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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신의 도서관 나들이(14) 프란시스 무어 라페로부터 배우다 
  

안양천 지류인 학의천 모습 © 이경신

아침 일찍 하천변을 걸었다. 보랏빛 붓꽃, 노랑꽃창포, 하얗고 발그레한 토끼풀꽃이 지고 있는 자리에 분홍색 나팔꽃, 개망초의 하얀꽃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날씨가 더워지니 녹색 풀과 나무도 날로 무성하다. 하천에서 유유자적 헤엄치는 터오리, 한 번씩 날아올랐다 바위에 내려앉는 왜가리, 다들 반갑다. 그만큼 물 속 생명체가 풍성하다는 뜻이리라.

 
이렇게 자연하천의 모습을 되찾기 시작한 것이 아마도 6년쯤 되었나 보다. 하천가를 덮고 있던 콘크리트를 걷어낸 후의 변화였다. 해가 거듭되면서 더 많은 풀, 꽃, 나무, 그리고 물고기와 새들이 이곳을 찾았다. 인간이 무엇을 해서라기보다는 인간의 간섭이 줄어들어 자연 스스로 숨 쉴 여유를 되찾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전히 하천변에는 살아남을 힘이 없는 원예식물을 심고 죽이기를 반복하고, 자전거를 위해 흙길을 시멘트로 포장하고, 산책의 편이를 위해 쉴 새 없이 풀을 자르고 길을 낸다. 또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하수는 악취를 내뿜고 하천 물을 더럽히고 있다. 아쉬운 점이 많지만, 그래도 이전보다 나아지긴 했다.
 
그런데 이 물이 흘러가 도달하는 곳, 한강은 오히려 다른 운명, 아니 정반대의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니, 마음이 착잡하다.
 
선거만으로는 부족하다
 
지금껏 정부의 국토개발사업은 언제나 생태계 파괴로 이어져왔으니, 4대강 사업인들 뭐가 다르겠나. 그런데 이번 사업은 국토가 몸살을 앓는 수준이 아니라, 사지가 잘리는 죽음의 고통을 겪을 것이 빤하니, 국토가 병들어 대수술이 필요하다는 정부에 대해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분노는 지방선거기간동안 짜증스러움, 절망감, 무력감으로 변해갔다. 파헤쳐진 4대강에서는 뭇 생명들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목숨을 잃어가고 있는데도, 광대놀음 같은 선거전이 눈과 귀를 막았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귀가 따가울 정도로 소란스럽게 홍보가요를 틀어놓은 차량이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니고, 자동기계인형을 내세워 인사를 대신케 하는 선거에 도대체 무슨 기대를 할 수 있을 것인가. 내가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니라 들러리로 느껴졌다. 기운이 빠졌다.
 

프란시스 무어 라페 "살아있는 민주주의"

그렇다고 선거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무기력을 탈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한 표를 행사해서 내가 이 땅의 주인임을 자각할 필요는 있겠지만, 선거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 생태계를 지켜낼 후보를 지지하고 선출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해도, 선거에 참여한다고 민주주의가 바로 얻어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민주주의가 우리 삶의 방식이 될 때 비로소 우리가 원하는 삶, 우리가 주인 되는 세상이 오고, 나아가 생명체들이 평화롭게 어울려 사는 세상도 가능할 것이다.

 
바로 그 진리를 프란시스 무어 라페의 <살아 있는 민주주의>(이후, 2008)를 통해서 재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는 자유시장경제와 공모한 선거정치로는 진정 ‘살아있는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어렵고, 민주주의를 ‘정치형태’에 가두지 말고, 우리 자신의 ‘삶의 방식’으로 창조해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비난, 비관의 함정에 빠지지 말고
 
자유시장경제를 전면에 앞세우고 있는 우리 정부가 부를 집중시켜 거대권력을 생산하고 권력의 불균형을 초래한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다. 그런데 권력이 과도하게 불균형해지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 권력으로부터 소외되어 극도로 무기력해지는 것이 문제다. 절망감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의 힘을 부정하게 된다.
 
라페의 지적대로, 자기 삶에 대한 자긍심도, 공정함을 추구할 의지도, 타인과 함께 세상을 만들어나가고 싶은 욕구도 잃어버린다. ‘내게는 아무것도 변화시킬 힘이 없는데, 강력한 권력에 맞서 도대체 무얼 할 수 있겠나?’하며 비관주의에 빠진다. 그런데 오히려 비관주의야말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있어 큰 장애물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때, 특정 인물을 두려운 존재, 거대한 존재로 만들어 놓고, 미쳐 돌아가는 세상의 책임을 그 한 사람에게 떠넘기고 비난하기는 쉽다. 가만히 잘 생각해 보면, 그 누구도 홀로 세상을 미치게 할 수는 없다. 그 특정인물의 과도한 권력을 양산하는 데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일조하고 있는, 무수히 많은 평범한 사람들을 놓쳐서는 안 된다.
 
라페는 “홀로코스트, 르완다, 히로시마, 그리고 더 많은 사건들은 죄 없는 이들에게 고통과 죽음을 가한 ‘평범한 이들’이 저지른 끔찍한 행위였다는 진실”(3부 p. 192)을 상기시킨다. 즉, 평소 선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적절한 조건’이 만족되면 서슴없이 사악한 행동을 저지른다는 것이다. 바로 그 적절한 조건으로 “극단적 권력 불균형”을 들고 있다. 극단적인 권력 불균형은 우리를 절망하게 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를 사악하게 만들 수 있다. 익명성을 악용하고, 타인을 제물로 삼으면서 말이다.
 
지금 혹시 내가 무기력과 절망을 핑계로 다른 사람, 다른 생명체를 죽이는 일에 동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결국 민초로 불리는 평범한 우리가 어울려, 미쳐 돌아가는 세상을 만들 수도,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우리의 힘을 어디에 쏟을 것인지를 깊이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다. 참된 민주주의는 바로 우리 자신이 만들어가야 하는 과제인 것이다. 우리 미래는 우리 자신의 노력에 달려 있다.
 
바람직한 삶의 방식으로서의 민주주의

 
“지구의 생존은 그러므로 우리가 단절을 이루어낼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내가 강조했듯이 우리가 인간본성 그 자체의 선함이 아니라 인간 본성에 내재하는 풍요로움을 긍정할 수 있을지 없을지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자연은 이러한 위대한 전환을 이룩하는 데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우리에게 주었다. 공동체적 유대, 날마다의 생존 이상의 의미와 효율성, 공정함에 대한 우리 고유의 욕구와 능력을 선사해준 것이다. 우리 인간은 또한 매우 창의적인 존재이며 학습하는 존재이다“(프란시스 무어 라페 <살아있는 민주주의> 3부 ‘용기’)
 
나는 라페의 낙관주의에 매혹되었다. 그녀에 의하면, 민주주의는 바로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하고, 민주주의 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변화의 힘, 창조의 힘에 기대고 있다. 우리가 날마다 행동을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에, 새로운 경험을 통합해나가면서 지속적으로 민주주의를 진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좋은 삶으로서의 민주주의란, 널리 공유할 가치가 있는 공동의 목표 아래 다른 사람들과 서로 이어져 건강한 공동체를 꾸리고 살기 좋은 세상을 함께 건설해가는 것을 말한다. 서로가 책임지는 의사결정구조를 만들어 권력을 분산시키고, 공동체적 유대감을 쌓아 익명성을 없애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의사소통하고, 지속적인 경험과 학습을 통해 창조성을 길러야 한다는 충고도 귀담아들을 대목이다.
 
그런데 더불어 만들어가는 민주적 삶을 살기 위해서는 당연히 우리가 함께 할 사람을 잘 선택해야 한다. 내가 관계맺고 싶은 사람을 선택하는 일은 내가 그 사람과 닮고 싶다는 욕망의 표현이며, 실제로 닮아가기 때문이다.
 
배우고 알아서 함께 힘을 모으자

 

최병성 "강은 살아 있다" 황소걸음

민주주의가 좋은 삶의 방식이라면, 당연히 민주주의는 우리 일상 속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반드시 심각한 투쟁일 필요는 없고, 유쾌한 일상적 실천이 되어야 계속하기도 쉬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생태계, 우리의 강을 지키려면 어떤 일상적 실천을 해나갈 수 있을까?
 
우선, 일상적 실천에서 걸림돌이 되는 것은 바로 갈등, 대립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리고 거대권력자들은 갈등과 대립을 부정적 힘으로 몰아세운다. 라페는 우리에게 “갈등에 대한 공포는, 자주 좋은 사람들을 침묵 속에” 몰아넣어 진정한 민주시민의 길을 봉쇄하지만, 분쟁을 창조적으로 이용해 원하는 사회를 만들라고, ‘지식의 힘’과 ‘수의 힘’을 이용하라고 충고한다. 어느 사회라도 갈등, 분쟁, 대립은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긍정적 힘으로 만들어 가느냐이다. 배우고 알아서 다수가 함께 행동할 때만이 길이 열린다.
 
일단 4대강 사업을 중단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시작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4대강 사업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알기 위해서는 배워야 한다. 지속적으로 배워나가면서 성찰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최병성의 <강은 살아있다>(황소걸음, 2010)를 읽었던 것은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앎은 분노와 절망을 넘어서는 힘이 되었다. 덕분에 읽었던 것을 청소년들, 궁금해 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제대로 설명해 줄 수 있었다. 도서관 희망도서로 주문했으니까, 우리 동네 사람들도 4대강 사업의 진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진실을 알게 되면 창의적으로 힘을 모을 수 있는 발판이 생겨난다. 그렇게 민주주의는 한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배우고 함께 힘을 모으며 진정한 민주주의를 만들어가는 동안, 위험에 처한 4대강도 구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강을 구하는 일이 우리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 줄 것이다. 더는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은밀한 의사결정이 이루어지지는 못할 것이다. 정부도 책임감을 가지고 정책을 펴나갈 것이다. 결국에는 정치권력에서 돈의 권력을 제거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이같은 낙관적 미래는 바로 민초인 우리 자신의 힘에서 나온다. (이경신) 

[4대강 지키기] 잔인한 기록, 그러나 일생을 걸고 할 것 | 물부족 국가, 물 그릇론…진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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