. 일자리 구하기 하늘의 별 따기인 동티모르 여성들이 정성껏 꿰매고 수놓아 미달이를 만들 수 있었던 건, 거기 작업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 염색한 실을 꾸러미로 만들고 있는 WSDP 여성작업장 아주머니들  

 
날 잡아 WSDP(여성기술개발프로젝트, Women Skill Development Project)를 찾아 나섰다. 책에 나온 지도가 하도 엉성하여 포카라 주변을 한 시간 넘게 헤맸는데, 찾고 보니 지름길이 빤히 보이는 곳이었다. 쇠대문이 열려있어 밀고 들어가니 마흔 명쯤 되는 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일을 하고 있다. 마당 한 쪽에선 펄펄 끓는 가마솥에다 실을 염색하고, 마루에선 색색의 실들을 일일이 직조하여 천을 만들고, 옆방에선 곱게 짜진 천을 재봉틀로 박아 가방을 만드는 중인데, 이 모든 일들이 젊거나 혹은 나이든 아주머니들에 의해 대수롭잖게 이뤄지고 있다.
 
시골 큰어머니처럼 넉넉해 뵈는 아주머니가 다가와 람칼리(Mrs. Ramkali Khadka)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럴듯한 취재를 위해 방문한 것도 아니고, 미리 연락을 취하고 찾아온 것도 아닌 정체불명의 방문자들이었다. 어정쩡한 기분이 들어 작업장 구경하고 싶어 왔다고 겨우 말을 건넨다. 람칼리 여사는 웃으며 따라오라고 손짓하더니 작업장 구석구석을 안내해주었다.

요 근래 시도하고 있다는 천연염색에 대해 공들여 설명해주고, 제품을 만드는 각 과정이며 공정무역 루트를 통해 유럽이나 일본으로 팔려나가는 물건들에 대해서도 챙겨 말해준다.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는 걸 알고는, 한국에서도 실내화 몇 개를 처음  주문해 와서 지금 만드는 중이라며 일부러 꺼내 보여주었다.

 
나중에 명함을 받고 나서 깜짝 놀랐다. 방문객들을 위한 안내원이려니 했던 아주머니는 이 작업장을 20년 넘게 지켜온 총 책임자였다. 처음엔 열여섯 명의 사람들로 시작하였지만 지금은 삼백 명 넘는 여성들이 이곳에서 기술을 배우고 일을 하며 자립을 도모하고 있다고, 그녀들은 나의 자랑이라고 담담하게 말하는 람칼리 여사를 나는 넋을 놓고 쳐다보았다.

▲ WSDP(여성기술개발프로젝트) 작업장을 20년 넘게 지켜온 람칼리 씨.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지원금 끊겨 사라질 뻔했던 정부 산하의 이 작업장을 출자금 모아 지켜낸 이도, 지금의 NGO 체제로 거듭나도록 부단히 애쓴 이도 모두 람칼리 여사였다고 했다. 이 수더분한 아주머니의 어디에 그토록 강건한 삶이 담겨있는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계급적, 인종적, 성적 차별 난무하는 아시아의 곳곳에서 람칼리 여사와 같은 여성들이 줄기차게 삶을 지켜내는 동안 나는 사회의 불평등에 관해 말로만 논하거나 사사로이 분노하였었다. 생각하면 참 낯 뜨거운 일이다.
  
 
재봉틀 드르륵드르륵 돌아가는 방에서 생김새가 낯익은 여성을 만났다. 반가운 마음에 한국 사람인가 물어보니 일본인이었다. 그녀는 이 작업장에서 재단 일 도와주며 두 해째 자원 활동 중이라고 했다. 염색과 직조, 재봉 기술은 어렵지 않게 배울 수 있지만 재단일은 좀 다른가 보다.

구매자들의 필요와 기호를 고려하여 새 패턴들을 개발해 내는 것이 지금 그녀가 하고 있는 일이다. 일본에서는 JOCV(일본해외청년협력대, Japan Overseas Cooperation Volunteers)를 통해 한 해에 삼천 명 가까운 젊은이들이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저개발국으로 자원 활동을 떠나고 있고, 그녀도 그들 중 하나였다. 어릴 때 아버지 따라 서울 와서 일 년쯤 살았었다고, ‘수제비’가 참 맛있었다며 활짝 웃는다.

 
"네가 하고 싶은 일을 계속 해, 우샤"
 
우샤(Usha)를 다시 만났다. 트레킹 마치고 헤어지며 포카라 떠나기 전에 꼭 다시 만나자 약속했었다. 다누와 락슈미는 산에 올라가는 바람에 못 오고 우샤와 여섯 살 먹은 우샤의 딸이 나왔다. 옛 건물들 보러 반디푸르(Bandipur)에 같이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우샤가 자기 집에서 달밧 먹고 가라며 자꾸 붙잡았다.

▲ 동티모르 여성작업장에서 입양한 우리집 막내딸 미달(Midar) 

맏언니인 우샤는 아직 학교에 다니는 친정동생들을 데리고 살고 있었다. 우샤와 꼭 닮은 여동생이 어느새 저녁상을 봐두었다. 집에서 스스럼없이 해먹는 달밧 맛은 어떨까 궁금했는데, 달밧 전문가 빈이의 말을 빌자면 네팔에서 먹어 본 것들 중 최고란다. 내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우샤의 남편이 집에 돌아왔다. 서로 이런저런 인사가 오가고 우샤와 같이 올랐던 산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나는 트레킹 내내 우샤가 우리 모두의 어머니였다고, 정말 훌륭한 가이드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남편의 반응이 시큰둥하다. 자기 아이도 제대로 안 돌보고 산에만 가는데 그게 뭐가 훌륭한 어머니냐고, 우샤가 빨리 둘째아이를 가져 집에 있었으면 좋겠단다. 우샤가 산을 오르는 동안 친정식구들이 대신 아이를 돌봐주고 있다고 했다. 우샤는 남편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만 있다.  
 
산에서 본 우샤는 참 당당했었다. 언제나 서두르는 법 없이 산을 올랐고, 일행들 몸 아프고 마음 다칠세라 세심히 살피는 눈을 가졌으며, 산속 마을 여자들의 속사정까지 헤아려 다독일 줄 알았다. 나는 열네 살이나 어린 우샤가 내 언니 같다고 생각했더랬다. 그런데 남편과 아이 옆에 있는 우샤는 좋아하는 일과 집 사이에서 마음 부대끼며 사는 어린 주부였다. 종종거리는 삶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숙소로 돌아갈 시간, 나는 대문 앞에서 우샤를 안고 한참 토닥여주었다.
 
우샤, 네가 하고 싶은 일을 계속 해. 혹시나 못 하게 되더라도 나중에 꼭 다시 시작해. 너는 정말 좋은 가이드라는 걸 잊지 마. 알았지? 알았지? 몇 번이나 다짐을 받고 돌아서 차에 올라탔다. 히말라야도 곤히 잠든 컴컴한 밤길에 우샤가 긴 그림자를 늘이고 서있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보이지 않아 마음이 아팠다. 포카라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진형민)

[세 딸과 네팔여행을] 카트만두, 싼 게 비지떡? 싼 게 비지땀! | 히말라야에서 마음과 따로 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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