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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춘신의 생활문학’ (12) <일다>는 개인의 입체적인 경험을 통해 ‘여성의 삶’을 반추해보는 생활문학 칼럼을 개설했습니다. 필자 윤춘신님은 50여 년간의 생애를 돌아보며 한부모로 살아온 삶 이야기, 어머니와 할머니와 외숙모 이야기, 일터 이야기, 그리고 딸과 함께 거창으로 귀농한 현재이야기를 들려줄 것입니다. -편집자 주
엄마랑 사이 좋으니.
뚜렛증후군으로 정신과 진료를 마치고 일어서는 딸에게 의사가 묻는 말이다. 출입문 고리를 잡고 있는 딸의 등을 슬며시 밀면서 비열하게 웃었다. 다음에 뵙겠다고 목례를 하면서 의사와 눈을 맞추지 못했다.
딸에게 묻던 말이 귀를 관통하고 심장에 고인다. 혈관을 타고 흐르지 못한 채 고여서 저 혼자 펄떡거렸다.
약국으로 걷는 동안 식은땀이 밴 손으로 딸의 손을 잡는다. 답답하다고 말하는 걸 보니 그새 뿌리칠 기세다. 버스 정류장까지만 가자며 애절한 목소리를 내는 나를 보고 “엄마 왜 그래요” 한다. 딸의 손마디가 적당한 살집으로 둘러싸여 있는지 꾹꾹 눌러 보았다.
내 손과 발은 도적놈의 그것과 닮았다. 길쭉한 손가락 마디는 툭 불거져서 가시덤불 한 움큼쯤에는 상처 하나 입지 않을 만치 투박하다. 내 것과 꼭 닮은 손가락을 한 엄마 손을 잡아본 기억이 없다.
구리 반지 하나 끼어볼 틈이 없었던 엄마 손은 닮지 말아야 할 것 중의 하나였다.
입술이 부르튼 딸의 잠든 얼굴에 고작 안티푸라민이나 천연덕스럽게 바르는 손. 지아비의 살가운 위로 한번 받아보지 못한 손. 평생 더러운 걸레질이나 설거지통에 담겨진 손. 제 딸의 편지에 답장하는 글씨조차 못 쓰는 손. 신 새벽 청소일을 하다 허기진 입에 틀어넣을 주먹밥을 쥐고 사는 손.
그토록 그악스런 손을 한 엄마를 안아 줘야지 벼르던 일은 의무감 때문이었다. 국수나 삶아 먹자던 일요일 오후. 엄니 좀 안아보자며 짐짓 너스레를 떨면서 다가섰다. 두 팔을 벌리고 엄마 어깨를 감싸 안기도 전에 휘청거리며 중심을 잃고 말았다. 엄마는 두 다리에 힘을 뻣뻣이 주고 서서는 고작 한 팔만 내 겨드랑이에 낀 체 몸의 절반만 꽉 끌어당겼다. 이쪽 편 가슴에 상체를 살포시 기댄 채 안심을 하지 못했다.
포옹 한번을 낯설어 하는 엄마를 올바른 눈으로 바라보고 이해하긴 고통스러웠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소외된 상징으로 치부해 버리는 게 차라리 속이 편해지는 엄마에게도 엄마가 있었다. 전생에 당신 엄마의 엄마이었기라도 하듯이 자나 깨나 엄니 타령을 했다. 제 딸년의 등록금을 ‘엄니 조기새끼 사 잡수시오’ 라며 보내버리는 엄마는 제 새끼보다 제 부모가 먼저였다.
“너 거 에미가 들지름을 좋아한다”며 땟국물이 흐르는 소주병 하나를 들고 서울을 다녀가던 할머니. 에미 등골 빼먹는 년이라고 욕사발을 들고 다니던 할머니는 친정 나들이 하듯 엄마를 찾아와 신세한탄을 늘어지게 했다.
만날 욕이나 해대는 무식한 할머니 좀 못 오게 하라는 내 말에 엄마는 상심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손주 새끼 키워 봐야 소용없다느니, 너 거 새끼도 나를 못 오게 하면 좋겠느냐며 입가에 허연 거품이 말라붙을 때까지 같은 말을 반복했다. 사실은 할머니를 좋아하고 욕이 싫어서 그랬다며 겨우 진정을 시켰다.
다른 이야기 거리나 만들 요량으로 할머니 엄마는 누구냐며 물었다. 할머니는 엄마가 없다고 했다. 낳은 사람이 있으니 엄마가 없을리는 없지만 얼굴도, 이름도 모르며 키워준 사람도 없다고 한다. 아버지가 새 장가들면서 아기 때 버렸다고 한다. 하필이면 문둥이들이 모여 사는 굴다리 밑. 거지들과 몰려다니며 성장을 하고 남의 종 신세가 되었다고 했다.
냉동실 문을 열어 얼음을 찾았다. 큰 사발 가득 와르르 쏟아 부운 얼음 위로 물을 가득 채웠다. 목 줄기를 타고 흐르지 못한 물을 내뱉고 말았다. 냉기가 두 손 가득 차올라진 사발을 꼭 붙들고 서 있었다.
할머니가, 라며 시작되려는 뒷말을 하려는 엄마는 사실로 존재한다. 그러나 할머니는 픽션이어야 한다. 품에 안긴 적이 없는 아기를 수용할 수 없었다. 그 아기를 안게 되면 픽션은 사라지고 만다. 엄마한테 건네 받은 버려진 아기. 도저히 안을 수 없는 아기 앞에서 내 역사에 대한 부정을 멈추었다. (윤춘신) ⓒ일다 www.ildaro.com
[윤춘신 생활문학] 엄마는 서서 밥을 먹는다 | 객지 ‘여자’ | 곰보딱지 외숙모 | 아담이 떠난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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