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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신의 도서관 나들이(16) 왜 지금, 용산참사를 기억해야 하는가? 
  
우리 모두 꽝꽝 얼어붙은 주검 옆에서 고통 받고, 부끄러워하며, 오랫동안 아파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다음 우리가 내릴 역, 또 그 다음 역은 언제나 용산참사역일 것이다. (윤예영, ‘용산으로 이어진 길, 가깝고도 먼’,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 실천문학사, 2010)
 
지난 겨울, 난 두 번 용산에 다녀온 것 같다. 아니, 세 번이었나? 용산은 내게, 매 번 미로 속 같았다. 좀 더 값싼 컴퓨터 부속품들을 찾아 전자상가를 어지러이 헤매고 다녔고, 끼니 때우기에 적당한 음식을 찾지 못해 백화점 식당가에서 이리저리 방황했던 기억이 난다. 몸이 미로에 갇혔던 것처럼 마음도 그 속을 빠져나가지 못했던지, 4호선 용산역을 오르내리면서 단 한 번도, 2번 출구를 벗어나 조금만 걸으면 보인다는 그 남일당 건물을 둘러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2009년 1월 20일, 그날의 용산참사를 전혀 떠올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억하지도, 분노하지도 못하는 까닭

 
친구가 밤을 새며 단숨에 읽었다는 <내가 살던 용산(보리, 2010)>은, 내가 완전히 잊고 있던 그날, 엄동설한의 새벽, 비참하게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었던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화로 생생하게 전해주었다. 나도 그 책의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까지 책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읽는 내내 마음이 아팠다.

 
책을 읽고 난 후, 나는 내가 그 사건을 완전히 망각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그 사건 자체를 전혀 알지 못했던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솔직히 그 사건을 잊을 만큼 관심 있게 지켜보지 못했다. 용산참사를 기사로 접하긴 했지만, 내 관심은 곧 다른 데로 이동해갔다. 그래서 충분히 분노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제대로 분노했다면, 어찌 잊을 수 있었겠는가.
 
왜 제대로 분노할 수 없었을까? 누군가 의도했던 대로 다른 사건(당시의 강호순 사건)에 관심을 빼앗겨서일 수도 있지만, 그 일을 내 일이 아니라 남의 일로 치부하며 내 일에 급급해서일 수도 있다. 또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폭력에 대한 공포와, 그로 인한 절망감을 무관심으로 위장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자신의 욕망과 이기심, 무력감과 절망감, 그리고 두려움이 진실을 직시할 수 없도록 우리의 시선을 돌려놓은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똑바로 알지 못해, 알고 싶지 않아,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무지해서 눈물을 흘릴 수도, 화를 낼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뻔한 사실’을 진정으로 알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들 때문에, 시인은 시로서, 화가는 그림으로, 만화가는 만화로, 수많은 사람들이 용산참사가 일어난 그날부터 지금까지 같은 이야기를 각자의 방식으로 수없이 되풀이해 외치고 있다. 제발 눈 좀 뜨고 귀 좀 열어 보라, 하고.
    
‘진실을 감추는 사람들’과 ‘진실을 밝히려는 사람들’
 

우리가 알건 모르건 기억하건 망각하건, 5명의 철거민과 1명의 경찰 목숨을 앗아간 ‘용산참사’라는 비극적 사건이 벌어진 지 벌써 500일이 흘렀다. 그동안 살아남은 용산 망루 철거민이 항소심에서 중형을 선고받았고, 1년 동안 냉동고에 억류당했던 철거민들의 시신이 마침내 땅의 품으로 돌아갔지만, 세간의 관심을 불러일으키진 못했다. 진실을 밝히기 위한 싸움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데 말이다.
 
“망루에서 내려와 다친 사람을 깨워 살린 사람들이 왜 불타는 망루로 갔다고 하는가. 불이 활활 타는 망루에서 죽었다고 경찰이 발표했는데 유품 중에 왜 라이터 두 개는 안탔는가. 왜 장갑은 안탔는가. 자동차 열쇠 손잡이 플라스틱 부분은 왜 안탔는가. 왜 용산경찰서와 구청에서 온 공문은 전혀 타지 않았는가. 왜 그렇게 빨리 부검을 했나. 한 사람을 부검하려면 두 시간도 모자란다는 데 어떻게 다섯 사람을 두 시간 만에 했나. 왜 모든 시신을 완전히 난도질해놨나. 경찰은 왜 추모제에 간 유가족을 그렇게 때리는가. 그건 왜 보도가 안 되는가. 왜 경찰은 병원을 오가는 유가족을 막나. 왜 경찰도 정부도 진상규명하려는 유가족 마음을 못 헤아리나. 우리는 왜 불법인가”
(박수정, ‘학살, 엘도라도 카라자스와 용산’, 같은 책)

   
▲ <내가 살던 용산>에 수록된 '철거민 윤용현씨 이야기(김수박)' 중

 
철거민 유가족만이 아니라 용산참사를 제대로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이 궁금하다. 그 대답이 온전히 주어졌을 때만이 가라앉은 진실은 수면 위로 떠오를 것이다. 도대체 왜 진실을 숨기고 왜곡하려 하는 걸까?
 
용산4구역의 철거민이 특별히 폭력적인 사람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이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면, 그들이 순식간에 ‘도심 테러리스트’라는 꼬리표를 달게 된 것에 의아해진다. 왜 그들이 ‘새총과 화염병으로 무장한 도심 테러리스트’로 전락한 것일까? 누가 그들을 ‘새총과 화염병으로 무장’하게 만들었을까? 물음은 답을 얻지 못한 채 그 수만 계속 늘어간다.
 
‘도심 테러리스트’를 소탕하기 위해 대테러진압 경찰특공대를 투입해야 했다는 이들에게 수많은 질문이 던져졌지만, 누구도 공감할 만한, 진실 된 대답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부정적 이름붙이기’와 ‘희생제물삼기’를 선택한 그들을 일컬어 진실을 숨기고 왜곡하는 자들이라 부르는 것이다.
 
용산참사를 놓고, 대통령과 정부, 재벌과 보수언론, 검찰과 경찰, 용역 등이 진실을 감추는 편에, 철거민과 시민단체, 수녀와 신부, 문인과 예술가 등이 진실을 밝히고 싶은 편에 섰다. 사람들은 ‘국가권력, 신자유주의, 개발주의자, 자본가, 부자, 가진 자’가 은폐하고 싶어 하는 진실을 ‘비정규직, 농민, 청년 실업자, 도시빈민, 무주택자와 같은 소외된 자, 피억압 민중, 서민, 국민’은 알고 싶어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억울하게 불에 타 죽은 철거민의 고통과 모욕당하는 유족의 슬픔에 공감하고, 내몰린 자의 비명에 귀 기울이고, 사회적 약자에 대해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 또 억울한 자들을 위로하고, 자신의 무관심을 수치스러워하고 반성하며, 소외되고 희생된 자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실의 편에 선 사람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그들은 진정 인권이 보장되고 정의가 구현되는 사회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내가 묵인한 거짓이 끝내 나까지 삼켜버릴 것”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든다. 떨어져 대립의 각을 세우고 있는, 물 위로 드러난 두 빙산 아랫부분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어마어마하게 큰 얼음덩어리 하나일 수 있다는 생각. 보이지 않는 사람들, 이들은 진실의 편에 설 수도 있고, 거짓의 편에 설 수도 있다.
 
진실을 덮으려는 사람들이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고, 대화도 거부하며, 지칠 때까지 (진실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을) 침묵 속에 내버려두는 것, 그래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역사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도록 만드는 것”을 싸움의 무기로 삼는다는 것을 안다면, 당연히 잊지 않는 것이 그들에게 맞서 진실을 구해낼  가장 큰 무기가 될 것이다.
 
사실, 자본의 힘과 결탁한 정치권력에 농락당해 고달픈 생을 살아내야 하는 것도 끔찍하지만, 진실에 무심하고 거짓을 방관하여 자신을 거짓의 편에 내모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두려운 일이다. 나의 일상이 팍팍하다고 해서 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내가 묵인한 거짓이 끝내 나까지 삼켜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어느 편에 설 것인가? 우리에겐 선택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선택은 주어져있지 않다. 다만, 우리가 진실의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거짓의 길로 굴러 떨어지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진실의 편에 서기는 어쩌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고개를 들어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똑똑히 보고 듣는다면, 우리 귀와 눈을 사로잡는 무수한 거짓 소리와 영상을 가로질러 꼭 봐야 할 것을 보고 꼭 들어야 할 것을 듣는다면, 그리고 분노와 눈물을 보탠다면, 결국 절대로 잊지 않도록 기억에 새겨 넣는다면, 누구나 진실에 힘을 보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가 용산참사를 기억해야 하는 까닭은 우리 현실 속에서 아직 ‘용산참사’의 의혹이 풀리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대법원에서 용산의 진실이 승리를 거둔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거짓과 무관심, 은폐와 조작으로부터 구출해야 할 진실들은 도처에 널려 있기 때문이다. 진실을 보지 못하도록 눈과 귀를 막으려는 자들이 존재하는 이상, 제2, 제3의 용산참사는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용산참사를 망각해 버린다면, 그 진실을 어떻게 밝힐 것이며, 또 다른 용산참사들을 어떻게 막아내며 그 진실을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 그래서 지금 나는 눈을 뜨고 귀를 열어 슬퍼하고 분노한다. 그리고 그 기억을 가슴 깊이 새겨두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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