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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신의 도서관 나들이(15) 머무는 삶, 떠나는 삶
10대 시절, 나는 엉뚱하게도 농사짓는 삶과 세계 일주를 동시에 꿈꾼 적이 있었다. 머무는 한 떠날 수 없고 떠나면서 머물 수 없는 법이니, 내 꿈은 양립할 수 없는 모순된 욕망을 담고 있었다. 어른이 된 지금, 농부도 되지 못했고 세계일주도 떠나지 못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떠나고 싶은 마음과 머물고 싶은 마음은 내 삶 속에서 차례차례 고개를 내밀었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던 것 같다.
주저 없이 마음의 소리를 따라
얼마 전, 후쿠오카 마사노부의 <짚 한 오라기의 혁명(한살림, 1996)>과 존 프란시스의 <아름다운 지구인 플래닛 워커(살림, 2008)>를 읽었는데, 두 사람의 삶이 무척 감동적이고 매혹적이었다.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의 품에서 살아가려 한다는 점에서 두 삶은 꼭 닮아 있었다.
마사노부는 자연농법과 자연식을 실천하면서 자연인으로 살아온 농부이고, 프란시스는 아름다운 지구환경을 위해 동력운송수단을 거부하고 침묵의 도보순례를 실천한 과학자이자 환경운동가이다. 그들의 삶이야말로, 예전에 내가 막연히 꿈꾸었던 삶, 머무는 삶과 떠나는 삶의 이상적인 형태를 구현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각각의 삶이 쉽지 않은 만큼 한 쪽을 모방하기도 벅찬데, 이 두 가지 삶을 동시에 살아내는 것은 절대 불가능할 것이다.
남들 눈에는 비현실적으로 여겨질 정도로 이상적인 삶을 향해 과감히 달려 나간 이 두 사람도 이런 삶을 선택하기 전에는 대다수의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보통의 삶을 살았다. 그런데 어떻게, 왜, 평범한 삶과 단절할 수 있었던 것일까?
마사노부는‘한 순간의 충격’, ‘작은 체험’을 통해 다시 태어났다고 했다. 세관 식물검사관으로 일하면서 식물병리학을 연구하고 있던 그는 급성폐렴에 걸려 입원한다. 병을 앓고 난 후 삶과 죽음에 대한 고뇌에 빠지고, ‘인간의 지식이나 인위적인 것이 모두 헛되다’는 결론에 도달하면서, 현대과학을 부정하고 자연으로 회귀해야 한다며 돌연 안정된 직장을 내던진다. 산골로 내려가서는 자연농법을 통한 벼, 보리, 감귤 농사짓기에 나머지 인생을 바친다.
프란시스는 세 차례나 대학을 중도포기하고 즉흥적으로 살아가다가 대규모 기름유출 사건을 목격하고 자동차를 타는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더불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자신이 무얼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에 빠진다. 그러다가 이웃의 갑작스런 죽음을 체험하면서 자신도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자각한다.
미래는 불확실하고 확실한 것은 현재이니, 바로 지금 세상을 바꾸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 삶을 축복하고 싶다는 생각이 그를 22년간의 도보순례의 길로 이끈다.
이러한 삶의 전환에는 촉매가 되는 사건이 존재하며, 그 사건은 삶과 죽음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병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앞선 삶과 급격한 단절을 통해 나아가는 삶은 자연친화적인 삶이며, 병든 자연과 파괴된 지구를 구하는 길은 개개인의 내면을 치유함으로써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연 속으로 은둔하거나 순례의 길을 떠나는 것처럼 방법이 다를지라도 말이다. 사건이 촉매가 되어 생각이 달라지고, 변화된 생각을 주저 없이 몸으로, 행동으로 옮긴다. 이때 합리적이고 장황한 사색이 아니라, 한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깨달음의 소리를 놓치지 않고 삶의 방식을 바꾼다.
신념의 힘은 어디서 나오나?
그런데 삶의 전환은 선택하기도 어렵지만, 선택한 삶을 꿋꿋이 살아내기도 쉽지 않다. 힘든 사건들이 발생하고 고비를 맞고 수없는 시련에 직면한다. 그때마다 신념은 시험에 들고, 의지적으로 장애물들을 헤쳐 나가야 한다. 좋은 삶은 단번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사노부도 처음부터 자연농법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감귤산에서 자연농법을 시험해 보지만, 귤나무들을 모두 죽여 버린다. 하지만 거기서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수없는 실험과 실패를 거듭하면서 점차 자연농법을 완성해간다.
프란시스도 다르지 않다. 길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뿐만 아니라 혈연 가족이나 친구 같은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조롱거리가 된다. 심지어 도로가를 걷다가 죽음의 위협을 당하기도 한다. 자전거를 타고가다 자가용차에 부딪치는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도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구급차타기를 거부하는 고집스러움을 보인다. 매 번 힘겹게 용기를 내어 두려움을 극복해나간다.
보통 사람의 눈에는 이들이 고집하는 삶의 방식이 어리석어 보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들이 자기 신념을 단호히 지켜나갈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이들의 믿음이 바른 방향에 서 있었기에 지속적으로 의지적 행동에 힘을 실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구체적 삶 속에서 어려움에 부딪칠 때마다 자신의 믿음에 대해 진지하게 되물으면서, 그 장애물들을 창의적인 발상으로 극복해나가는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이들은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데서 가능한 방도를 찾아낸다.
마사노부는 땅을 갈지 않을 뿐만 아니라, 화학비료, 농약,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잡초를 선택적으로 심어 땅을 비옥하게 만들고 곡물과 어울려 자라도록 한다. 그의 밭에는 거미를 비롯한 온갖 종류의 벌레들이 우글거린다. 퇴비를 만들지 않고 짚을 논으로 되돌려 준다. 이러한 자연농법은 일주일에 하루 잠깐 논을 돌보면 충분할 정도로 몸수고가 많이 들지 않으면서도 충분한 먹을거리를 얻을 수 있다.
존 프란시스는 자신의 도보순례와 관련해 다른 사람들과 논쟁하지 않기 위해 침묵하기로 결정하는데, 침묵한 상태로 대학에서 생태학 공부를 하면서 학사, 석사, 박사과정을 밟아나가고, 의뢰받은 강연도 훌륭하게 소화해낸다.
다른 사람과 맺은 관계망도 신념을 굳건히 지켜나가는 데 있어 도움을 준 것으로 보인다. 마사노부는 스스로 획득한 자연농법을 다른 과학자들과 공유하고, 자연적인 삶에 공감하고 관심을 보이는 젊은이나 외국인들에게도 열린 마음으로 대한다.
프란시스도 걷는 중에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는데, 그 중에는 그를 경계하고 폭력적으로 대하는 사람도 있지만 많은 이들은 그에게 음식, 물, 잠자리, 돈 등을 제공하며 도움을 준다. 그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성심껏 들어주고, 몸짓으로 환경문제를 환기시킨다. 사람들과 마음으로 소통하고 공감한다.
게다가 이들 모두 의지적이고 주체적인 개인의 역할에 대한 인식이 분명하다. 개개인이 오염된 환경에 대한 책임을 져나가야 한다고 한다. 마사노부는 오늘날 관행농업의 책임이 정부나 과학자, 농부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잘 지적해주고 있다. 소비자가 겉만 보기 좋은 과일, 야채를 원하다 보니, 영양도 없고 맛도 없는 농산물을 농부가 생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프란시스 역시도 기름유출 사고의 책임을 정유회사와 정부에만 전가시킬 수 없고, 자가용차를 타고 다니며 기름을 사용하는 사람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또, 전 지구적 환경위기는 인간의 내면적 위기와 연결되어 있어, 아름다운 지구를 지켜내려면 개개인의 내면적 치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다른 이들이 치유의 순례를 떠날 수 있도록 돕는다.
머물고 떠나기를 되풀이하며 성장하다
마사노부는 현대과학을 버리지만, 자연농법을 실험해나갔다는 점을 보아 과학정신까지 버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끝내 산골 깊숙이 은둔해 세상과 벽을 쌓으며, 보다 내적이고 종교적인 삶 속으로 깊이 침잠한다. 반면, 프란시스는 도보순례를 하면서도 오히려 과학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리고 전 지구적으로 실천공간을 확대해 사람과의 관계망을 더욱 넓혀나가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더 넓은 세상 속으로 뛰어든다.
내가 감히 누구의 삶이 더 나은 삶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다. 이들의 삶은 그 누구도 흉내 내기 어려운, 성숙한 삶이다. 끊임없이 정신을 고양시켜 나가면서도, 실천적으로도 치열하다. 이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운이 좋다.
머물고 싶은 욕구와 떠나고 싶은 욕구, 서로 상충되는 욕망을 품고, 머물고 떠나는 삶을 되풀이 해 온 나로서는 마사노부와 프란시스의 삶을 통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삶의 방식에 있어서, 머물고 떠나는 삶은 서로 상이한 욕망이 표출된 다른 삶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삶들이 자연친화적이라는 점에서 같은 방향에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머물건 떠나건, 중요한 것은 ‘어떤 방향의 삶을 살아야 하는가’이다. 그리고 삶의 방향을 잘 잡았다면, 얼마나 깊이 있게 그 삶을 구체적으로 또 행동으로 실현해내는가도 고민해야 한다.
사실 그들도 각각 머물고 떠도는 삶의 방식을 선택하긴 했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머물다가 떠나기도 하고, 떠돌다가 머물기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지배적인 삶의 방식을 선택하더라도, 전적으로 어떤 한 방식으로만 삶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아직도 나는 떠도는 삶을 원하는지, 머무는 삶을 원하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지금껏 해오듯 떠돌기도 하다가 머물기도 하다가 그렇게 인생의 흐름을 타면서 성장해갈 것이라는 점만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방식은 순전히 내 수준의, 내 나름의 방식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구체적인 삶 속에서 길찾기를 도와주는 등대의 불빛 같은 삶이 있으면 큰 도움이 된다. 마사노부와 프란시스처럼 살지 않더라도, 아니 살지 못하더라도, 그들의 삶이 내게 표류하지 않고 인생의 풍랑을 헤쳐 나갈 수 있도록 등대의 빛이 되어 줄 것으로 믿는다. [일다] 이전 기사 보기 -> 민주주의의 힘이 강을 살린다
10대 시절, 나는 엉뚱하게도 농사짓는 삶과 세계 일주를 동시에 꿈꾼 적이 있었다. 머무는 한 떠날 수 없고 떠나면서 머물 수 없는 법이니, 내 꿈은 양립할 수 없는 모순된 욕망을 담고 있었다. 어른이 된 지금, 농부도 되지 못했고 세계일주도 떠나지 못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떠나고 싶은 마음과 머물고 싶은 마음은 내 삶 속에서 차례차례 고개를 내밀었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던 것 같다.
주저 없이 마음의 소리를 따라
▲ 후쿠오카 마사노부의 "짚 한 오라기의 혁명" 일본어판 표지
마사노부는 자연농법과 자연식을 실천하면서 자연인으로 살아온 농부이고, 프란시스는 아름다운 지구환경을 위해 동력운송수단을 거부하고 침묵의 도보순례를 실천한 과학자이자 환경운동가이다. 그들의 삶이야말로, 예전에 내가 막연히 꿈꾸었던 삶, 머무는 삶과 떠나는 삶의 이상적인 형태를 구현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각각의 삶이 쉽지 않은 만큼 한 쪽을 모방하기도 벅찬데, 이 두 가지 삶을 동시에 살아내는 것은 절대 불가능할 것이다.
남들 눈에는 비현실적으로 여겨질 정도로 이상적인 삶을 향해 과감히 달려 나간 이 두 사람도 이런 삶을 선택하기 전에는 대다수의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보통의 삶을 살았다. 그런데 어떻게, 왜, 평범한 삶과 단절할 수 있었던 것일까?
마사노부는‘한 순간의 충격’, ‘작은 체험’을 통해 다시 태어났다고 했다. 세관 식물검사관으로 일하면서 식물병리학을 연구하고 있던 그는 급성폐렴에 걸려 입원한다. 병을 앓고 난 후 삶과 죽음에 대한 고뇌에 빠지고, ‘인간의 지식이나 인위적인 것이 모두 헛되다’는 결론에 도달하면서, 현대과학을 부정하고 자연으로 회귀해야 한다며 돌연 안정된 직장을 내던진다. 산골로 내려가서는 자연농법을 통한 벼, 보리, 감귤 농사짓기에 나머지 인생을 바친다.
프란시스는 세 차례나 대학을 중도포기하고 즉흥적으로 살아가다가 대규모 기름유출 사건을 목격하고 자동차를 타는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더불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자신이 무얼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에 빠진다. 그러다가 이웃의 갑작스런 죽음을 체험하면서 자신도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자각한다.
미래는 불확실하고 확실한 것은 현재이니, 바로 지금 세상을 바꾸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 삶을 축복하고 싶다는 생각이 그를 22년간의 도보순례의 길로 이끈다.
이러한 삶의 전환에는 촉매가 되는 사건이 존재하며, 그 사건은 삶과 죽음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병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앞선 삶과 급격한 단절을 통해 나아가는 삶은 자연친화적인 삶이며, 병든 자연과 파괴된 지구를 구하는 길은 개개인의 내면을 치유함으로써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연 속으로 은둔하거나 순례의 길을 떠나는 것처럼 방법이 다를지라도 말이다. 사건이 촉매가 되어 생각이 달라지고, 변화된 생각을 주저 없이 몸으로, 행동으로 옮긴다. 이때 합리적이고 장황한 사색이 아니라, 한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깨달음의 소리를 놓치지 않고 삶의 방식을 바꾼다.
신념의 힘은 어디서 나오나?
그런데 삶의 전환은 선택하기도 어렵지만, 선택한 삶을 꿋꿋이 살아내기도 쉽지 않다. 힘든 사건들이 발생하고 고비를 맞고 수없는 시련에 직면한다. 그때마다 신념은 시험에 들고, 의지적으로 장애물들을 헤쳐 나가야 한다. 좋은 삶은 단번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사노부도 처음부터 자연농법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감귤산에서 자연농법을 시험해 보지만, 귤나무들을 모두 죽여 버린다. 하지만 거기서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수없는 실험과 실패를 거듭하면서 점차 자연농법을 완성해간다.
프란시스도 다르지 않다. 길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뿐만 아니라 혈연 가족이나 친구 같은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조롱거리가 된다. 심지어 도로가를 걷다가 죽음의 위협을 당하기도 한다. 자전거를 타고가다 자가용차에 부딪치는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도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구급차타기를 거부하는 고집스러움을 보인다. 매 번 힘겹게 용기를 내어 두려움을 극복해나간다.
보통 사람의 눈에는 이들이 고집하는 삶의 방식이 어리석어 보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들이 자기 신념을 단호히 지켜나갈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이들의 믿음이 바른 방향에 서 있었기에 지속적으로 의지적 행동에 힘을 실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구체적 삶 속에서 어려움에 부딪칠 때마다 자신의 믿음에 대해 진지하게 되물으면서, 그 장애물들을 창의적인 발상으로 극복해나가는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이들은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데서 가능한 방도를 찾아낸다.
마사노부는 땅을 갈지 않을 뿐만 아니라, 화학비료, 농약,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잡초를 선택적으로 심어 땅을 비옥하게 만들고 곡물과 어울려 자라도록 한다. 그의 밭에는 거미를 비롯한 온갖 종류의 벌레들이 우글거린다. 퇴비를 만들지 않고 짚을 논으로 되돌려 준다. 이러한 자연농법은 일주일에 하루 잠깐 논을 돌보면 충분할 정도로 몸수고가 많이 들지 않으면서도 충분한 먹을거리를 얻을 수 있다.
존 프란시스는 자신의 도보순례와 관련해 다른 사람들과 논쟁하지 않기 위해 침묵하기로 결정하는데, 침묵한 상태로 대학에서 생태학 공부를 하면서 학사, 석사, 박사과정을 밟아나가고, 의뢰받은 강연도 훌륭하게 소화해낸다.
다른 사람과 맺은 관계망도 신념을 굳건히 지켜나가는 데 있어 도움을 준 것으로 보인다. 마사노부는 스스로 획득한 자연농법을 다른 과학자들과 공유하고, 자연적인 삶에 공감하고 관심을 보이는 젊은이나 외국인들에게도 열린 마음으로 대한다.
▲존 프란시스의 "아름다운 지구인 플래닛 워커"
게다가 이들 모두 의지적이고 주체적인 개인의 역할에 대한 인식이 분명하다. 개개인이 오염된 환경에 대한 책임을 져나가야 한다고 한다. 마사노부는 오늘날 관행농업의 책임이 정부나 과학자, 농부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잘 지적해주고 있다. 소비자가 겉만 보기 좋은 과일, 야채를 원하다 보니, 영양도 없고 맛도 없는 농산물을 농부가 생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프란시스 역시도 기름유출 사고의 책임을 정유회사와 정부에만 전가시킬 수 없고, 자가용차를 타고 다니며 기름을 사용하는 사람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또, 전 지구적 환경위기는 인간의 내면적 위기와 연결되어 있어, 아름다운 지구를 지켜내려면 개개인의 내면적 치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다른 이들이 치유의 순례를 떠날 수 있도록 돕는다.
머물고 떠나기를 되풀이하며 성장하다
마사노부는 현대과학을 버리지만, 자연농법을 실험해나갔다는 점을 보아 과학정신까지 버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끝내 산골 깊숙이 은둔해 세상과 벽을 쌓으며, 보다 내적이고 종교적인 삶 속으로 깊이 침잠한다. 반면, 프란시스는 도보순례를 하면서도 오히려 과학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리고 전 지구적으로 실천공간을 확대해 사람과의 관계망을 더욱 넓혀나가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더 넓은 세상 속으로 뛰어든다.
내가 감히 누구의 삶이 더 나은 삶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다. 이들의 삶은 그 누구도 흉내 내기 어려운, 성숙한 삶이다. 끊임없이 정신을 고양시켜 나가면서도, 실천적으로도 치열하다. 이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운이 좋다.
머물고 싶은 욕구와 떠나고 싶은 욕구, 서로 상충되는 욕망을 품고, 머물고 떠나는 삶을 되풀이 해 온 나로서는 마사노부와 프란시스의 삶을 통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삶의 방식에 있어서, 머물고 떠나는 삶은 서로 상이한 욕망이 표출된 다른 삶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삶들이 자연친화적이라는 점에서 같은 방향에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머물건 떠나건, 중요한 것은 ‘어떤 방향의 삶을 살아야 하는가’이다. 그리고 삶의 방향을 잘 잡았다면, 얼마나 깊이 있게 그 삶을 구체적으로 또 행동으로 실현해내는가도 고민해야 한다.
사실 그들도 각각 머물고 떠도는 삶의 방식을 선택하긴 했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머물다가 떠나기도 하고, 떠돌다가 머물기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지배적인 삶의 방식을 선택하더라도, 전적으로 어떤 한 방식으로만 삶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아직도 나는 떠도는 삶을 원하는지, 머무는 삶을 원하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지금껏 해오듯 떠돌기도 하다가 머물기도 하다가 그렇게 인생의 흐름을 타면서 성장해갈 것이라는 점만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방식은 순전히 내 수준의, 내 나름의 방식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구체적인 삶 속에서 길찾기를 도와주는 등대의 불빛 같은 삶이 있으면 큰 도움이 된다. 마사노부와 프란시스처럼 살지 않더라도, 아니 살지 못하더라도, 그들의 삶이 내게 표류하지 않고 인생의 풍랑을 헤쳐 나갈 수 있도록 등대의 빛이 되어 줄 것으로 믿는다. [일다] 이전 기사 보기 -> 민주주의의 힘이 강을 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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